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 지도자를 위한 변론(?)
많은 경우 민주국가의 지도자들은 초기에 기대를 받고 말기로 갈수록 불신을 받는다.
집권기간이 길수록 그 양상은 더 길고 다채롭게 나타난다.
토니 블레어(Tony Blair)가 그런 경우였다.
초기 블레어(대강 97-2001년의 1기)는 94-97년 쌓은 젊은 혁신적 지도자의 이미지를 활용해 정치적 레토릭을 많이 썼다.
내가 영국의 유권자라면 되려 그 시절엔 불신했을 것 같다.
노동당은 18년 간이나 야당으로 있었고, 중산층에 속한 블레어는 나이도 상대적으로 젊고(44) 노동계급의 고통에 대해 잘 몰랐으며 국정 경험은 없었다.
그래서 실천보다 이미지나 말만 앞선다는 비판이 많았다.
중기 블레어(2001-2005년의 2기)는 대체로 테러와의 전쟁ㆍ이라크 전쟁 등 대외문제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을 모두 중시하면서 영국이 가교 역할을 하며 발언권을 키우기를 원했다.
또 국제주의적 시각이 있어 분쟁 지역에의 군사적 개입은 상호연결성이 강한 세계화 시대에 국익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옳다고 믿었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는 블레어의 그런 자유국제주의 대외정책에 대한 열정을 '정치인 신드롬 Statesman syndrome' 즉 정치인으로서의 신념ㆍ책임감에 집착하는 양태라고 지적하는 언급이 있다)
이라크전 때에도 미국 단독 군사적 개입도 불사하려 했던 조지 W. 부시와 달리 블레어는 끝까지 국제연합에서 명분을 얻어내고 싶어했다.
의회 토론에서도 대량살상무기의 현실적 위험보다 레짐 체인지의 도덕적 정당성을 강하게 역설했다.
말기(2005-2007년의 3기)에 가서야 그는 정부가 작동되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국정운영에서 무엇을 우선할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다큐에서 스스로 밝힌 내용이다)
또 이미지 중심의 정무적 커뮤니케이션보다 실질적 국정 수행 능력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2005년에 보수당이 회심의 선택으로 내놓은 지도자였던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신임 당수와의 PMQ(대총리질문)를 보면 그런 면모를 알 수 있다.
캐머런은 상류층 출신 젊은 엘리트로서 블레어보다 훨씬 능란하게 비꼬거나 약점을 파고드는 것을 잘 했다. ('You were the future once' 발언 등)
블레어의 답변과 응수는 대체로 구체적인 정책 내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보수당이 대안을 내지 않으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말이 되지 않는 정책을 낸다는 식으로 이어졌다.
10년 집권을 한 노련한 기성 총리가 된 것이다.
처음에 블레어는 재선까지만 한다고 했으나 이라크전으로 인한 지지도 하락 등에도 불구하고 2005년 총선에서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은 (의석수는 많이 하락했고, 약속을 깨 화가 났지만 정권을 지켜야 이어 받을 것도 있었던 재무장관 고든 브라운의 협조로)최초로 3연속 집권에 성공했다.
블레어가 선거운동 기간에 '3기를 다 채우진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는 바람에 안 그래도 불안해하던 노동당 당내 기류는 총선 후 '블레어의 사임 시점'으로 초점이 옮겨갔다.
이때의 블레어는 앞서 설명했듯 본격적인 개혁과 정책 이니셔티브에 가속페달을 밟으려 했으나 때가 늦은 것이다.
결국 2007년에 당내 의원 출신 각료들의 사퇴와 퇴진 촉구 편지 발송 등 '쿠데타'가 발생했다.
수십 년을 함께 한 제프리 하우의 사임으로 인해 촉발된 보수당 내 당수 경선으로 무너진 마거릿 대처와 양상이 비슷하다고 세간에선 말했다.
결국 블레어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노동당 대표직과 총리직을 브라운에게 이양하고 사임한다.
사실 말기의 블레어가 제일 정부수반다운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국가의 정부수반은 임기가 한정되어 있는데 익숙해질 수 있는 수습기간도 없고 정무적 위기에 대처하다 보면 임기는 금방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정작 원숙한 리더십을 갖추었을 때에는 이미 기회와 정치적 사회자본은 모두 소진되어 있는 것이다.
많은 정부수반과 리더들에게서 그런 양상이 반복되는데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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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모든 서로 다른 정당의 동료들께 정치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몇몇은 정치를 폄하하기도 하지만 그것에 참여하는 우리는 사람들이 당당한 곳이라는 것을 압니다. 정치가 많은 가혹한 논쟁들을 지닌다는 점을 앎에도, 아직 이 무대는 제 심장을 약간 빠르게 뛰게 합니다. 때로 정치가 얕은 속임수나 난무하는 곳이라 해도, 결국에는 대개 숭고한 사명을 추구하는 곳입니다. 친구건 적이건, 이곳의 모두가 잘 지내길 빕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이상입니다." [박수]
_ 토니 블레어, 마지막 PMQ 최후발언 (2007.6.27.)
(특히 마지막 부분이 인상적이었는데 원문을 옮긴다. :
I wish everyone, friend or foe, well. That is that. The end. [Applause.])
https://youtu.be/HJpp7BSKd54?si=h4jHYBRnF5Ih2FY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