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혁신의 길 : 우파 운동권 정당에서 국정정당으로

by 남재준

국민의힘은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지난 반년간 지지율이 20%대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혁신’은커녕 ‘개혁’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중도층-수도권-청년의 공략이라는 기본적인 전략을 제안했던 한동훈 전 대표에게 ‘당원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윤어게인과 황교안도 포용해야 한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수준이 되었다. 이 점에서 현재의 국민의힘은 2017년의 자유한국당 때보다도 더 최악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권력 지향적이고 강경한 보수 성향의 홍준표 대표 시절의 자유한국당은 전혀 체질 개선을 하지 못했고 인적 쇄신을 둘러싼 갈등과 퇴행적인 시대 인식만 보였다. 그럼에도 그때 집권 중이었던 영국 보수당의 집권 전략에 대해 연구하는 등의 노력은 있었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시절에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배포된 미국 공화당의 마르코 루비오가 제안했던 ‘공공선(Common Good) 자본주의’에 대한 보고서는 보수정치의 현황 진단과 앞으로의 방향 설정, 무엇보다 정책 중심 정치로의 복귀를 위한 논의의 재료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이때에도 별다른 진지한 논의가 없었고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좌절과 회의를 표했다.*


산업화 시대의 성취는 자부심을 느낄만한 것이지만, 그 시대의 바이브와 마인드를 2020년대에 재소환할 수는 없다.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하지만 ‘침묵 속 공감’, ‘약자와의 동행’ 등 아날로그적 감성과 협동, 예의 등 아날로그적 가치의 현대적 재소환은 필요하다. 현재 대한민국은 해체의 수순을 이미 밟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병존만 있고 공존이 없는 국가이자 사회이니 말이다. 이는 국민성 내지 국민적 감성 같은 것인데, 종래의 보수정치가 ‘대통령으로부터의 보수’였던 것과 대비되는 ‘국민으로부터의 보수’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등의 전직 대통령들에게는 공도 있고 과도 있지만, 그것을 논할 실익은 현재의 보수정당에게는 없다. 최소한 ‘독재는 성장을 위해 불가피했다.’라는 명제는 그만 포기해야 한다. 이는 반드시 그와 정반대로 박정희 등을 멸시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적어도 더는 박정희의 향수에 젖어 있으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1960년대~1970년대의 리더십과 이념을 2020년대에 소환하는 건 안 된다. 더구나 대한민국처럼 압축적 급변을 겪어 온 나라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대통령들에 관해서는 각자의 평가로 남기고 가능하면 초상화도 당사에서 치우는 것이 맞다.


굳이 평가하자면 나는 노태우 정부 정도가 요즘 참고할만한 모델이 아닌가 싶다. 물론 반공주의와 군사독재의 연장선과 비자금/특혜 등 여러 논란들이 있었다. 거기까지 긍정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노태우 정부가 마주했던 ‘군정에서 민정으로의 이행’이라는 중대한 전환기에서의 안정적 관리라는 태도는 본받을만하다는 것이다. 보수는 쉬운 변화를 의심하는 것이 본질이지만, 불가피하거나 필요한 변화를 거부해서도 안 된다.


이 점에서는 19세기 중반의 영국을 이끌었으며 무엇보다 영국의 현대 보수주의와 보수당의 근간을 세웠다고 평가받는 로버트 필(Robert Peel, 1788-1850, 초대 보수당 대표, 총리 1834~1835+1841~1846)의 언행을 참고할만하다. 필은 ‘불가피한 변화에 적응하고, 필요한 변화를 주도하는’ 새로운 보수주의의 흐름을 만들었다. 그 예가 가톨릭해방법의 경우이다. 가톨릭 신자의 공직 진출 등을 규제하는 종래의 체제는 국교회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토리당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었고 본래 필도 그러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의 일부였던 아일랜드 내셔널리스트들이 기세를 올리면서 제국의 안정성에 위기가 닥쳤다. 필은 최종적으로 가톨릭 교도들에게 관용을 보이는 것이 제국 전체의 안정과 지속에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그가 한 말이 ‘가톨릭 해방이 큰 위험이긴 하지만, 국민적 내전은 더 큰 위험이다.’였다.


다른 한편, 필은 경제적으로 지주들의 이해를 대변하며 관세 장벽을 유지해 곡가를 고가로 유지하는 토리당의 종래 노선에 반기를 들었다. 필은 역사적으로 곡물법/항해법 폐지와 자유무역을 본격적으로 개막한 인물로 유명하다. 자유무역을 통해 수입이 증가하면 국내 물가 안정에 긍정적 영향을 주며 무엇보다 소비자들에게 이익을 준다. 현대의 연구에서는 필이 강력하게 내세운 곡물법 폐지가 상층에게 손해가 되고 하층에게 이익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보수당 내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왔고, 필은 보수당 당수직과 총리직의 사임을 감수하고 강력하게 곡물법의 전면 폐지를 주장했다.


최종적으로는 후에 보수당도 자유무역정책을 수용하게 된다. 필은 보수주의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에도 영향을 주었다. 보수당 의원 중 1/3밖에 되지 않는 필계(Peelites)는 사실상 독자 행보를 걸었다. 이들은 후에 휘그당, 급진주의자들(Radicals)과 함께 자유당(Liberal Party)을 결성하게 된다. 필은 그 자신이 부유한 산업가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공적 책임감을 강하게 지닌 정치인이었다. 필의 주도하에 근대적 경찰제도 설립과 아동과 여성의 노동 규제 강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필의 정치적 바이브는 후배인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아예 일국보수주의(One-nation Conservatism)로 체계화하고 정립했다(물론 본래 디즈레일리는 보호무역론자였지만 결국 자유무역을 수용했다.).


보수주의란 본래 견고하고 체계적인 이론과 사상이라기 보다는, 태도나 자세에 가깝다. 불변의 보편적 진리보다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맥락과 상황을 더 중시한다. 변화에 무조건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검토되지 않은 이상적인 대기획과 전면적인 ‘변화를 위한 변화’에 반대한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보수주의는 시대에의 적응과 나아가 필요한 변화의 주도까지도 해낸다. 영국 보수당이 끈질기게 살아남은 것은, 시대적 변화를 처음부터 주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결국 그러한 변화들을 수용하거나 때로 주도한 덕분이었다. 자유무역과 경찰제도 등 근대적 개혁을 주도한 필과 같이 국가-사회-경제라는 전체적인 시스템과 질서의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우선 가치로 하고, 이를 본위로 경우에 따라서는 보수정당 스스로가 개혁과 변화를 주도할 수도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를 위한 최소한의 비전과 정책에 대한 관심이 현재의 국민의힘에는 전무하다는 것이다. 2016년부터 요구받은 혁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채 문재인 정부에 대한 ‘끌어내리기’ 전략이 한 번 성공하니 결국 보스만 올려다보고 보스와 당을 구분하지 않은 자신들의 근본적 폐단을 고치지 못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위헌계엄에는 대통령의 적극적 거수기 노릇을 한 국민의힘의 간접적 책임도 크다. 그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그간 국민의힘이 고치지 못한 폐단이 결국에는 그런 최악의 핵폭탄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국민의힘은 보스와 당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에서 나아가 당과 국가마저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가를 위해 보수정당을 일신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자신들이 과거에 물러섰다가 실권했다는 억울함이 우선한다.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국민의힘도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싫더라도 민주당은 국민의 최소 반을 차지하는 세력이다. 현실이 그러한 이상 무조건적으로 민주당을 쓰러뜨리는 것만을 모든 행동의 목표와 정당화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국정을 담당할 수 있는 관심과 역량이 뚜렷한 정당만이 민생을 살릴 수 있고 민생을 살려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민심은 언제나 당심보다 우선한다.


최근 10여 년의 흐름은 국민의힘이 주도한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완전히 거슬러 갈 수는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에 대한 개별적인 견해와 논의는 있을 수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더는 그 논쟁을 할 실익이 없다. 그리고 두 정부가 양질의 국정운영을 했느냐고 본다면 그렇지도 않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두 정부 때에도 필요한 정책이 런칭된 부분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예컨대 지출심사제도나 준칙재정기조의 도입 등이 그런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세부적인 정책들은 살려서 키우고, 급변하는 환경을 민감하게 인지하여 거기에 적응하며, 우리나라 사회와 경제의 구조와 문화를 불확실성에 유연하게 적응하도록 하고 국가의 회복탄력성을 제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국민의힘에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 근본적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스스로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을 쓰러뜨릴 수 없으며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을 쓰러뜨리는 것이 정치의 전부가 되어서도 안 된다. 궁극적으로 국민의힘이 국민에게 새롭게 제시할 수 있는 보수적 비전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이전의 역사에 관한 인식이나 추상적인 이념적 가치(‘자유’라던가..)에 관한 투쟁(e.g. ‘좌파 독재 타도’)중심의 정치를 근본적으로 폐기해야 한다.


*공공선 자본주의에 관한 보론) 개인적인 생각으로, 해당 보고서는 미국이라는 전제를 두고 있어서 구체적인 취지는 우리나라와는 맞지 않는 면도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 기업이 미국 기업과 같은 주주 중심 자본주의라고 알려져 있진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기업이건 국가건 간에, 대체로 ‘전체(기업이나 국가)가 성장하면 저절로 개인에게도 이익이 간다.’라는 명제를 따라왔다. 우리나라는 미국처럼 개인 본위의 사회라고 보기 어렵다. 미국의 경우 개인이 국가를 구성한다는 관점에서 국민=국가 vs 시장 이런 도식이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되레 국민(개인) vs 국가 + 시장에 가까운 도식이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는 시장이건 국가건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지 의문이 있다. 적어도 고성장 시대 이후를 놓고 볼 때,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시장이나 국가 덕분에 이익을 본 게 있나? 가계와 개인은 희생을 요구받았다. 그리고 직장인들의 삶이 나아졌다면 경제성장이나 시장 덕분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시장은 그냥 개인들이 모여서 거래하는 장이다. 그리고 시장에는 도덕적 가치라는 게 없다. 굳이 설명하자면 직장인의 삶이 나아진 건 직장인 개인이 시장에 적응하고 다른 경쟁자들보다 우위를 점했기 때문이다. 기업도 그렇고.


시장은 누군가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지는 영역이 아니고 아니어야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개인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장이 저절로 개인에게 형평적으로 이익을 주지는 않는다. 물론 시장은 합리적인 경제 운용이 가능하도록 하지만, 합리적인 경제 운용이 항상 모든 개인에게 형평적 이익을 제공하진 않는다. 최초에 중상주의 봉건 경제에서 근대적 시장경제로 넘어 갈 때라던가, 동아시아에서 개발국가가 자본과 노동을 체계적으로 집약해 성공할 때에는 불평등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전체가 성장하고 이익을 받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성장세가 줄어들고 고용 없는 성장에서 나아가 이제는 자동화가 심화하고 있다. 또 이제 성장은 중하층 이하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주지 않고 중상층 이상으로 갈수록 더 집중적으로 많은 이익을 준다.


결국 제대로 된 시장경제는 어느 나라든 간에 시장은 시장의 기능을 하도록 하되, 공적 개입도 불가피하다. 이는 관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관치는 금융권에 압박을 넣거나 특정 기업을 지원하거나 하는 식으로 민간의 소비나 투자를 ‘직접’ ‘통제’한다. 하지만 시장에의 공적 개입이란 기본적으로 시장경제의 자율을 보장하고 공공은 시장의 외생 환경(e.g. 교육, 복지, 법, 안보 등)을 안정화하되 동시에 필요하면 정당한 절차를 통해 재분배나 규제 등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개입의 정도와 방식 등에 따라 여러 방법이 있으나,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어느 것이건 근본적으로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의 원리가 제대로 관철되어야 한다고 본다. 시장이 국가나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은 어폐가 있지만,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의 말처럼 ‘시장경제(Market Economy)’에서 ‘시장사회(Market Society)’로 나아가는 경향은 공공 부문의 입장에서는 경계하는 것이 맞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국민에겐 여의도 문법을 이해할 의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