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책상 위엔 올해 이상문학상 작품집과 법학 서적이 함께 놓여 있다.
문학과 법학은 서로 다른 언어 같지만, 전체적으로는 가끔 상호보완적인 기능을 할 수도 있다.
법학을 하는 사람들이 문학을 많이 접할수록 좋다는 생각이다.
문학엔 여러 갈래와 개별 갈래 안에서도 여러 주제와 형식 등이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문학이 사회문화적으로 하게 되는 기능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개인이 마주하는 구조의 얼굴과 구조가 구속하는 개인의 심리를 보여준다는 점이라고 본다.
건조한 수나 글을 통해서는 문제의 본질을 다 알 수 없다.
가끔은 개인의 서사를 통해 사회의 단면을 간접적으로 겪을 수 있다.
단순한 사실(Fact)이 아닌 진실(Truth)을 말이다.
경향신문에서 서울시가 운영하는 ‘서울런’(인터넷강의 지원 플랫폼)을 홍보하면서 그것의 성과라고 하는 ‘상위대학 합격자 수’를 공개한 점을 기사화했다.
시의 입장에선 시장의 재선 등을 위해 보통 사업 성과를 어떻게든 알려야 하는 건 사실이다.
이해는 되지만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그러한 내용의 홍보가 학벌 문화의 강화에 공공이 미세 기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서울런의 실체적 의의는 현실적인 입시훈련화된 교육 속에서 설상가상으로 경제적 배경에 따라 기회나 조건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게 되는 아이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개별 학원들이야 ‘어느 대학을 보냈다’ 라고 하는 홍보를 할 수도 있겠지만, 공공의 차원에서는 그런 행위는 다소 볼썽사납다.
우리가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싶어 하는 이유 중 하나는 평판 때문이다.
남에게 대놓고 자랑하진 않더라도 보이고 싶은 욕망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학벌이라는 것을 만든 여러 요인 중 하나는 그러한 욕망과 그런 것들이 만들어 낸 문화에 있을 것이다.
이건 제도로 고치기는 매우 난망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성공은 중요하다.
그래서 문화에 대한 비판이 곧 개별적인 사람들 정확히는 그러한 문화에서 생존 또는 성공한 이들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좀 더 시야를 확대해서 보면 다수의 패배자와 그런 경쟁에서 아예 소외된 많은 이들이 있다.
또 보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그 성공은 일부의 성공일 뿐이고 그다음에도 경쟁은 계속된다.
그래서 그들은 승자라기보다는 ‘그 라운드에서의 일시적 생존자’에 가깝다고 보아야 하지 않은가 싶다.
사회적 차원에서 볼 때 우리 아이들에게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어’라고 가르치는 것도 좋겠지만, ‘성공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어쩌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삶을 보는 관점과 살아가는 방식의 다양성 같은 것을 이름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하면 또 ‘현실적으로 내 자식이 조금이라도 잘되는 길을 가르쳐야지.’ 할 수도 있다.
실은 이러한 생각이 우리나라의 교육열을 만든 면도 있다.
정확히는 ‘교육’열이라기 보다 ‘성공’열이라고 말해야 하나 싶지만 말이다.
이런 건 앞서 언급했듯 문화의 문제라서 쉽게 바꿀 수 없고, 마찬가지로 학벌 사회라는 것도 그러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학벌 사회가 최소한 완화라도 되지 않으면 안 되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실제로 학벌이라는 것은 제대로 개인의 능력, 개인별 조건의 불평등 등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학벌이 예컨대 대학의 교육/연구 등 핵심역량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되레 학벌이 대학의 교육/연구 인프라나 역량 수준에 영향을 준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 사회는 좀 더 ‘들리지 못하는 목소리’나 ‘주목받지 못하는 본질적 진실’ 등에 주목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제도개선이란 그런 데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제도로 변화시킬 수 없는 문화라는 것의 변동도 그런 데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