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란 맘다니의 당선에 감격한 다양한 시선들을 읽어보았다. 기시감을 느낀다. 숱한 반짝 스타들이 명멸해 갔지만, 이 케이스에는 제러미 코빈이 적당하겠다.
비주류 제러미 코빈이 영국 노동당 당수가 되자 엄청난 환호가 뒤따랐다. 엘리트 정치인이 아니라 꾸밈없고 진정성을 가진 정치인이 전면에 나섰다! 변방 정치인이 주류가 된 것을 본 우리나라 민주당 정치인들도 환호했다.
"당 노선 500차례 반대 ‘만년 아웃사이더’…영국 노동당 거머쥐다"
한겨레
코빈이 지향하는 바는 명확했다. 중도 노선을 집어치우고 본래의 가치와 이상을 되찾자. 코빈표 정책은 선명했다. 크게 네 가지다.
철도와 공공 서비스를 다시 국유화하자.
부유세를 인상하여 재원을 만들자.
무상교육 등 복지를 광범위하게 늘리자.
친 팔레스타인, 반 이스라엘.
민주당 정치인이 좋아할 이유가 다 들어있다.
그러나, 코빈이 영국 총리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코빈의 노동당이 선거에서 개박살났기 때문이다. 2019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60석을 잃었는데, 1935년 이후 최악의 성적이었다. 패인은 무엇인가? 앞서 말한 4가지에 덧붙여, 브렉시트에 대한 어정쩡한 포지션 때문이다.
현실성 없는 재국유화와 무분별한 복지 공약으로 인해 믿을 수 없는 포퓰리스트로 낙인이 찍혔다. 친팔레스타인적 입장은 반유대주의로 불거졌다. 희망을 내세우며 등장한 코빈은 바로 그 희망 때문에 몰락했다. 이 당시 영국 수상은 바로 그 보리스 존슨이다. 윤석열이 이재명 덕에 당선되었듯 보리스 존슨은 제레미 코빈 덕에 총리를 할 수 있었다.
후임 키어 스타머 당수는 코빈이 노동당으로 영원히 출마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코빈이 했던 모든 것을 뒤로 물리고 중도노선으로 바꾸었다. 그 결과, 이전 의석보다 무려 211석을 더 얻는 압도적인 대승으로 단독 과반 정부를 만들수 있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정치인들이 조란 맘다니의 당선에 감격해 다양한 의견을 내고 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맘다니 후보의 당선 소식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시민의 삶을 바꾸는 정치, 기득권이 아닌 시민 중심의 정치가 더 이상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서울도 바뀔 수 있고, 아니 바뀌어야 한다." 박주민
코빈이 당수이던 시절 박주민 의원실에 가보았는데, 제러미 코빈 사진이 눈에 띄는 곳에 잘 붙어있었다.
정치인이 실패할 수 있다. 훌륭한 정책도 때를 잘못 만나면 실패한다. 실패한 뒤 성찰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코빈이 왜 실패했는지 성찰하지 않고, 또 다른 코빈을 찾아나서는 게 우리나라 진보정치다.]
우리나라와 영국은 사정이 다르다. 그리고 민주당이 차라리 코빈의 노선을 따라갔으면 대중적 호소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냉전의 주 전선에 있던 국가로서 사회주의는 고사하고 진보주의라는 말조차 쉽게 쓰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우리나라와 미국은 유사하다. 그리고 이 점에서 ‘민주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를 자처하며 뉴욕시장에 당선된 조란 맘다니는 인상적이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그가 최근의 좌익 포퓰리즘 흐름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SNS를 활용한 쇼맨십과 과감한 공약들과 특이한 색채가 있는 인적 요소들. 2020년대를 기준으로 ‘스타’ 정치인을 만들기에는 적절하다.
하지만 이번에 맘다니와 대결한 앤드류 쿠오모의 아버지 마리오 쿠오모가 한 말처럼, ‘선거운동은 시로 하지만, 통치는 산문으로 한다’. 뉴욕시장은 기본적으로 도시의 행정을 담당하는 직위이므로 실제로 그가 어느 정도의 통치 역량을 지녔느냐, 또 그가 지향하는 정책의 효과가 어떠할 것인가를 지켜봐야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미국은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나 시장 근본주의가 매우 강한 나라라고 생각되는데, 이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성격의 이념과 그에 기반한 정책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또 맘다니 신드롬(?)이 미국 민주당과 미국정치에 새로운 정치적 조류를 가져올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제레미 코빈과 조란 맘다니는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없다. 제레미 코빈은 노동당 대표로 당선되었었는데, 이는 제1야당 대표였다. 조란 맘다니는 뉴욕시장이라는 지방정부수반으로 당선되었다. 양자는 역할이 확연히 다르다. 코빈은 행정 역량의 무능 때문에 실패했다고 보기 어렵다. 애초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또 코빈이 2019년 총선에서 패배한 건 사실이었지만 2017년 총선에선 당내 중도파(New Labour)였던 고든 브라운(2010년 총선), 에드 밀리밴드(2015년 총선)가 고전했던 것과 달리 보수당 내 중도파였던 테레사 메이를 상대로 보수당의 과반수를 저지했다. 노동당의 의석수가 증가했으며, 코빈의 재임기 동안 노동당 입당이 증가했다.
2019년에는 브렉시트를 내세운 보리스 존슨의 우익대중주의에 패배했지만, 사실 코빈이 초점을 둔 정책의제들이 영국엔 더 중요한 것들이었다. 영국은 대륙과 대비해서 시장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축에 속한다. 국영화라는 것도 철도나 전기와 같이 이전에 민영화되었는데 애초에 민영화가 유효한 종류의 산업인지 의문이 제기되었던 것을 재국유화한다는 의미였다. 국민돌봄서비스(National Care Service)의 신설을 공약하기도 했다.
영국은 10년 이상의 세월 동안 긴축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복지와 치안 등이 계속 이슈가 되어 왔다. 공적 영역을 대폭 축소시킨 마거릿 대처의 패러다임은 현재까지도 영국정치를 상당 부분 지배하고 있다. 코빈이 제시한 것은 단지 이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을 뿐이다. 코빈이나 토니 벤과 같은 영국 ‘강성(Hard)’ 좌파들은 대처 시기부터 ‘기업가정신’을 강조하며 사라져 버린 ‘사회적인 것’의 복구를 촉구해왔다. 시장경제(Market Economy)에서 시장사회(Market Society)로 이어져 버린 시대의 흐름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부상했기 때문에 그렇지 코빈의 견해는 민주사회주의자라기 보다 사회민주주의적 흐름을 부활시키자는 것일 뿐이라는 해석도 있다.
영국은 계급 기반으로 구성된 사회경제인데, 기본적으로 노동당이 토니 블레어 시절부터 중산층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더욱 노동계급이 믿고 의지할 곳이 사라졌다는 인식이 일각에서 있었다. 거대양당이 모두 자신들을 대변해주지 않고 국가와 사회의 후퇴와 시장 논리만 일관되는 상황에서 서민들의 불만이 매우 컸다. 코빈은 이러한 맥락에서 부상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현 노동당 대표 겸 총리인 키어 스타머도 일정 부분은 코빈의 정책을 수용한 면이 있었다. 스타머는 노선이 불분명한 정치인이다. 신노동당 노선이라는 말도 있고 연성좌파라는 말도 있고 청색노동당(Blue Labour, 경제적 좌파+사회문화적 우파)이라는 말도 있다. 최근 국방예산을 늘리면서 신노동당 내각(1997-2010) 때 신설한 겨울철 연료지원을 삭감하면서 노동당 내 반란표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현재 스타머 내각은 집권한 지 만 2년도 되지 않아 지지율이 한참 저조하고 심지어 노동당 내 스타머에 대한 정치적 쿠데타설도 나온다.
윌리엄 헤이그 전 보수당 대표의 말처럼, 토니 블레어와 달리 키어 스타머의 집권 직전에는 그다지 노동당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 코빈 시절과 달리 스타머 시절에는 당내 민주주의도 후퇴했다. 반유대주의 혐의를 뒤집어씌운 코빈에 대한 제명은 논란의 여지가 많았고, 당내 좌파 주요 중진이었던 존 맥도넬이나 다이앤 애벗을 낙천시키려 한다는 의혹도 있었다. 당내 좌경화 경향을 강하게 막았던 토니 블레어 시절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코빈 자신도 얼마 전 인터뷰에서 자신이 비주류 당대표로서 반대 흐름에 너무 약하게 대응했다는 말을 했다. 심지어 코빈은 임기 중간에 도전을 받아 사실상 재신임을 받은 당대표 경선을 한 번 더 치렀다.
이러한 여러 맥락들을 보면, 제레미 코빈에 대한 상당수의 견해가 수평적 운동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코빈은 외교안보 측면에서도 평화주의를 강하게 견지하며 중국, 러시아건 미국과 서방이건 패권주의와 군사주의를 내세우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근본적으로 군축을 지향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것이 이상주의적이라고 말할 순 있겠지만, 단순히 이슬람 테러 조직이나 러시아를 옹호한다고만 하는 것도 잘못된 말이다.
어떻게 보면, 제레미 코빈은 영국 노동당이 회생할 수 있었던 마지막 불씨였다. 학자금대출 상환에 시달리고, 불안정한 고용(Zero-hour contract 등), 높은 물가와 생활비, 사회보장의 축소, 상층에게만 유의미한 감세 등.. 노동당조차 노동 연계 복지(Workfare)로 이동할 정도로 대처주의의 잔향이 짙게 남았다. 하지만 서민은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무리 일해도 사정이 나아질 희망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다. 워킹푸어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계급사회와 불평등, 신자유주의 경제구조, 개인을 버려두는 사회와 국가 등 서민이 희망을 가질 수 없는 나라에서 코빈은 패러다임 시프트를 제안했다. 하지만 토니 블레어 등 당내 중도파의 내부 공격과 전체 정치사회에서의 극단주의 프레이밍으로 인해 그는 최종적으로는 실패했다.
물론 나는 코빈과 노선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가가 다르고 철학도 다르다. 하지만 정치인으로서 코빈은 제대로 된 사람이기는 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중도화와 집권 실패의 논리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코빈의 재임기를 너무 쉽게 평가 절하하는 것이다. 스타머는 블레어와 달리 당을 혁신하는 새로운 기획이나 정책 패러다임이 없던 상태에서 그냥 보수당에 대한 반감만으로 집권했다. 이런 측면들을 보면 스타머는 어떤 면에서 이재명과 비슷하다. 만약 박주민 등 이재명을 옹호해온 사람들이 코빈을 정말 좋아한다면, 현재 이재명이 만들어 놓은 이 흐름을 지지하고 일조했다는 것은 정말 그와 반대되고 모순되는 것이다.
맘다니는 아직 중앙 정치인이 아니므로, 그가 전국 차원의 정치인으로 부상할 수 있을지 또 그것이 성공할지는 모두 미지수로 남아 있다. 밀레니얼 좌파들이 그를 버니 샌더스에 이은 새로운 희망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그의 뉴욕에서의 민주사회주의 실험이 성공할지 어떨지는 지켜볼 일이다.
우리나라 민주당은 최근 이도 저도 아닌 채 어설프게 중도를 자처하면서도 정작 정말 국민들이 정치에 불만인 것과 희망하는 것에 제대로 관심이 있는지 의문인 세계의 중도좌파 정당들과 비슷하다. 심지어 경우에 따라서는 민주주의 자체를 질적으로 퇴보시키는 데에도 기여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나라 민주당이 코빈이나 샌더스를 거론한다는 건 애초에 웃기지도 않는 얘기다. 정치적 바이브부터 정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