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며칠 전 국립현대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감상한 수많은 작품 중에 가장 짙은 인상을 남긴 것은 <친숙한 고통>이었다. 이 작품은 김범(1963-) 작가의 개념미술 세계의 일환이다. 김범 작가의 작품은 조각, 영상, 드로잉, 출판물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익숙한 대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이 작품은 연작 13개 중 하나인데, 캔버스에 아크릴릭 물감을 사용하여 작가가 디자인한 다양한 퍼즐들을 나타내었다. 13개의 퍼즐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문제와 난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이다. 퍼즐은 1번에서 13번으로 나아가며 점차 규모가 커지고 난이도도 높아지는데, 이는 해결해야 하는 문제의 크기와 난이도를 상징한다.
내가 본 것은 그 중 12번째에 해당하는 고난도의 미로였다. 이 미로는 매우 장대했다. 그리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약간 어지러울 정도였다.
메시지와 결합해 이 작품을 볼 때, 마음에 다가온 생각들이 몇 가지 있었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사람들은 남의 인생을 얘기할 때는 불행한 이야기도 그저 쉬운 안줏거리로 소비하는 경우가 꽤 많다. 그러나 정작 같은 어려움이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는 그러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영국 배우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 새삼 떠오른다.
미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미로 안에서 헤매는 사람들의 고통이 극단적으로는 유희로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인간 본성의 일부분으로서의 이기심은 인간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건조한 사실로부터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분리되어 있기에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는 때로 남이 안 되어도 자신은 되고, 남의 고통도 자신에게는 재미가 되는 지경으로 치닫기도 한다.
통계라는 것에 관한 인문적 통찰도 마찬가지이다. 지구온난화나 개발도상국의 기아 문제에 관한 통계를 보면, ‘멀리서’ 보는 입장에선 물론 ‘희극’까지는 아니더라도 ‘탐구’ 대상에 지나지 않을 때가 있다. 더 극단적으로는 그냥 ‘무감각’할 때도 많다. 수나 그래프라는 것은 실제 서사와 감정을 충분히 전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이는 결국 그들의 고통에 대한 기부 등과 같은 실천적 도움으로 이어질 수 없게 한다. 아프리카와 중동에 관하여 보면, 서구인들의 접근은 가관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최근 이민과 난민에 대한 강력한 통제와 자기 민족과 문화에 대한 보존을 강조하는 내셔널리즘이 성행하고 있다. 불과 십수 년 전에 난민 보트의 아이가 해안가에서 죽은 모습으로 상징되는 인도주의적 참사를 유발하고도 그것은 더 강해졌다.
사실 사람들과 사회들의 미로는 이어져 있으며, 때로는 한 사회가 다른 사회의 미로의 난이도를 높이기도 한다. 아프리카와 중동의 문제들은 일정 부분 서구의 책임이 크다. 제국주의 시대에 유럽이 마음대로 아프리카의 부족적 구분과 무관하게 국경을 긋거나 중동의 정권을 그 지역 세계의 입장에선 데우스 엑스 마키나 마냥 날려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해당 세계의 사람들은 부족 간 전쟁과 학살, 권력의 진공 상태로 인한 테러 조직의 준동 등을 감당해야 했다.
게다가 그러한 현상들은 결국 지역 세계 바깥까지 영향을 미치므로, 결과적으로 서구는 계속 해당 지역들의 상황을 주시하며 인도적 지원-외교적 압박-군사적 지원 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난민들도 감당해야 하게 되었다. 서구가 높인 개발도상국들의 미로가 다시 서구의 미로의 난이도를 높인 셈이다.
신(神)과 미로
그렇다면 미로 바깥의 사람들은 정답을 아는가? 미로를 통괄하는 거시적 해법이나 전략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 이는 미로를 계속 거쳐온 사람들이 만들어 온 지혜일 것이다. 하지만 각자의 미로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으므로 같은 전략이나 해법을 적용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수 있고, 미로를 인생이라고 볼 때 안에선 밖의 미로 전체를 아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저 태어나면서 미로에 ‘놓인’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미로를 설계한 신은 모든 것을 알 것인가? 신은 무류(無謬)하며 전지(全知)하다는 전제가 있으니 분명 그는 알 것이다. 신이 바라보는 인간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 것인가를 궁금해할 때가 있었는데, 이 작품이 그에 대한 실마리를 주지 않을까 싶었다. 신의 입장에선 수많은 미로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형국일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다.
그 역시 신의 입장에서는 '재미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설계한 주체와 그에게 주어진 과업을 전 세계의 차원에서 참으로 장엄한 차원의 미로처럼 관조하는 일이 말이다.
친숙한 고통 – 중간 거리에서 본 미로
작품 자체로 돌아오면, 이 작품은 ‘친숙한 고통’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제목 자체는 무제다). 얼핏 보면 이것은 약간 역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고통은 그 자체로 친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익숙해지더라도 쉽게 익숙해지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고통은 태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인간의 실존적 공허를 가장 빠르게 채우는 것이기도 하므로, 그런 점에선 ‘친숙’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존재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데 인간은 생각하고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므로 거기에는 부조리가 있으며 이 때문에 고통이 동반되므로 고통은 아주 태초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고통은 선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동시에 사회는 인간의 선악과는 무관하게 항상 고통을 선사한다. 모든 사람은 제각기 다른 맥락과 모양의 난관과 난제를 헤쳐가며 살아간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약간 비약해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또 조금 비약해서 말하면, 고통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내가 언급한 세계관은 주지하다시피 실존철학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것이 허무주의와 구분되는 점은 그러한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주체적 선택과 의미 부여를 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체적 선택이건 그렇지 않은 선택이건, 또한 앞서 언급했듯 선악과 무관하게, 인간은 항상 고통과 함께한다. 이런 점에서 고통은 친숙하다는 말은 일리가 있다.
그리스신화에서 시시포스가 받은 끊임없이 돌을 굴리는 형벌은 이러한 견해들과 관련해 흥미로운 시사점을 준다. 카뮈의 메시지처럼, 본질을 중심으로 본다면 그가 돌을 굴리는 건 ‘의미 없는 반복’에 불과하나 실존의 관점에서 보면 지속적으로 그 돌을 굴려 가는 시시포스에 대한 관점의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
앞서 신은 우리에게 미로라는 과업을 선사했다고 했는데, '친숙한 고통'은 신은 왜 인간을 무의미의 부조리에 던져진 존재로 창조했으며 선인(善人)에게조차 고통을 선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일정한 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아무런 고통이 없는 합일된 하나의 차원이라는 말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동시에 다른 의미에선 무의미이기도 하다. 고통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쾌락이라는 개념도 무의미하다. 나아가서는 역설적으로 그 쾌락은 고통으로 전환될지도 모른다.
통제된 행복 대신 ‘불행할 권리’를 요구하는 <멋진 신세계>의 존을 떠올린다. 우리는 결국 미로 때문에 불행해하나 미로가 없으면 그저 쾌락의 기계에 불과한 존재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통은 친숙하면서 동시에 ‘친숙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가며
나는 현재 미로에서 길을 잃은 상태이다. 인생이라는 미로는 때로 잠깐의 해답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나의 선택에서는 잠깐의 해답으로부터의 쾌락을 얻은 지가 오래되었다.
단조롭다면 단조롭다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인 김범 작가의 <친숙한 쾌락>에 눈길이 간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일지도 모르겠다.
저 미로 안 어딘가에 있는 나를 보는 미로 밖의 나.
생각을 바꾸어, 미로가 있으므로 내 삶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어떨까 싶다. 인생은 항상 난국(Imbroglio) 속에 있으므로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우리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미로 속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