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와 신냉전 -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며

by 남재준

조선의 근대화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사회변동의 요인을 개인과 구조로 나누어 볼 때, 둘 모두 근대화는커녕 식민화의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은 요인으로만 작용하였다.


사회구조의 측면에서 볼 때, 조선은 전기와 달리 후기로 갈수록 교조적인 성리학 질서가 확산되는 동시에 부농과 잔반의 등장은 신분제를 동요시켰다.


갈수록 비대해지는 양반 계층에 세도정치로 인한 권력의 가문에의 집중과 그로 인한 부정부패의 성행은 중앙-지방 할 것 없이 행정 질서를 문란하게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삼정(전세-군역-환곡)의 문란을 가져와 백성을 이중으로 수탈하고 고통스럽게 했다.


그 결과로서 1862년 임술농민봉기 등이 이미 터졌고 동학과 서학이라는 대안적 종교와 사상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서구와 일본이라는 열강이 침략적으로 접근해왔을 때, 근대화의 주도자가 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던 위정자들로서 왕실과 사대부들의 식견은 그저 중화 질서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볼 때 고종+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정쟁을 놓고 누가 시비에서 우위에 있느냐를 논하는 것이 무의미했다.


왜냐하면 어느 쪽이 승리하던 조선은 망국과 식민화의 바다로 이미 침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원군은 외척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지만 이러한 구상 자체가 사실상 폐쇄와 전근대 상태의 조선전기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설령 고종을 그대로 두건 그를 폐위하고 이준용 등을 대안으로 대원군이 섭정으로 복귀하건 간에, 대원군이 외세의 손을 잡건 동학농민군의 손을 잡건 간에 일단 개방한 이상 조선은 외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대원군과 고종, 황후 모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통해 상황을 계속 모면하는 식으로 정치를 했다.


대원군은 임오군란 때에 청을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다 역으로 이미 고종 측과 내통했던 청에게 납치당했고 후에 다시 청의 계략으로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갑오개혁 때는 일본의 손을 잡았고 일본이 자신을 허수아비로 만들자 다시 농민군, 청과 손잡아 일본을 몰아내려다 발각되어 쫓겨났고 최종적으로는 황후를 제거하려는 일본의 손을 잡았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청을 이용해 군란 때 일시적으로 재집권한 대원군을 몰아냈고 또한 동학농민운동 때 청병차병을 하였으며 을미사변 전후로 인아거일(引俄拒日)로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 하였다.


결국 대한제국의 수립은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 하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보면, 대원군이건 고종-명성황후건 결국 왕권=국가로서 왕이 서야 나라가 서고 내가 바로 왕(최고권력)이 되어야 한다는 전근대 봉건 왕정의 룰북 하에서만 움직였다.


근대화는 국가와 왕권을 분리해 왕이라는 상징 권력을 중심으로 국민성을 강화하되 중앙집권 정부가 군사와 행정, 과학기술 등의 체계를 완비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결국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 청의 중체서용(中體西用)은 불가능했다.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회진화론과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19세기의 세계에서 중화 질서를 유지하면서 과학기술만 받아들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근대의 룰북 안에서 조선의 위정자들이 움직여가며 이전투구를 벌이는 동안 열강들은 계속 조선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히고 이권을 침탈해 갔다.


청은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등을 통해 계속해서 종주국으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조선을 통제하려고 했다.


일본은 톈진조약을 이용해 청의 파병 이후 동시 파병 후 아예 경복궁 정변 이후 갑오개혁-을미개혁을 통해 실질적으로 조선의 내정을 틀어쥐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위정자들의 인식은 안이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대원군의 신념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권력을 잡는다 해도 구조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은 권력에 집착했다.


마찬가지로 고종과 명성황후 역시 외교적 줄타기는 자강(自强)이 근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하고 자강이란 동도서기 즉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한 채로는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전근대적인 왕권이 서야 나라가 선다는 인식 수준으로 일관했다.


청병차병 때 대신들이 반대했고 또 톈진조약의 효과를 모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종이 차병을 기어이 결정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리 그래도 청이 일본을 이기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상당했던 때였으므로 설령 일본군이 동학농민군 진압 후 본국으로 철군하지 않더라도 청군이 해결해줄 거라고 믿었던 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순진한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게 믿는 것이 아주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을 대비해야 했고 또 청일의 국토 진입을 허용하게 되면 앞으로 다른 열강들이 조선으로 더 쉽게 들어올 수 있을 여지를 준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인지 싶다.


실제로 이러한 취지의 주장이 회의 때 있었음에도.


고종은 선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왕권에 대한 집착이 강했고 나라와 왕권을 분리하지도 못한 것 같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상이었다는 평은 틀리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말이 크게 그르지 않다는 점이 매우 씁쓸하다.


[귀국은 독립에 필요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실로 허명뿐인 독립에 불과하다. 제군은 최근 10년간 나라의 생존 유지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중략) 제군은 동맹을 생각하고 있는가? 무릇 동맹이라는 것은 그들과 우리의 실력이 일치하는 경우에 비로소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귀국(대한제국)과 동맹을 맺는 나라는 절름발이를 동반하고 걷는 것과 같아서 자유로운 보행을 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의 외교는 유치한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력에 호소하는 것도 불사하는 바이다. 따라서 제군이 다른 세력을 믿고 이 조약의 결정을 지연시키려 하는 일이 있다면, 이는 완전히 헛된 의뢰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귀국에 하등 이익될 바 없음이 명백하다.]


_ 1905.11.16. 이토 히로부미, 권중현(농상공부대신)에게.


우리나라는 신냉전과 서구 헤게모니의 실추라는 중대한 역사적 격변으로 들어가고 있다.


분명 제국주의의 그 시절과 달리 우리나라는 기적적으로 과거의 식민국가 중에서도 독보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또 다시 변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때 정신을 차리고 생존을 위해 독한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국운이 어떻게 될 지는 모를 일이다.


지금이야말로 지난날의 역사를 깊이 새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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