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감히 성숙함에 대해 가타부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입장은 못 된다. 하지만 굳이 한마디 보태자면 성숙함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두 가지는 무언가를 쉽게 그렇다 아니다 라고 단정하지 않는 것, 감성과 이성을 복합적으로 작동시킬 줄 아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의 인생에 대해서나 남의 인생에 대해서나, 무언가를 쉽게 그렇다 아니다 라고 단정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자신의 인생에서 너무 쉽게 무언가를 단정하고 나아가면 나중에 후회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걸 알면서도 도전하기도 하고, 후회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게 잘못된 것은 전혀 아니며 미성숙한 것도 아니다. 다만 알면서 그러는 것과 모르면서 그러는 건 또 다른 것 같긴 하다. 단정하지 않는 태도가 과하면 아무것도 결정하거나 실행하지 못한 채로 그냥 우유부단한 태도로 일관할 수 있는데 그러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도 필요하다.
다른 한편으로 남의 인생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아니다 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는 것 같다. 이 지점에서 공감 능력이 꽤 중요하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맥락이 있고, 그 맥락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때로는 결과적으로 최선의 선택이 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시간이나 금전 등의 여러 제약조건하에서 선택을 하도록 압박을 받고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없고 그 사람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나라면’이라면 가정은 완전히 무의미하다. ‘나라면’, ‘다른 게 나았을 텐데’ 이런 말은 쉽게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한 판단이 되고, 심하면 폭력이 될 수도 있다.
폭력이라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내가 내 인생에서 한 선택에 대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고 정확히 같은 입장에 처한 것도 아니면서 쉽게 판단하는 것은 나에 대한 모욕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물론 당연히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화법이랄까, 태도랄까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앞서 공감을 언급했는데, 이건 단지 감성의 영역만은 아니다. 때로 감성과 공감을 동반하지 않은 이성과 합리성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할 수 있다. 사람과 가치가 연관된 어떤 사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언뜻 주관적인 것 같은 감성과 공감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이성과 합리성에 근거해서만 판단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그랬다 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도 상당하다. 그래서 사태의 이해와 판단에서 감성과 이성의 복합적 활용은 중요하다.
다른 한편으로, 감성과 이성의 복합적 활용은 최종적으로 감성이 감정적인 판단과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이성으로 억제할 수 있게도 한다. 너무 억울하거나 슬픈 일이 있더라도 결국 계속 살아 나가려면 이 상황에서 가장 타당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한계를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고통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계속 선택하고 또 선택하도록 던져졌다. 그러한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것은 이성을 통해서 할 수 있다.
사회적 차원으로 좀 더 나아가 보면, 최근에는 개인화와 개인의 욕구에 대한 인정 그리고 디지털화 등이 고도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아날로그적 성숙함이라던가 약자와의 동행 같은 것이 많이 사라졌다. 합리적인 것도 좋고 성공하는 것도 좋고 자기의 욕구를 충족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는 사회적 기반이라는 것이 요구된다. 그건 마치 공기 같다. 너무 당연한 조건 같지만 실제로는 꽤나 연약한 것이기도 하다. 꼰대라는 말이 권위에의 저항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뚜렷하게 가진 사람에 대한 폄하로 남용될 때도 있다.
좀 뜬금없게 들릴 수도 있긴 하지만, 나는 사실 이 시대에 필요한 분야는 문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AI의 부상은 사람다운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들었다. 앞으로는 무엇이 가능한가 보다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해질 것이다. 가능한 것과 해야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다. 가능하다고 해서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해야만 한다고 해서 항상 가능하지도 않다.
과학은 분석과 설명을 제공하고 공학은 유용성을 제공하지만 인문학은 (적어도 일부는) 실천과 실존을 생각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이제 과학이나 공학의 영역은 대체될 수 있거나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을 주지 않으며, 애초에 답을 주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어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학적 방법론에 매여 있지 않은 인문학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이 어휘를 좀 모를 수도 있고 윗세대보다 다소 자기 개성이 더 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대와 무관하게 타인과의 공존은 중요한 가치이다. 타인과의 공존은 타인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되며, 타인에 대한 이해는 타인의 삶에 대한 공감을 내포한다. 문해력 제고라는 것의 목표 중에는 이러한 역량이 포함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