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정책은 교육을 교육으로 보지 않는가

by 남재준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선 교육학자나 교육관료 등이 교육부장관이 되었던 전례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대학교수도 상당히 많았는데 나는 솔직히 대학교수를 교육인이라고 보지 않는다.


대학교수는 기본적으로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하며, 고등교육은 이미 자아가 어느 정도 형성된 성인을 대상으로 한 지식과 역량의 함양을 도모하는 교육이다.


교육학자가 아니라면 대학교수에게는 교육을 그 자체로서 중요하게 생각할 기회가 흔치 않다고 본다.


그런데 대학교수면 누구든 그냥 교육부 수장으로 둘 수 있다는 발상은 이해하기 어렵다.


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대학교 총장은 대학의 학사행정을 총괄하는 사람일 뿐이다.


초중등교육에 대한 전문성이 거의 없다.


있다고 해봐야 그냥 본인도 학부모라는 연장선상에서 또는 대학에서 내려다보는 현실을 모르는 비판에 그칠 가능성도 상당하다.


실제로 역대 교육부장관 중 상당수는 정치인, 행정학자, 경제학자 이런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은 교육을 그 자체로 이해하기 보다 외생적으로 이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구문제를 위한 학제 조정이니 균형발전을 위한 지방대 지원이니 하는 말들이 나온다.


정작 교육의 뇌관인 교육과정이나 교육평가, 또 대학입시나 종합적인 인적자본 및 인재 양성 등의 문제가 주요 이슈로 화두에 오른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교육을 경제 차원에서 외생적으로 보더라도 교육혁신이 경제혁신의 필수 전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또 사회 차원에서 외생적으로 보면, 중등교육(중학교+고등학교)은 자아가 형성되는 청소년기를 관통한다.


전반적으로 우리 교육은 아이들의 선택의 자유를 매우 느리게 넓혀 왔다.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야 개성이 보장된다.


개성이 보장되어야 기업가정신이나 혁신을 위한 토양이 조성될 수 있다.


결국 경제와 사회의 두 차원이 서로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이들의 주체적 선택과 책임의 연습은 인간발달 과정의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만 19세가 되면 갑자기 '불완전하던' 아이가 '완전'한 성인이 되고, 또한 '주체적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는가?


그때까지 선택이라는 것의 기회가 아닌 그저 주어진 목표를 향해 참고 또 참으며 달려오는 '훈련'에 익숙해져 있는 아이들이다.


종국에는 시민도 인재도 나오지 않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상한 오해를 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오히려 아이들을 너무 풀어주어서 문제가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자율 또는 자유의 보장은 방종과 다르다.


이는 아이들을 무조건 싸고 돌거나 방종하게 방임하라는 뜻이 아니다.


아이의 심리를 잘 살펴 세심하게 개입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의미와 비슷하다.


교육은 그 자체로 가정교육에서부터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며 사회경제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균형발전이나 사회불평등 보정, 인구문제 등은 교육의 소관이 아니거나 교육정책 자체의 초점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그냥 교육제도에서 파생된 효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회불평등 보정을 위해 정시를 확대하자 하면서도 정작 수능 자체의 평가 척도로서의 문제와 더 중요하게는 개선안에 대한 논의는 활발하지 않다.


수능은 명문대 갈 기회를 넓혀주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1차적으로 대학수학능력을 보는 시험으로서 적절한지에 근거해 판단되어야 한다.


수능개혁 없는 정시 확대는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훈련과 줄 세우기에 지나지 않는 과거의 교육으로 돌아가자는(사실 지금도 근본적으로 입시 중심 교육이 변한 건 없지만) 의미이다.


게다가 수능도 상대적으로 공정하다 뿐이지 결국에는 개인들이 평등한 경제적 배경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배경의 문제는 교육정책의 영역이 아니다.


교육정책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뚜렷하다는 점은 앞에서도 언급했다.


모두가 사실상 계층 상승을 위한 관문으로서 입시 훈련인 교육에 몰입하는 것을 '교육'열이라고 말하는 건 어폐가 있다.


결과적으로는 그 '인재'들의 태반은 학문 연구로 가지 않으며 사회경제의 인적 자원이 불균등하게 배분되어 블루오션과 레드오션인 분야들이 모두 상이한 이유로 불만을 가지게 된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에서 왜 노벨상이 나오지 않는지를 잘 생각해보자.


교육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경제정책에서도 나타난다.


신시장과 신산업 창출 및 첨단산업 고도화를 위해서는 양질의 창의적 역량을 갖춘 인재들이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미 자아가 훈련에 익숙해진 상태로 고등교육에 진입해 한참을 헤매다가 길을 찾는 상황인데, 개중에 그러한 리더십과 창의력을 가진 인재를 찾기는 난망하다.


고등교육부터가 진짜 교육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고등교육만 바꾼다고 해서 무언가 우리 교육의 질이 바뀔 거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시도는 이제까지 수없이 많이 했다.


소위 대학구조개혁이라는 것이 앞서 언급했듯 인간의 자아정체성과 역량 계발에 가장 중요한 시기인 중등교육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끼쳤는지 나는 전혀 모르겠다.


지금 논의 중인 '서울대 10개 만들기'도 사실 본질은 그냥 지방대 지원을 강화해 달라는 것이 아닌가 싶은 회의가 크다.


서열이라는 건 문화적인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


명문대라는 개념은 소비자의 심리가 결정하는 브랜드와 비슷한 것이다.


결국 교육과정과 그 결과로서의 평가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하는 입시 등부터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장기적으로 이러한 브랜드의 위상 등도 변화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역대 정권들은 '복잡하다', '예민하다'는 등의 이유로 가장 중요한 교육문제에 대해 제대로 메스를 대지 못했다.


그러면서 정작 정치적 손해를 보면서도 하고 싶은 일들은 다 했다.


공대를 늘리고 규제완화와 세제-금융 혜택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인재가 키워지는 게 아니다.


경제의 펀더멘털을 키우려면 전면적인 교육혁신과 같이 사람의 역량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는 사회문화적 토양이 만들어질 수 있는 구조개혁이 필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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