우리나라에서 '중도'라는 의미는 보통 2가지로 쓰인다.
1. 여론 통계상 부동층
2. 정치적으로 민주당계/보수정당/진보정당 중 어디도 아닌 제3지대
2번의 경우가 원내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가장 돋보였던 시기는 박근혜 정부 말기 (2016-2018)의 대분화기였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 국민의당이 분화(2016)되고, 새누리당에서 바른정당이 분화(2017)되었다.
그리고 2018년에 이 두 당이 합당해 바른미래당이 창당(2018)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안철수의 '새정치'에 대한 모호함과 보수정당에서 떼어져 나올 경우 기반이 없어 취약해지는 친유계 보수정당의 한계 등으로 제3지대 정당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
선거에서 힘을 쓸 수 없는 정당은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바른미래당과 정의당이 생존을 위해 선거제도개혁을 부르짖으며 애쓰긴 했지만 결국 거대양당의 구도 다툼 속에 두 정당 모두 순차적으로 몰락했다.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에서 중도라는 개념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가 1995년 문민정부 치하에서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차기를 노리던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까지로 올라간다고 본다.
이때 새정치국민회의는 이른바 '중도적 국민정당'을 표방했으며, '중도개혁주의'라는 사상이 등장했다. (이후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이낙연 새로운미래 대표 등도 이 사상을 강하게 주장했다.)
중도개혁주의는 이론적 기반이 있다기 보다 전략적으로 등장한 사상이었다.
호남지역주의와 좌파 프레임에 갇혀 있었던 김대중이 대권을 잡기 위해서는 중도화가 필수적이었다.
구태여 언급하지 않더라도 '보수'라는 개념은 생활 속에서 당연하게 대한민국의 압도적 주류 이념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니까.
비주류였던 민주당계 정당이 주류였던 보수정당에게 도전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국정운영, 경제성장에의 지향 등을 어필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보수주의를 스스로 주장하는 건 어불성설이니(한때 그렇게 주장한 바도 있었지만 누가 그렇게 보겠는가?), 결국 중도는 정치공학적으로 매우 유리한 선택이었다.
또 중도를 내세우는 건 반사적으로 보수에 서 있었던 김종필과의 DJP연합을 성사시키는 데에도 약간은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실제로 1998-2003년의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로 인해 외부로부터 요구 받게 된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을 시행함과 동시에 기초생활보장제도 등 복지국가의 기초를 본격적으로 다지기도 했다.
이른바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본격 주장하고 실행한 첫 정부였다.
외환위기의 수습 이후에 등장했고 보다 젊은 86세대가 등장한 참여정부의 경우에도, 정치적/문화적 바이브는 확실히 리버럴해졌지만 정책적으로는 김대중 정부의 정책 기조를 이어갔다.
일례로 신용카드 사태의 수습 당시 참여정부의 기본 입장은 '시장 원칙에 따르되, 회생 지원을 국가가 한다'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원리 하에 신용회복지원제도 등이 마련되었다.
참여정부 이후 9년 여의 보수정부 동안 시장 중심 정책 패러다임으로 돌아서면서, 상대적으로 민주당계 정당들은 보편적 복지(무상급식 등)를 주장하는 등 더 왼쪽으로 움직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훨씬 더 경제적 진보주의 성향이 된 셈이다.
문재인 정부에 이르러 소득주도성장 패러다임이나 공공 일자리, '마중물' 논리 등을 보면 그러한 점들이 보인다.
다만 문재인 정부에서는 그전의 국민의 정부-참여정부의 기조를 이어받아 혁신성장을 위한 규제 샌드박스도 시행했다.
인문주의(사람이 먼저다)에 기초한 노동의 존엄 보장과 복지의 충실 등을 주장한 것이 반드시 좌파적이라고만 하기는 어렵다. (예컨대 기독교민주주의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다. 김진표 전 국회의장이 자기 자서전에서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콘라트 아데나워 전 독일 총리를 꼽았고, 경제민주화는 본래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와 유럽식 사회적 시장경제 그리고 코포러티즘(Corporatism, 협동조합주의 Co-operativism과는 다르다.)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이를 내세운 김종인을 문재인 당시 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초빙했다.)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친명계로 주류가 교체되면서 민주당은 더 강경한 보편복지 -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기본사회론 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랬다가 갑자기 여론을 의식한 듯(? 그런 여론이 있지도 않았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K-문화 산업, AI 성장 등을 강조하고 있다.
심지어는 스스로를 '보수'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십수 년 이상 이재명이라는 정치인이 자타공인으로 지녀 온 민주당 내 좌파의 목소리라는 브랜드를, 본인의 태도나 언행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도 아닌데 스스로 '내가 보수다'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일까?
김대중의 경우에는 97년 대선에서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본인이 본래 그렇게 급진적이거나 격정적인 스타일이 아닌 것도 있었고.
정치에서는 정책이나 이념만이 아니라 그것을 현출하는 태도나 언행, 바이브 등이 중요하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이재명계로 주류가 교체된 민주당은 급진적이고 단정적이며 흑백논리가 강하고 정책적으로는 Flip-Flop을 반복한다.
민의를 따르는 게 아니라 민의를 끌고 가려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 민주당계 정당이 가장 거부감을 가졌던 지점이다.)
폭주하는 세력은 단 한 번도 좋은 귀결을 맞은 적이 없고, 오직 스스로 견조한 국정 역량을 보이며 국민의 생활을 제대로 돌보려는 책임감을 보일 때만이 비로소 자신이 잘 되면서 반사적으로 정적들을 누를 수 있다.
이 지점이 정치적으로 중도주의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도리어 종래의 보수정당의 권위주의와 새로이 부상한 팬덤정치를 함께 껴안아 민의를 참칭하는 현재의 민주당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