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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대한민국을 위하여, 모두가 정신을 차려야

by 남재준

지난 새벽배송 토론을 보고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에게 많이 실망했다.


그래도 그가 선거가 급했던 비상대책위원장 때보다는 당대표 시절에 의대 정원 조정 등과 관련해 당정의 간 조율에 노력하는 등의 경험이 있었으므로, 잘 모르는 문제더라도 성의는 있게 임할 줄 알았다.


단순히 ‘그건 안 된다’에서만 그치는 건 대권주자급 정치인이 할 만한 말은 아니다.


더구나 한 전 대표는 단순히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주당이 국민의힘과 연관된 것으로 생각되는 단체들을 모두 묶어 기득권이라고 칭하는 것과 같이 데칼코마니처럼 미러링으로 민주노총을 몰아갔다.


지식인이라면 그냥 그러한 분석과 설명에서 그칠 수 있겠지만, 정치인의 차원에서 보면 그런 프레이밍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면 민주노총을 무시하고 새벽배송을 현행대로 유지하는가? 그렇지만 노동자의 과로와 건강권 문제가 대두한 것도 사실인데 거기에 대한 대응방안이 없어도 되는 것인가? 최소한 사회적 대화를 통해서 얘기를 들어봐야 하는 게 아닌가? 그 뒤에 요구를 받던지 그러지 말던지를 생각해 볼 수도 있는거고.


하다못해 마거릿 대처의 경우에는 노조 적대에 사상적, 정책적 근거가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그의 판단하에서는 임금 상승의 인플레이션에의 기여를 막고,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해 보다 합리적으로 노동의 수급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노동조합의 계속되는 파업 등으로 인해 피로한 사회경제를 위해 노조를 억누를 필요가 있다는 등의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한 전 대표의 토론을 보면, 그러한 대안적 방향은 거의 없고 그냥 기득권이라는 점이라던가 불편하다는 점이라던가 개인의 자유라던가 하는 정도의 원론적 수준의 얘기 밖에 나오지 않았다.


대개 정치인의 토론은 토론에 토의를 더한 것에 가까워야 한다.


즉 시비만 가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안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냥 사회갈등은 지속되고 정치체제가 유의미한 의사결정을 산출해내지 못한다.


비단 한 전 대표만이 아니라 최근의 기성세대 정치인들은 모두 정책을 완전히 몰각하고 순전한 프레임 전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에 빠져 있다.


그리고 신세대 정치인들은 보수는 온라인 포퓰리즘이나 공허한 우파적 가치 담론(e.g. 능력주의, 자유)에 진보는 젠더나 노동 등 특정 이슈 중심의 사회운동에 머물러 있다.


포괄적인 시대정신, 문제의식, 이니셔티브, 정책 등을 제시하는 정치인이 말 그대로 전무하며, 오피니언 리더 또한 전무한 상황이다.


우리나라의 현 상황은 아노미(Anomie)와 비슷하다고 진단한다.


갑작스러운 계엄과 뒤이은 탄핵 그리고 정권교체가 모든 것을 가려놓았고 국민들의 진을 빼놓았다.


하지만 2020년대 들어 심화된 한국사회의 본질적 문제의 해결은 아직 미완의 상태로 남겨져 있다.


탄핵심판 결정 선고 후 대다수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 파면 취지의 헌법재판소 결정이 민주주의 신장에 기여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더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다수 시민들이 그것이 자기 직장에서의 민주주의 등 사회경제생활 속 개선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계엄만큼 체감되지 않는 민주주의의 위기에 보다 민감하게 대응해야 할 시점이다.


민생이라 일컬어지는 국민의 생활이 단순히 구호로 전락하거나 기술관료들에게 사실상 넘겨지고 실질적으로는 정치라는 무대가 그냥 프레임 전쟁과 극단적인 정치적 행태로 점철되어 있다.


제도적 민주주의가 뼈대만 남고 실질적으로는 껍데기만 남은 세대/진영 전쟁 프레임이 더 극단화된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보수 진영은 좌파들에게 점령당한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프레임과 서사, 진보 진영은 극우 세력을 완전히 궤멸시켜야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진다는 프레임과 서사 속에 갇혀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법원, 정부, 언론 등 전문계까지 모두 자기편과 그렇지 않은 편으로 가르는 반(反)지성주의로 이미 번졌다.


예를 들어 현재의 보수 진영은 언론이 좌파들에게 잠식당했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현재의 진보 진영은 언론 기득권 청산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민심이 극단적으로 나뉘어져 중도층이 캐스팅 보터가 아니라 양측 중 어느 일방을 차악으로서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하기 위해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몰렸다.


이재명 정부 출범 후 무당층은 다시 증가하는 추세인데, 민주당의 지지율은 86세대와 4050을 중심으로 계속 견고하게 집중된 양상이고 국민의힘은 우경화와 윤석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기어이 20%대 박스권에 갇혀 있다.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은 언뜻 절대 수치만 볼 때는 높아 보이지만, 그 허와 실을 분명히 가려야 한다.


양적으로 볼 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민주당 지지율이 40%대, 이재명 대통령 지지율이 50%-60%대, 국민의힘 지지율이 20%대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무당층이 거의 30%에 육박하고 있다.


이는 대선 때까지 ‘국민의 신임에 뒤통수를 후려갈긴’ 윤석열 정권에 대한 심판 여론이 상당한 동시에 양 진영이 다시 팽팽한 결과를 내어 최종적으로 양 진영으로 강하게 흡수된 총체적 민심이 대선 이후 다시 원래대로 복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난 대선은 원래도 의의가 큰 선거지만 특히나 역사적인 분기점이었기 때문에도 집중도와 관심도가 높았고 다른 한편으로 국민들은 양측 중 어느 한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제의 민심은 오히려 최근의 여론 양상이 더 잘 보여준다.


민주당은 40%대에서 최대한도를 넘을 생각 자체를 못 하면서 그게 자격 있는 민심의 전부라는 듯한 태도(그러니까 ‘1찍’이 민심이고, ‘2찍’은 민심이 아니다?와 비슷한)이고, 국민의힘은 20%대에서 중도층-수도권-청년을 향한 중도화를 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며 문재인 정권 때 그랬던 것처럼 그냥 게속 공세를 퍼부어서 언젠가 끌려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듯한 태도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피로가 점점 더 심각해질 것이고 중장기적으로 볼 때 훨씬 심각한 민주헌정의 위기가 닥칠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본다.


질적으로 볼 때 촛불 민심의 결과로서 탄핵과 그 여파로서 문재인 정권도 그랬지만, 이재명 정권은 현재의 계엄 반대 민심이 낳은 반사적 결과일 뿐이다.


스스로 그러한 민심을 받든다고 하면서 사실상 자신들에게만 민심의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점이 민주당의 오만이다.


위헌계엄 사건은 역사적 차원의 충격파였고, 사실 국정농단 사건보다 더 큰 것이었음에도 교체된 정권의 지지율이 처음부터 60%대에 불과하다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


노무현 정부(참여정부)의 경우에도 대강 초기 지지율이 그 정도에 그쳤는데, 이건 구조적으로 당시 정치사회 패러다임이 보수 측에 기울어져 있었고, 노무현 정부가 '코드의 반란'을 주장하며 소수파를 자처한 정권이라는 등의 요인이 있었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는 진보 언론이 성장하고 뉴미디어가 발달했으며 4050이라는 사회경제의 핵심 주도층이 대거 자신들 편에 있고 무엇보다 상대편의 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 후에 교체된 정권이다.


자기들 딴에는 중도화라는 것을 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했는데도 대통령 지지율이 문재인 대통령 때만 못하다.


이정도가 되면 대통령과 민주당 자체에게서 이유를 찾아야 하는데도 그럴 생각이 전혀 없이 오히려 국민들 탓을 한다.


말만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이지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은 사실상 자기들에게 조금이라도 반대의견을 내면 계몽되지 않았다는 것처럼 몰아간다.


한편 코로나19 팬데믹 시절 더 가속화된 개인 간 사회적 고립과 단절, 이제는 아무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 산적한 사회경제적 구조개혁의 문제들은 계속 심화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 온라인 포퓰리즘, 즉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반지성적인 언어와 프레임을 사용하는 이들이 여론을 상당 부분 잠식해간다.


극단적, 장기적으로는 대한민국 전체가 온라인 커뮤니티의 수준으로 돌아갈지도 모를 판국이다.


총체적으로 우리나라는 현재 매우 암울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합의와 정책을 중심으로 하며, 대면을 통한 문제의 직면과 상호 이해의 축적을 통해 사회자본을 회복하고 숙의민주주의로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와 사회의 초점을 재조정하고 새로운 의제와 대안을 제시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의 등장이 절실히 요구된다.


장래에 현재의 대립 구도에서 갈 곳이 없는 무당층 등을 흡수할 제3의 누군가가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 이준석 의원과 같은.


하지만 이준석 의원은 성숙한 정책 중심 리더십이 아니라, 레토릭과 프레임을 중심으로 한 대결적 정치에 속해 있으면서도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 성향을 띤다.


더구나 그의 정치적 가치라고 하는 능력주의라는 것도 결국 모호한 기준에 구조적/환경적 요소를 감안하지 않는 부당한 제도와 문화, 기득권에만 복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측면이 크다.


예를 들어, 정치인이 되기 위해 정확히 어떤 능력이 요구되며 그것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온라인 커뮤니티나 토론 배틀이니 하는 무슨 장난 같은 식으로 정치를 소비하는 유치한 태도로 대권을 잡겠다는 것은 정말 희한하다.


결과적으로는 현실을 모르는 탁상과 레토릭 중심의 언변 좋은 엘리트들만 부상할 수 있는 문화와 구조를 만들 가능성이 높다.


이에 그가 부상하는 경우 이 나라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차원의 갈등과 충돌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현재 어느 것보다 중요한 가치는 지속가능성과 안정이다.


시민사회에서의 대화와 숙의의 활성화를 통한 갈등과 상처의 치유 및 민주정치의 질적 개혁,


고용노동/금융/부동산 등 제반 사회경제 측면에서의 복합적인 가계 경제 안정 도모,


사회보장과 재정건전성 간의 균형,


교육혁신을 통한 인적자본의 양성과 경제혁신 유도,


산업/시장에서의 민간 자율 보장 및 국가 주도 성장률 제고의 신화에서의 탈피


등의 과제들이 요구된다.


지속가능한 사회와 경제를 만드는 것이 사회정의니 능력주의니 하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중요하고 실존적인 문제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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