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주의와 역사

by 남재준

역사는 지나간 과거라는 이유로 가끔 단순하게 이해된다.


예를 들어 19세기 유럽의 혁명기에 공화파와 왕당파가 대립할 때 프랑스의 경우 엎치락 뒤치락하다가 종국적으로는 왕정이 완전히 붕괴되고 공화정으로 이어졌는데 오늘날 시민혁명과 공화정을 치켜세우는 점이라던가, 13세기 남송의 금과의 대립에서 금에 대한 항전을 주장한 이들에 비해 화의를 주장한 이들이 폄하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오늘날의 경우를 보더라도, 실제 그 상황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역사란 고도로 복잡한 맥락, 감정, 제도, 구조, 관계, 이해(利害) 등이 혼연일체가 되어 있는 것이어서 후대인들이 그렇게 단순하게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사실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나의 개인적인 철학은 언제나 인간은 파국이나 파탄에 이르지 않고 사전에 대비하고 조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이유로 결국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역사 속의 인간은 자주 빙산에 부딪힌 직후의 타이타닉호에 승선한 이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큰 규모의 차원 속에 있다 보면 위기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손쓸 힘이 충분치 않아 그렇게 될 줄 알면서도 구조의 침몰을 그냥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간신이나 권신이나 변절자 등의 오명을 뒤집어쓰고도 그 상황에 비추어 최선을 다해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노력한 이들이 많이 있었다고 나는 본다.


예를 들어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나 프랑수아 기조(François Guizot)같은 이들이 그렇지 않은가 싶다.


신념의 혁명가들은 열의에 가득 차서 혁명에 수반되는 피와 희생을 너무 가볍게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죄 없는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는 혁명이란 없다.


후대에 버크나 기조는 보수자유주의(Conservative Liberalism)자들로 분류되는데, 이 사상은 언뜻 들으면 좀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최소한 시민혁명기에 처음 이념적 분화가 시작될 때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는 대립적 관계였기 때문이다.


엄밀히 얘기하면 사실 보수주의(Conservatism)는 반동주의(Reactionary), 왕당파(Royalists)로 자유주의(Liberalism)는 혁명파(Revolutionists), 공화주의(Republicanism) 등이라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핵심적인 과제는 왕정을 완전히 청산하고 공화정으로 나아갈 것이냐 아니면 왕정을 수호할 것이냐였으니까.


버크와 기조는 각각 영국과 프랑스에서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진영에 속하면서도 왕정과 같이 종래에 유지되어 오던 전통과 제도를 반드시 파괴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들을 유지하는 편이 전체적으로 더 이롭다고도 생각했다.


왕정을 유지하면서도 자유주의적 제도를 점진적으로 확대해 가면 왕정을 견제하면서 유기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사고방식은 격변의 시대에 무너지는 질서를 극도로 지키고 싶어하던 왕당파와 어떻게든 온전히 종래의 기득권을 붕괴시키고 싶어 했던 공화파 사이에서 크게 지지 받지는 못했다.


기조의 경우에는 결국 종래의 기득권층에 대한 부역자라는 비난을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기조는 유산계급만의 투표권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교육부장관으로서 초등교육 보편화를 시작한 사람이기도 하다.


추측건대 만약 현재 상태에서 그냥 계급과 무관하게 투표권을 확대하는 경우 다수라는 이름의 폭정 즉 중우정치(Mobocracy)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대중이 충분히 기본적인 소양을 갖출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확대하고 문화변동을 유도한 뒤에 민주주의를 도입하던지 해야 비로소 자유주의적 원리와 문화를 내포한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될 수 있는 것이지 그러지 않는다면 민주주의 자체만으로는 절대적인 체제이자 원리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고 나는 본다.

그리고 나는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사실 정치체제 그러니까 공동의 구속력 있는 의사결정을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 참주정이나 귀족정, 독재정 등보다는 그래도 민주정이 제일 모든 사람의 의사를 반영하는 방식인 것은 맞다.


하지만 민주정은 비록 대중의 논의를 거치는 것을 전제한다손 치더라도 선동과 다수결로 밀어붙이기 그리고 나아가서는 쉽게 참주정으로 전환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반드시 숙의와 소수의견에 대한 존중과 관용 등 논의의 질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며 그러려면 사람들의 인식과 교양과 같은 정치문화 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현대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기본적인 정치체제로 하되 자유주의와 그것이 내포한 법치주의와 시민사회 등을 원리로 하여 민주주의가 단순히 다수의 폭정을 국민주권을 참칭하여 정당화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데 하나의 요체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는 단순히 기득권과 다수를 대립시키고(실제로는 그 다수가 실제 다수인지도 분명치 않다), 나아가서는 바로 다수의 시각과 의지를 검토 없이 정당화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볼 때 성과니 실용이니 기득권 타파니 하는 것을 빙자하여 많은 나라들이 실질적으로는 권위주의적 요소나 대중주의(Populism) 정치를 하면서 민주주의를 그 숙주로 이용하고 있다.


혁명이나 그에 준하는 거대한 변화는 결코 유도붕괴 내지 내파식 발파 해체 즉 다른 건물이나 사람 등을 건드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얌전하게 붕괴되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혁명은 불필요한 살상이나 희생을 가져오며,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에게는 매우 큰 것이다.


예를 들어 공산혁명 이후의 무상몰수-무상분배는 언뜻 들으면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나 실은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사이의 중산층들도 대거 재산을 몰수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완전히 국가 경제를 통제해 재편하면서 국민들을 일방적으로 생산 라인에 기획적으로 배치하는 식이 되었다.


이념이 항상 틀린 것은 아니지만, 대개 이념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 중 근본적인 체제 변동을 가져오는 사상들은 종국적으로 실천되었을 때 상당히 모호한 잣대를 실천과 현실의 영역에 무리하게 도입하면서 많은 불필요한 희생을 가져왔다.


구체적인 조정과 새로운 메커니즘 및 제도의 설계와 수립이 제일 중요한 것이며 그것이 전체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도 더 악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사회경제적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유연하게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7월 혁명과 2월 혁명 등 무능하고 독선적인 군주들의 패착으로 프랑스에선 완전히 왕정옹호론이 꺼져버렸고 이를 지지하던 이들은 모두 왕당파나 변절자들로 몰렸다.


이념을 위한 독선은 여러 문명과 국가에서 발견된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나라에서 충절로 칭송받는 삼학사만 하더라도 최명길(崔鳴吉)은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이 매번 조그마한 곡절을 두고 다투고 분변하느라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삼사는 단지 신(臣)이란 글자의 가부만 논하면 된다. 글을 언제 보낼지는 묘당의 책임이지 그대들의 알 바가 아니란 말이다!”


백성과 사직이 모두 참혹한 꼴을 당하는 것은 오로지 위정자들의 책임이다.


머리와 붓을 놀리는 사람들은 그냥 의리(義理)를 앞세워 기꺼이 죽을 수 있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위정자는 자기 목숨만이 아니라 백성과 사직의 목숨을 책임지는 자들이다.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의리라는 명목으로 함부로 죽인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남송의 권신 한탁주(韓侂胄)는 주희(주자) 등 성리학을 탄압하고(경원의 당금) 조여우 등 중신들을 내쫓았는데 이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자 시선을 외부로 돌릴 목적으로 개희북벌(開禧北伐)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한탁주의 주도로 남송의 금에 대한 태도가 공세적으로 바뀌자 금은 송을 공격하라는 명이 떨어졌고 송도 금을 공격하라는 명으로 맞받았다.


그러나 북벌에 대한 남송의 신료나 여론의 입장은 대개 반대였다.


당연한 것이 이미 송이 남천한 지가 100년이 다 되어가고 그동안 강남 개발을 통해 경제가 성장하며 사회가 안정되었지만 동시에 국방력은 현실적으로 금에 아직 미치지 못하는데 뭐 때문에 새삼스럽게 금을 치는 무모한 만용을 부린단 말인가?


남송이 금을 친다는 건 그냥 자기만족일 뿐 결과적으로 화북을 수복한다는 것은 어려운 얘기고 수복한다손 치더라도 이전에 남북조 시대에 일시적으로 장안을 수복했다가 끝내 실패한 것처럼 이미 금의 치하에서 사회화된 영역을 재사회화하는 건 비용도 많이 들 것이었다.


게다가 정벌이라는 것이 많은 재력을 소모하는 길인데, 구태여 백성과 신료의 재산을 강제로 그런 성과 여부도 불확실하거나 비관적인 대의에 쏟아붓는다는 것은 소설에나 나올법한 발상이었다.


결과적으로 반년 만에 사미원(史彌遠)이 한탁주를 살해하고 집권하면서 금의 화의 조건인 ‘한탁주의 목’을 금에 보내고 남송-금 간 화의가 성립되었다.


사미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지만, 정대전, 가사도, 한탁주와 더불어 남송의 4대 권신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중 사미원만 제외하고 나머지 3인은 모두 <송사> 간신전에 수록되어 있고, 사미원은 홀로 <사미원등전>이라는 열전에 있다. (후에 <권신재상평전>에 사미원도 실을 예정이다)


사미원은 주희와 조여우 등을 사면했고 홀로 재상으로서 26년에 걸쳐 집권하면서 남송의 평화기를 계속 주도해 나갔다.


국방력의 약화를 고치지 않고 회자의 남발로 인해 물가가 상승하는 등의 오류와 고통이 있긴 했지만, 사미원이 한탁주를 죽인 일은 필요한 일이었다고 본다.


지금 생각해보면 먼 예전의 일이니까 시비를 기준으로만 평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그렇듯 언제나 인간은 다른 무엇보다 자기가 처한 현실을 기준으로 최선의 판단을 해야 하며 비록 때로는 그것을 안다손 치더라도 상황이나 조건이 닿지 않아 결국 실패하는 경우들도 있지만 그래도 불가피하다.


이념은 현실보다 우선할 수 없으며, 때로 실용이나 민주주의 등 그럴듯한 외피를 두르고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판단력은 매우 중요하며, 숙고하고 숙의하는 과정들이 매우 필요한 것이다.

관용과 환류(피드백)는 단순히 그것이 미덕이기 때문에 필요한 게 아니라, 실제로 그게 없으면 쉽게 인간과 사회가 오류에 빠지고 단기적으로는 잘 될지 몰라도 중장기적으로는 결국 파멸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오늘날 우리는 중요한 전환기에 있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 종래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들의 실체와 현황을 냉정하게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지난 역사의 기억들은 이러한 검토의 과정에서 매우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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