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노동당, 신자유주의 좌파 또는 진보의 새로운 길?

신노동당 New Labour 기획에 관한 번역/생각/연표 등 모음

by 남재준

lair & Brown The New Labour Revolution S01E03


Blair & Brown: The New Labour Revolution (Episode 5)


"신노동당의 개혁을 추동해 온 이해는 개인으로서의 시민들 - 환자들, 부모들, 학생들, 법을 준수하는 시민들 - 을 각각의 공공서비스의 중심에 둔다는 것과 더불어, 개개인의 요구 사항을 충족할 수 있도록 하는 공공서비스의 개혁입니다." _ 토니 블레어 (Tony Blair), 영국 총리 (1997~2007)


"리더십의 기술은 예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요 라고 말하는 것에 있다. 예 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_ 토니 블레어(Tony Blair), 영국 총리 1997~2007


"'따뜻한 보수(Compassionate Conservatism)'와 보수의 유일한 차이는, 따뜻한 보수는 '우리는 당신을 도울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당신에게 말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_ 토니 블레어, 2005년 12월 14일 대총리질문(Prime Minister's Questions)에서


“토니와 대처는 아주 흥미로운 관계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녀가 어디서 왔고 무엇을 했는지 등에 대해서 분석하고 싶어 했죠. 그는 대처 여사를 공격하기보다는 새롭고 현대적인 영국을 창조함으로써 대처 여사를 넘어서기를 원했습니다.” _ 피터 만델슨 (수석국무장관(브라운 내각), 2009-2010)


”그들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포부가 실현될 수 있어야 저소득층이건 중산층이건 계층에 상관없이 국가를 통합할 수 있다는 기초적인 진실을 공유하는 정치인들이었습니다.” _ 앨런 밀번 (보건부장관(블레어 내각), 1999-2003)


"그가 진정으로 자신의 시각을 가지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며 자신의 정책을 위한 계획을 제시하기 시작한 순간 ... 그들(노동당)은 그것을 정말로 싫어했습니다." _ 필립 콜린스 (연설비서관(블레어 내각))


"토니는 항상 그의 당보다 좀 더 중도적이었습니다. 초기에 파우스트의 거래처럼 권력을 얻기 위해 중도적 리더인 그를 선택했지만, 2005년 총선에서 단지 36%에 불과한 득표율로 이기자 그는 더 이상 예전만큼 인기 있어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떠나가기 시작했죠." _ 매튜 테일러 (정치전략수석보좌관(블레어 내각))


“마거릿 대처는 지도자이자 변화의 주체였습니다. 저는 유럽이나 사회의 본성(‘사회는 없다. 개인만 있다.’라는)에 대해서는 그녀에게 강하게 반대했지만, 그녀가 가져온 변화와 그녀의 통치 방식을 객관적으로 볼 때, 그녀는 대단히 강하고 효과적인 리더였습니다.” _ 토니 블레어 (노동당 대표, 1994-2007 / 총리, 1997-2007)


“전 언제나 토니 블레어가 자신을 가교로 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몇몇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일반적으로는 연결될 수 없는 두 가지를 연결할 수 있는 사적 가교로 생각하죠. 그리고 그건 지도자의 위대한 자질입니다. 그는 전통적인 보수당 지지자들과 노동당을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_ 윌리엄 헤이그 (보수당(야당) 대표, 1997-2001)


“대처 여사는 자신이 대단한 인물이라는 점을 알았죠. 하지만 그분은 거기에 안주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블레어의 자아(자의식)는 좀 더 컸죠. 그는 항상 자신이 누구인지 탐색하고 자신의 성과를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 한계를 시험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그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열망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죠 ... 저는 음... 그가 자신의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든이 항상 존재했고 그를 밀어내고 앞길을 막으면서 경쟁했다는 점을 제외하면요.” _ 리처드 윌슨 (내각관방장관(블레어 내각), 1998-2002)


_ BBC 다큐멘터리 <신노동당 혁명(New Labour Revolution)>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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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어주의 Blairism, 사회주의를 혁신하다>


많은 논쟁이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토니 블레어 Tony Blair가 남긴 중요한 자취 중 하나는 ‘사회주의 Socialism’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토니 블레어가 바꾼 사회주의는 윤리적 사회주의 Ethical Socialism 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사회주의를 유물론이 아닌 관념적으로 접근하여 자본주의 경제를 공동체와 윤리에 복무하도록 변환하는 것을 지향하는 사상이다.


다른 말로는 공동체주의 Communitarianism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는 자신의 사회주의를 사회적-주의(Social-ism)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초선 의원으로서의 첫 의회 연설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저는 사회주의자이지만 지적 관심에 끌려 교과서를 읽어서도, 전통을 아예 생각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저 자신이 사회주의는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실존에 가장 가깝게 응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립이 아닌 협력을, 두려움이 아닌 동료애를 지향합니다. 그것은 평등을 지지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같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경제적 상황에서의 평등을 통해서만 개성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남겼다.


“제게 있어 사회주의는 단 한 번도 국유화나 국가의 권력에 대한 것이 아니었고, 경제나 심지어 정치에 대한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도덕적 목적이고, 가치의 묶음이며, 사회와 협력에 대한 믿음 즉 우리가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을 함께 이룰 수 있다는 점을 믿는 것이었죠. 그것은 제가 제 인생을 살아가려는 방식이고, 당신이 당신의 인생을 살아가려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 아주 단순한 사실들인데 – 나는 다른 누군가보다 더 가치 있지 않고, 남동생의 보호자이고, 다른 길로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서로에게서 고립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같은 가족, 공동체,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영원히 면대면으로 마주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블레어에게 철학적 기반이 부족하며 모호하다고 지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문헌에 따르면, 블레어는 존 맥머레이라는 철학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맥머레이는 사회 Society와 공동체 Community를 구분했다고 하는데, 사회는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조직이지만 공동체는 그 자체가 목적인 집단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영국의 대표적인 사회자유주의 철학자인 토머스 힐 그린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점들을 보면, 블레어주의의 핵심에는 ‘상호연결성 Interconnectedness’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료애, 가족애 등 ‘그 자체가 목적인’ 연결들인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함께 공동 운명체로 묶여 있다는 것이다.


약간 더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인다면, 블레어는 이러한 ‘공동체’의 의식이 결국에는 사회나 국가라는 조직을 이루는 근간이 된다고 생각한 듯하다.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인으로서 그가 밝힌 신념이 단지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도덕적 신념’이라는 점을 항상 강조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공동의 운명은 각 구성원에게 서로에 대한 의무를 부담하도록 한다.


이를 바탕으로 복지국가의 확대를 위한 부담의 정당화가, 세계화로 인한 자유무역의 확대가, 이라크와 코소보 등 먼 이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즉 블레어의 대내외 정책에 있어 상호연결성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주의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정책적, 이데올로기적으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단연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와 정치인 앤서니 크로슬란드였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모두 영국 사회주의의 혁신과 재정의를 제안했던 사람들이다.


크로슬란드의 경우에는, 저서인 <사회주의의 미래 The Future of Socialism>에서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붕괴할 것이라는 본래의 예견과 달리 자본주의는 교정될 수 있음이 증명되었으며, 오히려 적절한 정책적 도구의 사용을 통한 점진적 변화가 자본주의 체제의 체질을 바꿀 것이라고 역설했다.


한편 계급이 중요한 정치사회적 구분점이었던 영국에서 노동당의 승리를 위해서는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이해를 일치시키는 것이 중요했는데,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노동당 대표 휴 게이츠켈은 이런 말을 남겼다.


“중산 계급 연대의 성공은 노동계급이 중산 계급의 리더십과 사상을 수용하는 데에 달려있다.”


현실적으로 노동계급이 완전히 일치단결해 자신만의 힘으로 기존 체제에서 권력을 갖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중산층이 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해서 노동계급과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한편으로 이는 화이트칼라 전문직이 증가하면서 그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정치적 전략이기도 했는데, 후에 1964년 총선에서 해럴드 윌슨 Harold Wilson이 정권교체를 할 때 이 전략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


90년대 말에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시대적 흐름의 변화가 닥쳐오면서, 사회주의는 국가가 통제하는 생산-소비 구조를 일단 부인해야 하는 현실적인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래서 사회정의와 복지국가의 대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경제적 효율성과 자율의 논리를 수용하는 ‘제3의 길’이 제시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흐름들을 정리한다면, 하나로 뭉치기 어렵고 뭉친다 하더라도 헤게모니를 쥔 지배층을 꺾기 어려운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노동당이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중산 계층과 손을 잡아야 하고, 자본주의 자체를 완전히 전복하기보다는 자본주의를 사회적으로 공동체와 윤리에 복무하도록 변형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 사회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인식의 틀이었던 유물론을 탈피한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사회통합의 기치 아래 계급을 뛰어넘는 공동체의 가치와 윤리를 강조함으로써 생산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계급 구조의 역학을 부인한 것이다.


원리적 사회주의의 시각에서 착취적 불평등의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더 심화되었는데 오히려 시장과 시민사회와의 협력을 강조하면서 사실상 신자유주의의 손을 들어주는 모양새를 취한 블레어주의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당내의 연성좌파 Soft left보다 더 중도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는데, 일례로 공공서비스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것이 일반적인 정통 사민주의 노선이라면 그는 민간과 공공의 공급자들을 늘려 소비자/시민의 선택권을 늘리고 공급자들 간 경쟁을 유도해 서비스의 질을 제고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시각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시간이 흐른 뒤에 와서 볼 때 그가 대처 시절의 구조적 유산에 대해 너무 호의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대처 여사는 과하다고 여겨질 정도의 급진적인 시장 중심 구조개혁을 단행했는데, 블레어는 그러한 개혁이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처가 남긴 제조업 기반의 붕괴와 이로 인한 대량 실업, 과도한 민영화 등의 문제들은 블레어와 같은 철학을 공유하더라도 보다 근본적인 구조적 수정이 필요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런 점에서 그가 대처주의를 역코스로까지 돌려놓지 못한 것은 사실이어 보이고, 철학적으로는 모르더라도 정책적으로는 비판의 여지가 많이 있다고 본다.


한편으로, 과잉된 공동체 의식과 사회학적 상상력은 국가와 국민을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의 의도가 도덕적 의무감에 있었다는 점을 의심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 도덕적 의무감이 이라크에서의 파국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정치인의 신념이 과잉되면 얼마나 큰 재앙이 닥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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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Socialism)에서 사회적-주의(Social-ism)로>


토니 블레어(Tony Blair, 1953-)가 당수가 된 후 당 혁신을 위해 채택한 대표적 작업은 당헌 제4조의 개정이었다.


영국 노동당의 당헌 제4조는 생산수단의 공유화(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보유 및 운용)를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내 우파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자체가 이미 상당히 변형(수정)된 상태에서 사회주의가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굳이 필연적인 것으로 볼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적절한 정부 개입을 통해 빈곤, 위생, 보건, 교육, 인프라 등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내 우파는 당헌 제4조를 개정하기를 원했다.


이는 이미 1950년대에 당내 우파였던 당수 휴 게이츠켈(Hugh Gaitskell, 1906-1963)에 의해 시도된 바 있었다.


하지만 게이츠켈은 거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1940년대에 겪은 대대적인 애틀리 내각의 개혁 경험은 노동당 좌파들에게 큰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한편 당내 우파는 보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고, 1950년대에 한국전쟁 등 냉전이 심화되자 자체 핵무장에 동의하고 전비 조달을 위한 부분적인 재정 긴축을 제안하기도 했다.


1956년에 노동당 정치인이자 사회주의 저술가인 앤서니 크로슬란드가 <사회주의의 미래(The Future of Socialism)>라는 책을 냈을 때 이것은 이후 수십 년 간 노동당 내 좌파와 우파 간에 많은 논쟁을 불러왔다.


그는 사회주의가 유물론적/결정론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본주의를 사회적 방향으로 길들이고 사회적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파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게이츠켈의 후임 당수였던 해럴드 윌슨(Harold Wilson, 1916-1995)은 좌파와 우파를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하긴 했으나 우파는 아니었다.


1979년의 패배 이후 18년 간 노동당은 야당으로 있어야 했다.


뭔가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고, 그것을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다는 점을 모든 당원과 지지층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당헌 제4조가 개정되었다.


이는 사회주의에서 사회적-주의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사회적 가치'와 공동체, 협력, 연대를 지향하는 사상으로 사회주의의 문법을 아예 바꾸고자 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시도가 단순히 우경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유럽 사회주의의 지평을 넓힌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이처럼 혁신이란 근본적으로 영혼(spirit)과 사람을 바꾸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작금의 민주 진영에 필요한 혁신은 무엇일까.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문제 의식과 가치를 찾는 일일 것이다.


분절화되고 파편화된 시대를 넘어, 개인의 상호 존중과 건전한 사회적 담론이 있는 사회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제도와 생활의 민주주의를 전제로, 자유와 인본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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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에 영국의 존 프레스콧(John Prescott)이라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영국정치에 상당히 관심이 있지 않고서는 잘 모를 사람인데, 그는 1997~2010 블레어-브라운 영국 노동당 내각에서 부총리를 맡는 등 주요 인사였다.


그의 추도사 중에 전 총리 토니 블레어(Tony Blair)는 이렇게 말했다.


"보수당은 최소한 전통적으로는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존재했고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본질적으로 아무 원칙도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진보적 운동들처럼 - 노동당과 권력은 서로에게 불편한 사이였습니다. 대개 장기간을 야당으로 있던 그 시절에도 이성적으로는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노동당은 권력을 불신했습니다. 추구해야 했지만 자기의 가치에 비추어 위험하다고 여겼죠. 왜냐하면 권력을 잡는 것은 변화를 실현할 수 있게 해주지만 동시에 다룰 때에는 보수적이어야(조심스러워야) 하거나, 고통이나 타협이나 거래와 같이 권력에 당연히 수반되는 것들을 감내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상 90년대에 제3의 길(Third Way)이 등장하게 된 정치적 의의 내지 취지라고 할 수 있다.


'집권하는, 그것도 충분히 오래 집권해서 구조와 문화의 변동까지 유도해내는 진보를 보고 싶다.'


서구에서 제3의 길은 베이비부머(Baby-boomer) 정치의 정수 중 하나다.


젊은 시절을 광란(?)의 60~70년대에 보낸 이 진보적인 세대는 나이가 들어 가며 점차 현실에 눈을 떴다.


특히나 그들이 80년대에 마주한 세상은 대대적인 정치사회적 보수화와 경제적 탈산업화였다.


더는 과거의 전후 복지국가와 국유산업 주도 경제로 돌아갈 수 없음을 그들은 체감했다.


동시에 종래의 범좌파가 점점 변동해가는 사람들의 인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소수 좌파 엘리트나 계급정치와 노동조합에만 얽매여 있는 것을 답답해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80년대의 시장 중심 구조개혁을 그 이전으로 되돌리기 보다는, 거기서 더 복지나 교육이나 의료 등의 공공서비스에 사회투자하여 성장-분배가 양립하고 선순환하는 모델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비판자들은 제3의 길은 이제까지 수없이 시도된 것이며, '권력에 대한 집착'이 낳은 선거용 구호일 뿐이라고도 한다.


솔직히 아주 틀린 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런데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어차피 정책이나 철학의 창의성이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의 신(Neo)자유주의도 과거의 고전적 자유주의를 되살린 것이지 새(New) 자유주의를 만들어 낸 게 아니다.


진보는 항상 주류적 사고에서 벗어나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좀 더 과감하게 '일상의 감각'을 포착해서 그것과 자신들의 사상을 어떻게 좁힐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더구나 김대중 대통령이 재임 1년 차 즈음에 밝힌 것처럼, '개혁은 제도나 법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람들의 의식 변화에 성패가 달려 있다.'


의식 변화는 사회구조의 변화까지 수반해야 하는데, 결국 점진적 개혁을 통해 달성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좀 더 중도적 입장에 있는 이들은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는 것이 반대자로 남아 퇴보를 지켜보기만 하는 것보다는 낫다.'라는 입장이다.


더 원리적인 좌파들과는 이 지점에서 궤를 달리한다.


더 뚜렷한 좌파들은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담론을 즐기지만, 결국 실제로 중요한 건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현존하는 제도와 구조와 정책이다.


예를 들어 추상적인 '불평등 전복'보다는 결국 구체적인 '겨울철 연료 지원'(이번에 영국 노동당 내각에서 예산 삭감에 포함되어 크게 논란이 되었었다)이 더 중요한 것이다.


담론에 있어서의 현실 감각과 구체적인 정책 입안 능력이 없다면 사람들의 사고의 관성에 기댄 보수를 이길 수 없다.


모든 정파는 결국 권력을 지향한다.


좀 더 좌파적인 인사들은 더 큰 역사와 민중의 흐름을 보고 맨 땅에 헤딩하듯 사회운동에 몸을 던지고 그것도 유의미한 사회변동을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소위 '중도화'를 변절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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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우 민주국가의 지도자들은 초기에 기대를 받고 말기로 갈수록 불신을 받는다.


집권기간이 길수록 그 양상은 더 길고 다채롭게 나타난다.


토니 블레어(Tony Blair)가 그런 경우였다.


초기 블레어(대강 97-2001년의 1기)는 94-97년 쌓은 젊은 혁신적 지도자의 이미지를 활용해 정치적 레토릭을 많이 썼다.


내가 영국의 유권자라면 되려 그 시절엔 불신했을 것 같다.


노동당은 18년 간이나 야당으로 있었고, 중산층에 속한 블레어는 나이도 상대적으로 젊고(44) 노동계급의 고통에 대해 잘 몰랐으며 국정 경험은 없었다.


그래서 실천보다 이미지나 말만 앞선다는 비판이 많았다.


중기 블레어(2001-2005년의 2기)는 대체로 테러와의 전쟁ㆍ이라크 전쟁 등 대외문제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을 모두 중시하면서 영국이 가교 역할을 하며 발언권을 키우기를 원했다.


또 국제주의적 시각이 있어 분쟁 지역에의 군사적 개입은 상호연결성이 강한 세계화 시대에 국익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옳다고 믿었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는 블레어의 그런 자유국제주의 대외정책에 대한 열정을 '정치인 신드롬 Statesman syndrome' 즉 정치인으로서의 신념ㆍ책임감에 집착하는 양태라고 지적하는 언급이 있다)


이라크전 때에도 미국 단독 군사적 개입도 불사하려 했던 조지 W. 부시와 달리 블레어는 끝까지 국제연합에서 명분을 얻어내고 싶어했다.


의회 연설에서도 대량살상무기의 현실적 위험보다 레짐 체인지의 도덕적 정당성을 강하게 역설했다.


말기(2005-2007년의 3기)에 가서야 그는 정부가 작동되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국정운영에서 무엇을 우선할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다큐에서 스스로 밝힌 내용이다)


또 이미지 중심의 정무적 커뮤니케이션보다 실질적 국정 수행 능력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2005년에 보수당이 회심의 선택으로 내놓은 선택이었던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신임 당수와의 PMQ(대총리질문)를 보면 그런 면모를 알 수 있다.


캐머런은 상류층 출신 젊은 엘리트로서 블레어보다 훨씬 능란하게 비꼬거나 약점을 파고드는 것을 잘 했다. ('You were the future once' 발언 등)


블레어의 답변과 응수는 대체로 구체적인 정책 내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보수당이 대안을 내지 않으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말이 되지 않는 정책을 낸다는 식으로 이어졌다.


10년 집권을 한 노련한 기성 총리가 된 것이다.


처음에 블레어는 재선까지만 한다고 했으나 이라크전으로 인한 지지도 하락 등으로 불구하고 2005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의석수는 많이 하락했지만) 최초로 3연속 집권에 성공했다.


블레어가 선거운동 기간에 '3기를 다 채우진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는 바람에 안 그래도 불안해하던 노동당 당내 기류는 총선 후 '블레어의 사임 시점'으로 초점이 옮겨갔다.


이때의 블레어는 앞서 설명했듯 본격적인 개혁과 정책 이니셔티브에 가속페달을 밟으려 했으나 때가 늦은 것이다.


결국 2007년에 당내 의원 출신 각료들의 사퇴와 퇴진 촉구 편지 발송 등 '쿠데타'가 발생했다.


수십 년을 함께 한 제프리 하우의 사임으로 인해 촉발된 보수당 내 당수 경선으로 무너진 마거릿 대처와 양상이 비슷하다고 세간에선 말했다.


결국 블레어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노동당 대표직과 총리직을 브라운에게 이양하고 사임한다.


사실 말기의 블레어가 제일 정부수반다운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국가의 정부수반은 임기가 한정되어 있는데 익숙해질 수 있는 수습기간도 없고 정무적 위기에 대처하다 보면 임기는 금방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정작 원숙한 리더십을 갖추었을 때에는 이미 기회와 정치적 사회자본은 모두 소진되어 있는 것이다.


많은 정부수반과 리더들에게서 그런 양상이 반복되는데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두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모든 서로 다른 정당의 동료들께 정치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몇몇은 정치를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것에 참여하는 우리는 사람들이 당당한 곳이라는 것을 압니다. 정치가 많은 가혹한 논쟁들을 지닌다는 점을 앎에도, 아직 이 무대는 제 심장을 약간 빠르게 뛰게 합니다. 때로 정치가 얕은 속임수나 난무하는 곳이라 해도, 결국에는 대개 숭고한 사명을 추구하는 곳입니다. 친구건 적이건, 이곳의 모두가 잘 지내길 빕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이상입니다." [박수]


_ 토니 블레어, 마지막 PMQ 최후발언 (2007.6.27.)


(특히 마지막 부분이 인상적이었는데 원문을 옮긴다. :


I wish everyone, friend or foe, well. That is that. The end. [Appla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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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재임 중에는 이라크 전쟁 때문에, 퇴임 후에는 독재정권 자문 및 대가 수령으로 인해 논란이 되었다.


특히 후자에 대한 그의 자기변론은 이렇다.


독재정권이라 하더라도 대개 해당국이 개발도상국임을 감안하면, 무엇보다 일단 경제발전을 통한 국민 삶의 질 향상이 우선이고 이를 도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해외원조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입장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해외원조가 비록 단기적으로 독재정권의 유지에 기여하는 측면이 있을지라도, 장기적으로 빈곤의 덫에서 국가를 탈출시켜 이를 정치사회적 민주화ㆍ자유화로 이어지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일단 근대화론이 통용되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경험적으로 경제발전이 쉽지 않고, 나아가 이를 정치사회적 민주화ㆍ자유화로 이어지게 하기는 더 어렵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자신의 이권 행위를 합리화하는 것일 수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수호와 레짐 체인지를 강조하며 이라크 전쟁 개전을 주도했던 과거의 입장과도 충돌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그는 독재정권은 외부의 힘에 의해서라도 축출되어야 하고 용납되어서는 안 되며, 선진(서구) 정치사회질서를 이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블레어 전 총리가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 보유라는 직접적 명분과는 별개로) 지금까지도 이라크 전쟁의 개전 명분 자체는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은 독재정권에 사실상 영합하는 행동을 하면서 반대의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블레어 독트린의 핵심은 세계화로 인한 국가 간 윤리적 상호 의존과 연대를 기반으로, 중동 등 분쟁 지역의 문제에 지원과 개입을 적극적으로 할 윤리적 의무가 선진국에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자유국제주의(Liberal Internationalism)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기 논리를 이익에 따라 바꾸는 것은 크게 비판받을 지점이다.


한편, 개발도상국에의 해외원조(경제>정치) 내지 레짐 체인지(정치>경제)의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 같다.


하지만 개발도상국 국민의 입장에서 전자는 독재정권의 수탈을 후자는 전쟁의 참화를 견뎌야 하는 것이라 모두 좋지 않다.


선진국 국민의 입장에서도 군비건 원조 예산이건 굳이 먼 이국의 문제에 많은 국비를 들일 이유에 대해 회의적인 듯 하다.


자칫 내셔널리즘과 포퓰리즘을 키우는 명분이 될 수 있고, 실제로 90-2000년대의 미국 주도 신보수주의의 후과가 현재의 극우 정치인 것으로 보인다.


내 생각으로는, 결국 해외원조는 현재 많은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협력사업의 방식이 적절하고 거시적으로는 제도와 체제 개혁 조건부로 원조를 제공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군사적 개입은 자제되는 편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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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블레어(Tony Blair) 내각, 1997-2007 : 타임라인> *출처 : BBC


1997년


5월 1일,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이 총선에서 압승하면서 대처와 메이저 치하의 18년간의 보수당 정권을 끝내다.

5월 2일, 토니 블레어가 1812년 이래 최연소 총리가 되다.

5월 6일, 재무장관 고든 브라운이 영란은행으로 하여금 이자율을 자유롭게 설정하도록 하다.

6월 18일, 영국이 유럽연합 사회헌장에 서명하다.

6월 19일, 윌리엄 헤이그가 존 메이저의 뒤를 이어 보수당 대표가 되다.

8월 31일, 토니 블레어가 웨일스 공빈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한 추도 분위기를 반영해 그녀를 '인민의 왕세자비'로 칭하다.

9월 12일, 스코틀랜드와 웨일스가 한 주를 사이에 두고 중앙정부로부터의 자치권 이양을 주민투표로 결정하다. 둘 다 가결되다.

10월 - 영국이 암스테르담 조약에 서명하며 유럽통합 프로젝트에의 참여 의사를 재확인하다.

10월 27일, 고든 브라운이 그의 5가지 핵심 경제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1999년 이전에는 경제통화연합에 가입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다.

11월 중, 노동당이 자동차 경주 협회인 포뮬러 원으로부터 기부받은 100만 파운드를 반환하기로 약속하다.

12월 11일, 토니 블레어가 한부모 가정에 대한 수당을 삭감하는 안에 대해 47인의 의원들의 저항에 마주하다. (최초의 백벤치 MP들의 반란표)


1998년


4월 10일, 수 개월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굿 프라이데이 협정에서 분권화된 지방정부의 구체적 사항들이 배제되다.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 남북아일랜드 협력 기구 + 영국-아일랜드 정부 간 협의 구조 등이 포함되다.

5월 22일,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에서 동시에 국민투표가 진행되어 굿 프라이데이 협정이 각각 71%, 94% 찬성으로 승인되다.

6월 20일, 보수당 의원 피터 템플모리스가 탈당하고 노동당에 입당하다.

7월 27일, 노동당 정부가 첫 내각 교체를 단행하다. 피터 만델슨이 무역산업부장관으로 입각하다.

10월 17일, 전 칠레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런던으로 수술을 받으러 와 있던 차에 체포되다.

10월 27일, 클랩햄 커먼에서 강도를 당한 뒤 론 데이비스가 웨일스부장관에서 사퇴하다.

11월 - 유럽인권협약(ECHR)을 영국 국내법으로 편입하는 인권법이 제정되다.

12월 16일, 블레어와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UN이 사담 후세인이 무기사찰에 협조하고 있지 않다고 보고한 뒤 이라크에 융단폭격을 가하다.

12월 23일, 무역산업부장관 피터 만델슨이 동료 장관 제프리 로빈슨에게 주택 구입 명목으로 대출을 받은 일로 사임하다.


1999년


3월 24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코소보에 있는 세르비아군에 대한 폭격이 시작되다.

3월 - NATO의 코소보 공습에 영국군이 적극 참여하다. 토니 블레어가 '인도주의적 개입'의 명분을 강하게 옹호하다.

4월 - 영국 최초로 법정최저임금제도가 시행되다.

8월 9일, 찰스 케네디가 패디 애쉬다운의 뒤를 이어 자유민주당 대표로 선출되다.

10월 11일, 피터 만델슨이 북아일랜드부장관으로 내각에 복귀하다.

11월 - 개정 상원법을 통해 대부분의 세습귀족 의석을 폐지하고 92인만 남기는 절충안이 채택되어 1차 상원개혁이 이루어지다.

11월 9일, 재무장관 고든 브라운이 국가 연금이 주당 75펜스 인상될 것이라고 발표하다.

11월 19일, 블레어 부부가 4번째 아이의 임신을 발표하다.

12월 31일, 밀레니엄 돔의 그랜드 오프닝이 수백 명의 손님들을 추위에 떨며 기다리게 한 점으로 논란을 사다.


2000년


5월 - 대처 내각 시절에 폐지된 광역자치기능을 부활시키는 런던시장, 런던의회의 첫 선거가 실시되다.

3월 6일, 켄 리빙스턴이 런던 시장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할 의사를 밝히다.

5월 4일, 켄 리빙스턴이 런던 시장으로 당선되다.

5월 20일, 리오 블레어가 150년 만에 현직 총리의 첫 아이로서 태어나다.

5월-9월 - 영국군이 시에라리온 내전에 투입되어 정부군 지원 + 인질 구출 등을 수행하다. 이는 비교적 성공적인 개입으로 평가되고, 블레어 외교정책의 '인도주의적 개입' 노선이 강화되다.

6월 7일, 블레어가 여성단체에의 연설에서 야유와 느린 박수를 받다.

6월 29일, 블레어가 공중음주에 대해 경찰이 직결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7월 5일, 총리의 장남인 유안 블레어가 시험 후 축하식에 참여하지 않고 만취 상태에서 경찰의 견책을 받다.

9월 4일, 모 몰럼이 다음 총선에 불출마하고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하다.

9월 5일, 유가 상승으로 인한 연료 시위가 시작되다. 비상 각료 회의가 열리다. 블레어가 취임 후 첫 리더십의 시험대에 오르다. 정부가 일부 유류세 인상 계획을 재검토하며 수습하다.


2001년


연초 - 토니 블레어가 지도하는 노동당이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경기호황과 저물가에 힘입어 교육+보건에 대한 지출 확대 계획을 내세우며 재집권을 도모하다. '쿨 브리타니아' 문화 이미지와 현대화 프로젝가 절정을 맞다.

1월 24일, 피터 만델슨이 힌두인 여권 사건으로 사임하다. 그러나 뒤에 결백한 것으로 밝혀지다.

2월 20일, 구제역이 시작되면서 총선이 한 달 뒤로 연기되다.

5월 8일, 토니 블레어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의회 해산을 요청하고 6월 7일에 총선을 실시할 것을 발표하다.

6월 7일, 총선에서 다시 압승하며 노동당이 역사적인 재집권에 성공하다.

6월 8일, 내각 교체가 단행되다. 데이비드 블렁킷이 내무부장관으로, 잭 스트로가 외무부장관으로 옮기다.

7월 16일, 독립적 생각을 가진 두 위원회의 위원장들을 해임하려는 시도에 대해 100인이 넘는 의원들이 반발하다.

9월 11일, 블레어가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에 대한 충격과 영국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임을 밝히다.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되다.

9월 13일, 이안 덩컨 스미스가 케네스 클라크를 누르고 윌리엄 헤이그를 대신해 보수당 대표가 되다.

10월-12월 - 영국군이 미국 주도 아프가니스탄 침공(탈레반, 알카에다 격퇴 작전)에 참여하다. 반테러, 범죄, 안보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국내 치안 및 감시 + 피의자 구금 관련 권한을 확대하다.


2002년


2002년 - 2001년 총선에서 공약한 학교+병원 개선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국민보험료 인상 등 사실상 증세를 단행하는 동시에 국민건강서비스(NHS)와 교육 지출 등을 대폭 확대하다. 2001년에 설치된 총리실의 Delivery Unit(보건/교육/치안 성과관리 조직)이 본격 가동되어 수술 대기 기간 단축 + 학업성취도 제고 + 범죄율 통제 등 성과지표를 추적, 관리하다.

1월 1일, 유로가 유럽 전체에서 주요 통화가 되었으나 영국은 유로존 밖에 있는 적은 국가들 중 하나가 되다.

2월 3일, 블레어가 전당대회에서 공공서비스 개혁에 대한 맹렬한 반대자들의 방해에 대해 연설하다.

5월 29일, 소규모 내각 교체가 단행되어 폴 보탱이 영국의 첫 흑인 각료가 되다.

10월 - 무기 은닉 및 간첩 논란 등으로 북아일랜드 자치의회와 정부가 정지되다.


2003년


2003년 - 국민건강서비스 하의 병원에 재정+운영 등 측면에서 자율을 확대하는 Foundation Hospital 제도의 도입이 추진되면서, 노동당 내부에서 '시장화' 논쟁이 본격화되다.

2월 15일, 약 100만 명의 사람들이 런던에서 열린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하다. 토니 블레어의 리더십이 최초로 거대한 위기를 맞다.

3월 17일, 로빈 쿡이 이라크 전쟁 반대 이유로 하원 원내총무직을 사임하다. 토니 블레어가 하원 연설에서 무력 사용의 정당화를 역설하다(대량살상무기의 위협, 국제연합 결의 해석 등)

3월 18일, 139인의 노동당 의원들이 정부의 이라크 전쟁 개전에 반대 투표를 하다.

3월 20일, 미국이 바그다드에 대한 공중폭격을 개시하면서 이라크 전쟁이 개전되다.

5월 12일, 클레어 쇼트가 이라크 전쟁에서 반대하면서 국제개발부장관에서 사퇴하면서 토니 블레어가 이라크의 미래에 대한 약속을 어겼다고 말하다.

5월 29일, 투데이 프로그램에서 앤드류 질리언이 정부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관련 서류를 부풀렸다는 의혹을 보도하다.

6월 9일, 영국 정부가 영국경제는 아직 유로존에 가입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다시 발표하다.

7월 9일, 국방부장관이 무기 전문가 데이비드 켈리 박사를 앤드류 질리언이 언급한 서류 보고서의 작성자로서 언급하다.

7월 17일, 블레어가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다.

7월 18일, 정무 무기 전문가 데이비드 켈리 박사가 자택 근처 숲 속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다.

8월 2일, 블레어가 역대 노동당 출신 총리 중 최장 재임자가 되다.

8월 29일, 총리실 언론수석비서관 앨러스테어 캠벨이 데이비드 켈리 사건의 관련 책임자로서 사의를 표하다.

9월 18일, 브렌트 이스트 보궐선거에서 노동당이 자유민주당에 패배하다.

9월 29일, 고든 브라운이 블레어-브라운 연합이 흔들렸다는 세간의 의혹 등에 대해 전당대회에서 사실무근이라는 취지의 열변을 토하다.

10월 19일, 블레어가 불규칙적 심장박동으로 인해 병원에 내원해 몇 시간을 보내다.

12월 14일, 미군이 티크리트 인근 구멍에 숨어 있던 사담 후세인을 붙잡다. 블레어는 이 생포는 이라크에 드리워졌던 그림자를 제거했다고 말하다.


2004년


2004년 - 국가 비상사태 시 정부의 권한 및 대응 체계를 정비하는 법이 제정되다. 토니 블레어가 유럽헌법조약에 대해 국민투표를 공언하였으나 이후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의 국민투표 부결로 유럽헌법조약의 영국 국민투표 부의가 무기한 연기되다.

1월 27일, 정부가 토니 블레어가 자신의 권위를 걸었던 대학 수업료 도입안 표결에서 간신히 승리하다. 72인의 노동당 의원들이 반란표를 던지다.

1월 28일, 허튼스 경 보고서에서 정부가 대량살상무기 보고서를 부풀렸다는 증거가 없으며, 켈리 사건과 관련해 BBC 보도를 비판하다.

2월 2일, 켄 리빙스턴이 노동당 런던 시장 후보로 공천되다.

2월 22일, 언론 인터뷰에서 블레어가 이번 임기를 끝으로 사임할 것이라는 주장을 일축하고 세 번째 임기에 도전할 것이라고 밝히다.

3월 - 대학등록금에 가변상한제(Variable top-up fees)를 허용하는 사실상의 대학등록금 상한선 인상 법안이 하원에서 매우 근소한 차이로 가결되다. 노동당 내 중도파와 좌파 간 분열이 심화되다.

3월 25일, 블레어가 리비아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와 면담하다. 이는 12월에 리비아가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한 뒤에 이루어진 화해였다.

4월 20일, 블레어가 입장을 선회해 유럽연합 헌장에 대한 국민투표가 있을 것이라고 밝히다.

6월 10일, 지방선거에서 노동당이 참패했으나 켄 리빙스턴은 런던 시장으로 재선되다.

7월 14일, 버틀러 보고서에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정보들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블레어는 선의로 행동했다고 밝히다.

7월 21일, 블레어가 노동당 대표가 된 지 10년 차를 맞다.

9월 15일, 블레어가 연설에서 기후변화가 긴급한 문제이며 지금 당장 지구온난화에 대응하기 위한 행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다.

10월 1일, 토니 블레어가 다음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그 임기 만료 전에 사임할 것이라고 밝히다.

12월 15일, 내무부장관 데이비드 블렁킷이 전 애인이 고용한 돌보미의 비자 발급 관련 청탁 의혹으로 사임하다.


2005년


2005년 - 교육과 보건 분야에서의 성과지표 개선이 일정 수준 인정받았으나, 이라크 전쟁 여파와 대테러 정책의 인권침해 논란 등이 계속되다.

2월 6일, 블레어가 1960년대와 1970년대 해럴드 윌슨의 분리된 두 임기의 총합보다 긴 시간 동안 재임해 최장수 노동당 총리가 되다.

5월 5일, 노동당이 최초로 3차 연속 집권에 성공했으나 다수의 규모가 줄다.

5월 29일, 프랑스 유권자들이 유럽연합 헌장을 거부해 유럽에 파장이 일다. 3일 후 네덜란드도 이를 거부하다.

6월 23일, 유럽정상회의 의장이 된 토니 블레어가 유럽연합이 리더십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연설하다.

7월 6일, 런던이 2012년 올림픽 개최지가 되다. 블레어도 싱가포르에 잠시 방문해 캠페인을 도왔다.

7월 7일, 런던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해 52인이 사망하다. 이것이 G8 정상회의와 우연히 시점이 겹친 것과 관련해 블레어는 이 공격이 각별히 야만적이라고 역설하다.

7월 8일, 스코틀랜드에서 블레어의 사회로 열린 G8 정상회의에서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를 증액하기로 결정하다.

7월 21일, 런던 대중교통에서의 폭탄 테러 시도가 또 다시 발각되다.

11월 9일, 테러 피의자의 영장 없는 구금 일수를 증가시키는 테러 규제 법안이 노동당 의원들의 반란표로 의회에서 부결되면서 블레어가 처음으로 의회에서 패배하다.

12월 6일, 데이비드 캐머런이 보수당 대표로 선출되다.


2006년


2006년 - 국민ID카드 도입법이 가결되다. 그러나 이 법은 뒤에 2011년 보수-자민 연립정권에서 폐지되다. 대테러와 불법 이민 통제가 입법취지였으나 인권 침해와 국가 감시 논란이 커지다.

1월 6일, 찰스 케네디 자유민주당 대표가 공적으로 음주 문제를 인정한 뒤 동료 의원들의 압박으로 사임하다.

3월 2일, 멘지스 캠벨이 자유민주당 대표로 선출되다.

3월 15일, 토니 블레어가 잉글랜드의 학교에 입시와 예산 관련 자율권을 부여하는 내용의 법안을 가결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상당수 노동당 의원들이 기권하거나 반대하고 보수당 의원들의 찬성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는 토니 블레어의 당 내 권위의 실추를 의미했다. 노동당 내 '우경화, 시장화' 논란이 계속 심화되다.

3월 16일, 노동당의 재무관 잭 드롬니는 그나 다른 당직자들이 당이 비밀리에 수백만 파운드를 대출했음을 몰랐다고 밝히다.

4월 25일, 내무부가 추방에 대한 고려 없이 1,023인의 외국인 범죄자들이 석방되었다고 인정하다.

4월 26일, NHS(국민건강서비스) 적자 문제와 관련해, 패트리샤 휴이트 보건부장관이 취임 3일 만에 보건의료 노동자들에 의해 야유를 받다.

5월 4일, 노동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하다.

5월 5일, 토니 블레어가 행했던 것 중 최대 규모의 내각 교체를 단행하다. 내무부장관 찰스 클라크와 외무부장관 잭 스트로가 교체되다.

여름 -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충돌 국면에서 토니 블레어가 상대적으로 미국과 이스라엘 편에 가까운 태도를 보여 유럽과 자국 내에서 외교적 고립과 비판을 당하다.

7월 12일, 노동당 후원회장 레비 경이 작위 청탁을 위한 뇌물 수수 의혹으로 체포되었다가 보석되다.

9월 6일, 의원들이 총리의 퇴임을 위한 시간 계획을 요구하자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 간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다. 토니 블레어가 결국 1년 내에 사임하겠다고 공언하면서 레임 덕이 가속화되다.

9월 12일, 마지막 노동조합회의 연설에서 토니 블레어가 조롱과 야유 속에 자신의 업적을 방어하다.

9월 26일, 노동당 대표로서의 마지막 전당대회 연설에서 토니 블레어가 손을 떼기 어려움을 인정하다.

12월 14일, 경찰이 작위 청탁 뇌물 수수 의혹과 관련해 토니 블레어를 대면조사하다.


2007년


5월 1일, 취임 10년 차를 맞아 토니 블레어는 고든 브라운이 자신의 뒤를 잇기를 100% 기대한다고 말하다.

5월 4일, 노동당이 지방선거에서 참패하다.

5월 10일, 토니 블레어가 6월 27일에 총리직에서 퇴임할 것이라고 발표하다.

6월 27일, 토니 블레어가 10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총리직에서 퇴임하다. 고든 브라운이 노동당 대표 겸 영국 총리에 취임하다.

6~7월 - 런던 중심가 차량 폭탄 미수 사건, 글래스고 공항 차량 공격(6.30.) 등 취임 직후부터 고든 브라운이 대테러에 나서다. 여름 내내 잇따른 홍수 피해, 구제역 발병 등 재난관리가 주요 의제가 되다.

9~10월 - 모기지대출기관 노던 록(Northern Rock)의 유동성 위기가 드러나면서 19세기 이후 처음으로 은행 인출 사태(Bank run)가 발생하다. 정부와 영란은행이 긴급 지원에 나서다.

10월 6일,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한 가을 조기총선설이 한창이었으나 고든 브라운이 '총선을 실시하지 않겠다'고 전격 발표하다. 그러나 리더십에 상처를 남기다.

12월 6일, 고든 브라운이 테러죄 피의자의 최장 42일 무기소(영장 없는 구금) 연장 법안을 제안하며 안보 강화 기조를 강조하다.

12월 13일~14일, 영국이 유럽연합의 리스본 조약 조인에 참여하다. 이후 2008년에 영국 국내법(2008 개정 유럽연합법)으로 비준 절차를 진행하다.


2008년

2월 17일, 정부가 노던 록을 공적 소유로 전환하다. 금융위기의 첫 상징적 조치였다.

봄 - 블레어 내각 시절에 결정된 소득세 최저세율 10% 구간 폐지가 2008년부터 시행되면서, 저소득층의 부담이 증가한다는 비판이 폭증하다. 고든 브라운의 지지율에 타격을 입고 정부가 보완 대책을 제시하다.

5월 1일, 테러죄 피의자 구금 기간 연장이 하원에서 간신히 가결되다. 하지만 상원에서 결국 부결되어 시행되지 못했다.

9-10월 - 리먼 브라더스 파산 이후 금융시스템이 붕괴 위기에 처하자 브라운 내각이 대형은행의 자본 확충 + 지급 보증 + 유동성 공급이 결합된 대규모 은행 구제 패키지(약 370억 파운드 규모의 공적 소유 전환 포함)를 발표하다. 이후 단기 부가가치세 인하 등 재정 차원의 경기부양책도 병행되다.

11월 26일, 세계 최초 수준의 법적 구속력 있는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설정한 기후변화법이 발효되어 이후 영국의 장기 탄소 감축 정책의 골격이 되다.


2009년

1-2월 - 은행 자본 확충 + 자산 보호 제도 등 2차 금융안정 패키지가 발표되다. 경기후퇴에 대응하다.

4월 2일, 런던에서 G20 금융위기 정상회의가 개최되다. 브라운이 의장국 정부수반으로서 각국에 대규모 재정-금융 공조를 촉구하고, IMF 자금 확충 + 조세피난처 규제 강화 등의 합의를 도출했다고 강조하다.

4-5월 - 네팔 출신 구르카(네팔 출신 영국군 복무자) 참전 군인들의 영국 정착권을 둘러싸고 정부의 제한적 규정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다.

4월 29일, 모든 구르카에게 보다 보다 넓은 정착권 부여를 요구하는 자유민주당 주도 결의안이 하원에서 가결되면서 정부가 패배하다.

5월 8일,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하원의원의 특권 비 및 경비 청구 내의 유출 자료를 연속 보도하다. 과도하고 부정한 경비 청구가 폭로되며 초당적 분노와 정치 불신이 폭발하다. 고든 브라운이 경비 규정 전면 개편을 약속하였으나 노동당의 지지율과 브라운의 당내 권위가 크게 흔들리다.

5월 21일, 정부가 결국 입장을 선회해 4년 이상 복무한 구르카 참전 군인들에게 영구거주권 허용 방침을 발표하다.

6월 - 노동당이 지방선거, 유럽의회선거에서 참패하다. 다수의 각료가 경비 스캔들, 정책 갈등으로 사퇴하다.

여름 - 고든 브라운이 대규모 개각을 단행하다. 피터 만델슨이 수석국무장관으로 복귀해 브라운을 뒷받침하게 되다.


2010년


4월 6일 - 고든 브라운이 엘리자베스 2세와 면담하여 의회 해산을 건의하고 총선을 5월 6일에 치르겠다고 공식 발표하다. 영국 최초의 TV 3당(노동-보수-자민) 당수 토론이 포함된 선거전이 시작되다.

4월 28일 - 고든 브라운이 로치데일 선거운동에서 평생 노동당 지지자였던 질리언 더피라는 여성과 이민, 복지 등의 문제를 놓고 대화한 뒤 차 안에서 보좌관에게 그를 두고 '편견에 찬 여자(Bigoted woman)'라고 말한 부분이 마이크에 그대로 녹음되어 언론에 공개되다. 브라운은 BBC 라디오 생방송에서 공개 사과 후 더피에게 직접 찾아가 사과했으나 이미지와 리더십에 치명타를 입다.

5월 6일 - 총선 결과 보수당 306석, 노동당 258석, 자유민주당 57석 등으로 어느 정당도 단독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헝 의회가 되다. 고든 브라운은 연립정권 협상 여지 때문에 일단 직을 유지하다.

5월 7일 - 보수-자민, 노동-자민 연정 협상이 동시에 진행되다.

5월 10일 - 고든 브라운이 노동당 대표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발표하다.

5월 11일 - 자민-보수 연정 성립이 확실시되자, 고든 브라운이 총리직 사임을 발표하다. 고든 브라운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방문해 총리직 사임을 알리고 여왕이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대표에게 새 내각 구성을 요청하다. 13년 간의 노동당 정권(블레어+브라운)이 종식되고 데이비드 캐머런의 보수-자민 연립내각이 출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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