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차원에서 볼 때, 보수주의는 어떤 독자적 세계관이나 목표를 가진 사상이 아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보수주의와 다른 사상을 구분함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자유주의는 사회계약론 하에서의 개인들의 집합체를 전제하고 집단의 개성에 대한 침해를 경계하며 이를 막고자 한다.
사회주의는 근대 계급 경제사회를 전제로 노동 계급이 자본 계급을 극복해 진정으로 인류가 착취에서 해방되는 사회를 이루고자 한다.
둘 모두 진보주의의 속성을 지닌다.
진보주의는 '이상'을 내포한다.
근대 사회의 개막에 기여한 계몽 사상과 과학 혁명에 근거하여 진보주의는 과학기술과 사회개혁을 통해 이상사회에 도달하고자 한다.
이것은 합리성에 기초한 계획과 전략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보수주의는 이러한 일체의 발상에 회의적이다.
보수주의는 단순히 지킨다거나 관성에서 시작한다기 보다도, 진보주의가 주도한 근대적 구상과 열망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했다. (보수주의의 시조인 에드먼드 버크가 내놓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회의론이 보수주의의 뿌리가 된 것을 생각해보자.)
보수주의는 '현실'을 내포한다.
현실은 매우 복잡하고 경로의존적이기 때문에,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거나 그 이상이 될 수도 있고 또 언제나 불확실하다.
결과적으로 선의를 가지고 추구한 변화가 현재의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냉정하게 보면 바꾸지 않는 것이 바꾸는 것만 못하다.
보수주의는 바로 이러한 '냉철한 지혜'를 지향하는 '태도'이다.
어떤 결론을 미리 내린다기 보다도 신중하게 여러 요소를 세밀하게 따져 내린 최선의 결론을 지향한다.
불가피한 대안을 회피하지 않는 것도 보수주의의 중요한 미덕이다. (마거릿 대처의 'There is no alternative')
모든 사회와 문화에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게 된 각자의 역사적 경로와 이유가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그렇게 된 데 모종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오직 시간과 경험에 따라 안착된 것들만을 믿을 만하다고 본다.
그러한 생각에 따라서 보수주의는 단순한 부동(不動)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을 지녔다.
또한 모든 사회와 문화는 각자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일률적인 보편 기획을 모든 사회와 문화에 강제할 수도 없다.
각 사회와 문화의 개별성을 보존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노력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보수주의적 사고이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반동주의가 아니다.
인류의 세상사는 모두가 항상 불가피하게 변하며, 변화에 맞도록 사회가 유기적으로 또 점진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하며 동시에 지킬 것은 지키자는 것이 보수주의의 견해이다.
그러나 반동주의는 과거의 특정 상태를 이상화하고 현재에서 과거로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변화'하려고 하는데 이는 미래의 다가오지 않은 이상향을 목표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진보주의의 일부 조류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도가사상의 도(道)와 같이, 보수주의는 고정되거나 견고한 어떤 실체라고 보기 매우 어려운 사상이다.
다만 인생과 역사의 지혜의 소중함에 대해 강하게 믿는 사상이라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