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한국사회의 과제는 공적 담론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사실 2030년을 향해 나아가는 현재 상황에서는 담론의 질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사회적, 공적 담론장이 제대로 형성되고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의문이다.
우리는 북한에 대한 유화나 강경이니 검찰의 폐지니 존치니 페미니즘의 의의니 하는 수많은 주제들이 사회의 무대 위로 부상한 것을 알지만, 정작 중요한 건 우리가 그러한 주제들을 다룰 담론장을 제대로 형성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자가 제기할만한 의문이다.
모든 표현은 일단 그것을 표출할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지 표현의 자유가 자동적으로 검증을 면하게 해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표현 자체만으로 공격하는 것도 문제긴 하지만, 표현을 하는 것과 표현의 타당성을 바로 연결하는 듯한 뉘앙스도 부당하다.
표현은 검증이라는 절차를 반드시 요한다.
문제는 그 사상이나 표현의 검증 메커니즘이 과연 제대로 작동하고 있느냐에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뭐든 일단 표현 자체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지금은 표현의 타당성과 질에 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예컨대 페미니즘에 관하여 논의할 때, 많은 안티페미니스트들은 슬라보예 지젝과 토론하던 조던 피터슨과 비슷했다. (그들이 피터슨을 그렇게 좋아하는 건 닮아있기 때문일까?)
내가 기억하기로 피터슨은 단지 심리학자이면서도 하나하나가 복잡한 고도의 철학/사회이론들인 자유주의-포스트모더니즘-페미니즘-마르크스주의 등을 하나로 묶어서 말했다.
그는 단지 <공산당선언>을 읽고 왔다고 말했다.
내가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지점이다.
내가 페미니즘에 관하여 토론하려면 그 이론이나 사상이나 전제를 ‘이해’해야 한다(‘동감’이 아니다)고 말하자마자 어떤 사람은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되물었다.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일상의 감각보다 ‘사회적 감각’이 필요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학적 상상력’ 같은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의 출발점인 젠더가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마거릿 대처 여사처럼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개인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개인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왜 국가나 기업이라는 것이 실존하는 것처럼 말하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실제로 기업이 무언가를 ‘했다’라고 말한다.
존재하지 않는 주체의 행동이라는 건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하기 어렵다.
설령 우리가 개념적으로 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쨌건 사회라는 건 우리가 살아가고 세상을 이해하는 데 쓰이는 개념임도 분명하다. (사실 자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해하는 우주의 한계는 오직 우리가 쓰는 수학과 물리학 이론의 설명 한계 내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러한 나의 주장에 대해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본질적인 문제는 이런 논의에 대해 고민해 볼 생각이 애초에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
또 이해할 생각이 없다는 주장의 이유에는 페미니스트들을 모두 일괄적으로 과격분자로 모는 일반화의 오류도 깔려 있다.
하지만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고, 나아가 페미니즘과 싸우고 싶다면 페미니즘을 알아야 한다.
나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원리에 기초해 말한 것이지 페미니스트가 되라고 말하지 않았다.
요즘 세계의 근본적 문제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 있다.
예컨대 페미니즘 자체(대상)보다 페미니즘을 다루는 ‘사고와 태도’에서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너무 오랜 세월 동안 봉건제-식민통치-군사정권 치하에 있었고 근본적으로 유교적 정서에 기초한 위계 문화가 상당해 온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대개 많은 민주진영의 인사들이 일단 무조건 언로를 여는 것 자체에 집중해 왔다.
모든 것을 너무나 포괄적으로 막고 있으니, 담론의 질에 대한 논의는 자칫 그렇게 막는 것에 대한 명분의 제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면, 우리 사회는 공적 담론장이라는 게 제대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조차 의문이다.
기본적인 문화적 양식의 차원에서 볼 때, 우리 사회의 코드는 ‘나’ 중심으로만 재편되었는데 그러면서도 위계나 유행 등의 권위주의/집단주의 문화의 잔향이 짙다.
사람들이 공론장에서 허심탄회하게 소통하지 않고 뒤에서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거나 서로 사실상 의견 ‘교환’이 아닌 그냥 상대에 대한 ‘찌르기’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행동들을 하고, 앞에서는 국회부터 거리에 이르기까지 서로에 대한 극단적 수준의 적대만이 가득하다.
이제는 대화나 이해를 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것은 자유주의라고 할 수 없다.
이기주의를 집단주의가 붙잡고 있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자유사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각자가 서로에게 공간을 내어주고, 어느 정도 ‘그러려니’ 해주는 여유가 좀 필요하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표현을 막는 것도 반대로 그냥 공격이 난무하게 내버려두는 것도 비자유주의적이라고 본다.
표현이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매우 까다로운 작업일 수밖에 없다.
서로의 근본적 가치관과 경험이 다른 많은 이들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이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싫어도 공존을 향해 한 발자국이라도 나아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병존마저 더는 유지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진보 여부의 문제가 아닌 생존 여부의 문제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세계가 점점 열린 사회(Open Society)가 아닌 닫힌 사회(Closed Society)가 되어 가는 중이다.
언뜻 들으면 ‘우리’끼리 잘해보자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은 결국 ‘우리’ 안의 ‘나’는 은연중에 사라지고 있다.
이기주의의 만연이 그것을 착시처럼 가리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