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5월 27일, NATO-러시아 기본 협정 조인식에서 재임 한 달 남짓이었던 토니 블레어(Tony Blair, 1953-) 영국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세대는 인생 전체를 전쟁 없이 지내거나 우리 자녀들을 전쟁에 보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가능성을 전망할 수 있는 첫 세대입니다.”
인간은 역사를 잊지 않아야 하지만, 이 말이 회자되는 이유는 인간이 역사를 잊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때로는 우연처럼, 때로는 필연처럼, 때로는 양자가 교차하면서 역사는 반복되어왔다.
파국을 사전에 조정하려는 시도들이 없지 않았음에도 결국 파국을 향해 모순은 극으로 치닫는다.
결말은 혐오, 극단주의, 포퓰리즘, 내셔널리즘, 전체주의, 공산주의 이런 것들이고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수명이 있기 때문에 정점을 찍은 후에는 모두에게 파탄적 결말을 선사한다.
<진격의 거인>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고 두려워하며 본 장면은 맨 마지막에 주인공들의 세대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 다시 전쟁과 파괴가 발생하고 소년과 개가 대지의 악마의 나무로 들어가는 부분이었다.
기나긴, 한 인간의 정신으로 감당하기 어려우면서도 번번이 반복되는 서사와 역사의 반복이 예고된 것이다.
우리와 세계의 역사도 잘 살펴보면 그렇게 다를까 의문이다.
지난 계엄 이후의 탄핵심판 과정에서 일부 언론은 헌법재판소의 결정 선고가 지연되는 상황을 혹여나 기각으로 결론이 나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했었다.
또 공화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법치주의의 설계란 시민과 정치의 영역보다 현자(법관)와 사법의 영역에만 국한된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그런데 실제 과정과 결과를 보면, 국민들은 계엄이라는 수십 년만의 그리고 민주화 이후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6:4라는 여론으로 귀결되었고 정작 헌법재판관들은 8:0으로 인용 결정을 냈다.
과거와 현재의 거대하고 복잡한 맥락의 차이는, 비극을 낳는다.
말하자면 예컨대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은 계엄의 잘못이라는 본질보다 현재 자신들이 정치 세력으로서 존립하기 위해 진공 상태를 용납할 수 없다는 점, 이재명은 죽어도 안 된다는 점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정치적 필요성이 더 중요한 것이다.
더 심각한 건 극히 일부이긴 하나 청년 일부의 반응일 것이다.
아주 극소수이긴 하지만(또는 그렇게 믿고 싶지만), 청년 중 일부는 ‘어쨌든 해제되지 않았느냐’, ‘이해할 구석이 없는 건 아니다’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이건 그들을 국민의힘의 ‘극윤’들과 같게 취급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계엄이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대, 내지는 최소한 그것이 가져온 관성으로 인한 권위주의의 시대가 무엇인지 안다.
그렇다는 것은 그것의 본질을 알고 겪어 보았으면서도 주체적으로 계엄이라는 것을 수용하던가, 아니면 역으로 그것이 초래한 구조로 인해 영향을 받아 수용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라도 있다.
하지만 대개 청년 세대는 계엄이 무엇인지 이번에 처음 겪어보았다.
자유민주주의가 일상화되고, 계엄이나 전쟁이 게임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무슨 안줏거리처럼 소비되는 세상이라서 그런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역사는 항상 태초에 사회를 설계하거나 새로운 시대를 개막한 사람들의 의도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
1982년 제5공화국 정권 초기에,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된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딸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다.
“아빠는 현주가 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자주 그려보곤 한단다. 엄마 아빠가 학교 다니던 때와는 달리, 현주의 학교생활은 훨씬 자유롭고 재미있을 거야. 그때쯤에는 세상도 훨씬 좋아지고 자유로와질 테니 말이야.”
실제로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난 후의 세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게 되었다.
분명히 교사가 학생을 함부로 체벌하고, 수많은 학생들이 도떼기 시장 비스무리하게 교실에 함께 앉아 있던 그때보다는 지금이 천국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폭력은 온라인의 차원 등 훨씬 더 지능적이 되었고, 아이들은 더 영악하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며, 치열한 입시 경쟁은 상향 평준화로 인해 더 극을 달리고 있고, 입시 대비의 차원으로 만들어 놓은 공교육은 역설적으로 ‘훈련’에 최적화된 사교육을 따라가지 못하며, 학교와 사제 관계라는 구조적 불평등은 이상적 의미의 민주화가 되지 않은 상황인데, 다른 한편으로 더 극성이 된 헬리콥터 학부모들과 자율이 아닌 방종을 체화한 일부 학생들과 교사들의 극심한 고통 등 많은 문제들이 나타나 있다.
물론 낙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언제나 개선은 또 새로운 문제들을 가져온다.
그러나 절대적 기준으로 볼 때, 오늘날 학생이건 학부모건 교사건 간에 지금의 교육의 현실을 전체적 수지를 따져 볼 때 긍정적으로 보냐 하면 그렇게 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하에서 일부 아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더 극단적인 사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품게 되고, 방종 속에 그들은 제어 불능이 된다.
망각과 역사의 유사한 반복은 우리나라의 문제만은 아니다.
맨 처음에 언급한 토니 블레어의 언급은, 오늘날 서구의 상황을 다시 곱씹어보면 이해찬 전 총리의 편지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상황에 대한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적어도 블레어 총리와 같은 50년대생들의 경우에는 일단 2차 대전 세대의 자녀 세대였고, 전후 복구와 경제성장 및 복지국가 그리고 전쟁 세대가 확립한 새로운 확고한 규범으로 인해 안정을 누렸다.
또 그들은 어느 정도 전쟁과 파시즘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청년 세대들은 좌건 우건 간에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사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수용한다.
하긴, 토니 벤(Tony Benn, 1925-2014) 전 영국 노동당 의원이 이라크 전쟁 반대 연설에서 밝혔듯, 전후 세대는 실은 누구나 전쟁을 상대적으로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바로 생겼다.
블레어 총리 본인이 이라크 전쟁을 개전한 사람이기도 하니까.
전쟁과 파시즘 등을 겪은 세계는 그 이후 세대에게는 풍요로운 경제와 질 높은 사회를 상속하고자 했고 이는 상당 부분 달성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신자유주의적 재구조화는 대다수의 개인을 구조의 패배자로 남기고 구제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사회의 개인화가 계속 진행되니, 결국 성장 시대의 종말과 더불어 세계는 다시 포퓰리즘과 결합해 ‘민주주의를 이용하는’ 신권위주의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더는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의 구도가 아니게 된 것이다.
세계사는 제국주의, 전체주의를 극복했으나 이번에는 ‘민주주의를 숙주로 하는 극단주의와 포퓰리즘의 결합’이라는 위험이 극대화된 것을 맞게 되었다.
더구나 이번 바이러스의 진화는 서구 대내외의 헤게모니 약화와 제도권-국민 간 소통 부재 등 인체의 면역력이 이미 상당 수준 하락한 상황에서 맞는 것이다.
거시적으로 보면 기후위기와 AI 등 과학기술이 내생변수가 된 시대, 불확실성-불안정성의 만성화, 성장 시대의 종말과 근본적인 경제사회의 대전환, 팬데믹 등 세계화가 디폴트값이 된 사회 등이 되었다.
단순히 사법과 시장경제 등 전후에 형성해 놓은 제도와 체제로 버티는 데에서 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근본적으로 문화와 정신의 혁신이 불가피한 상황을 인류사는 맞은 것이다.
우리 세대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인과 공동체 간 연결의 상생적 복원, 문화부터 환경에 이르기까지 지속가능한 사회, 시장경제순환 모델의 건전한 복구, 생활보장과 건전재정의 양립,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의 양성과 숙의와 소통의 확대를 통한 민주주의의 개혁 등 중대한 역사적 과제들을 떠안은 상황이다.
단순히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역사의 특이점을 직면하고 대전환의 파고를 단순히 넘을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그 대전환의 방향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도록 각성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