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화국 이후 한국정치에서 성공한 수권세력은 언제나 중도보수를 포용했다. 중도보수를 버린 박근혜와 윤석열은 탄핵당했고, 중도보수를 외면한 노무현도 탄핵심판대에 올라야 했다. 민주당이 장기수권세력이 되려면 무게추를 더 오른쪽으로 옮겨야 한다. 진보좌파 색채로는 수권세력이 아니라 수권세력에 도전하는 대안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
이재명은 이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민주당보다 절반 이상, 국힘보다 세 배 가까이 지지도가 높은 이유는 현재 한국사회의 중도보수 세력이 (그 이유가 무엇이건) 이재명 정부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허니문 기간이긴 하지만, 수권세력으로서 출발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준수한 편이다.
민주당은 20년 가까이 친노-친문의 당이다. 정치 세력으로 비교하자면 친명과 친노-친문은 그 역사와 인재풀에서 상당한 규모 차이가 있다. 친문은 지금도 향후 10년간은 언제든 수권세력이 될 준비가 된 세력인 반면, 친명은 이제 처음 수권세력이 되어 본 그룹이다.
그래서 이재명은 내란 정국에서도 국힘 의원들 중에 내란에 반대한 이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보수 원로들이 갔고, 김상욱 의원도 갔다. 여기까지는 어느정도 상식적인 판단이다. 역계몽령이라 서사가 맞기 때문이다. 여기서 귀순한 사람들은 이재명이 직접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다닐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재명 입장에서는 그것으로 부족하다. 더 오른쪽으로. 중도보수 라인을 넘어서 최종적으로 극우만 제외하면 다 포용할 수 있는, 이제는 '내란 경범'까지도 받아들이겠다는 사인이 이혜훈 발탁이다. 여기는 대신 고개를 한껏 숙이고 들어와야 한다. 청문회에서 후미에(십자가 밟기)도 요구된다. 하지만 국힘 정치인들이라면 십자가 밟기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 탭댄스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재명은 잘 알고 있다.
국힘은 겉으로는 뚜껑이 열린 것처럼 굴지만, 아마 많은 의원들이 귀순을 물밑에서 타진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 귀순 막차는 내란재판 결과 이후 '자성의 목소리' 타이밍일 것이고, 타임라인상 내란에서 법정 최고형이 나오고 지방선거까지 끝나면 귀순자를 위한 통통배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이후에는 내란정당해산청구심판이 남아있다. 엑소더스(대탈출)가 아니라 아포칼립스(멸망)가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재명은 아포칼립스 국면에서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할 것이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고, 이 일은 이재명 개인과 지지자 모두에게 꼭 달성해야하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이재명은 웃으며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이미 기회를 줬잖아요? 탄핵 직후, 허니문 기간, 내란재판결과 직후. 세 번이나.']
이 분석은 한국정치의 지형에 대한 최신 업데이트가 별로 안 된 것이다. 민주당도 이러한 인식을 지녔지만 이건 착시 현상이다. 간단히 말해, 민주당은 수권정당이며 보수를 자임할 필요가 없고 과거에 상대적 비주류일 때에도 그런 식으로 집권하지 않았다.
민주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지 5년(남은 임기까지 전부 합하면 8년)이고 보수정당을 보다 유의미하게 누르기 시작한 것도 벌써 약 10년 전부터이다. 국정농단 및 박근혜 탄핵을 기점으로 우리 정치는 많이 변했다.
민주당이 2022년 대선과 지선에서 진 건 민주당이 원래 불리해서가 아니라, 조국 사태, 부동산정책, 미투 파동 등 민주당이 기득권이라고 더 본격적으로 인식된 후에 나타난 인테그리티의 파탄 및 위선과 무능 등에 대해 국민들이 비토를 날린 것이다.
한 정당이 이렇게 압도적 권력을 쥔 적이 우리 헌정사에 거의 없었다. 심지어 보수정당이 주류였을 때에도 대강 보수 150 대 진보 110 정도로 유지되었지 지금처럼 개헌선에 육박하는 의석을 홀로 쥐고 이렇게 오래 있던 정당은 없다.
민주당은 이미 그 조직이나 진영 전체로 놓고 보면 수권정당으로서의 역량을 갖춘 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글쓴이는 친노-친문이 그 자체로 수권 역량이 있다고 하면서도, 이 계파가 차지한 셈인 민주당에 대해서는 수권 역량이 없다는 듯한 전제로 말을 한다. 이건 논리적으로 약간 이상하다.
친노-친문과 친명은 사실상 대개 연속된 계파이다. 전자의 상당수가 후자로 넘어갔으니까. 친명의 기만적인 행태는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자기들이 편리할 때는 친노-친문을 이었다고 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친노-친문이 기득권이었고 자기들은 비주류였다고 한다.
실제로는 이재명이 중앙정치 경험이 전무한 상황에서 갑자기 실질적인 유일한 대권주자로 뛰어오르면서 친노-친문 쪽에 있던 지식인, 정치인, 관료, 전문가 등 인재풀이 대거 친명으로 합쳐진 것에 가깝다. 어떻게 보면 친명은 원래 체급보다 펌핑이 과도하게 된 셈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게 쉽게 빠질 수 있는 여건도 딱히 아니다.
김경수, 안희정, 박원순, 이낙연 등이 모두 문재인 정부 내에 아웃 당한 상황에서 기가 막히게도 유일하게 남은 대안이 되어버렸는데, 재집권을 장담할 수 없고 보수정당이 하필 윤석열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어 어떻게든 막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현실적으로는 친명은 친노-친문의 연장선에 있다. 그리고 수장인 문재인을 포함해 아무도 그런 흐름에 대해 유의미한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지지층도 거의 오염되었기 때문에 노-문을 지지하면서도 이재명에 반대했던 나와 같은 이들은 최종적으로 민주당 전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민주당이 집권하기 위해서 구태여 ‘보수’라는 점을 어필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민주당이 비주류였을 때조차 ‘보수’ 선언을 하면서 집권에 성공한 것이 아니다. 김대중이나 문재인 등이 외부적 시각에서 보면 민주당이 보수라고 볼 수도 있다고 하긴 했지만, 한국정치라는 현실적 맥락을 놓고 보면 민주당이 스스로 보수라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민주당은 최대한도로 ‘중도개혁’을 말하면서 집권해 왔다. 말하자면, 보수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누구도 믿지 않겠지만 진보라고만 하기에는 승리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진보에 더 가까운 것도 사실이므로 ‘중도개혁’이라는 타협적 용어가 채택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JP, 김종인 등 보수 진영 인사들이 가끔씩 존재감을 보였다. 문재인 정부 출범부터는 아예 보수니 중도니 하는 말을 어필하지 않아도 딱히 선거에서 불리하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진보든 뭐든 자기의 원칙을 일관되게 지켜야 한다. 아니면 새로운 비전을 자기가 분명하게 제시를 하던가. 진보였다가, 중도였다가, 보수였다가... 이재명이 도대체 뭘 지향하는 정치인인지 당최 헷갈릴 지경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잘난 ‘실용’이 무슨 성과가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직은 알 수 없다.
문재인 정부는 이재명 정부보다는 덜 심각한 사건의 반사 이익으로 집권했는데도 훨씬 높은 지지율을 더 오래 유지했다. 그리고 최소한 한동안은 보수정당을 민주당이 우위에서 여유 있게 앞지르는 양태가 지속되었다. 심지어 2020년 총선 때까지 민주당이 소수여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재명에 대한 지지도는 어디까지나 반사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뿐더러, 대선 이후 무당층-중도층은 계속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중도보수'를 이념으로 볼 때 그런 것을 지향하는 독자적 집단을 상정하는 건 분석에서 무의미하다. 여론과 통계의 차원에서 본다면 중도보수란 한동훈, 유승민, 이준석의 개혁신당 등을 지지하는 흐름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적어도 기본적으로 민주당에는 투표하지 않을 것이다.
딱히 뚜렷한 지지 정당이 없고 선거 때마다 약간씩 바뀌는 부동층이 유의미하고 중요한데, 이 측면에서 이재명이 성공한 건 이재명 자신에 대한 신용도보다는 국민의힘 측이 계엄과 그것의 수습 및 탄핵 과정에서 너무나 심각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국민의힘이 유승민이나 한동훈의 설득과 리더십을 들었다면, 이재명이 당선되긴 했겠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무슨 짓을 해도 지지율이 쉽게 무너지지 않을 정도까지는 못 되었을 것이다.
취임 시부터 현재까지의 이재명의 지지율은 일반적인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보면 양호하지만, 구체적으로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 맥락과 현재의 상황을 생각하면 오히려 생각보다 낮은 편이다.
민주당은 이제 가질 수 있는 권력의 최대한도를 가진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는 가질 필요가 없던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보수정당이 주류일 때 스스로 시대정신을 ‘가난으로부터의 탈출과 경제발전’으로 잡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가 이미 달성되었고 자신들이 주류인 상황에서 자신들이 주도하는 시대정신을 무엇으로 정의하고 나라를 끌고 나갈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글쓴이의 인식처럼 잘못된 정무적 판단을 가지고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보수 입장에서 볼 때 보수가 아니면서도 보수 어필을 하는 기만적인 행동을 하고, 반대로 진보 입장에서 볼 때 온건 진보도 아니고 아예 스스로 보수를 자처하는 근본적인 원칙 위배를 했다.
이재명 정권은 본래 민주당이 가지고 있던 ‘우리가 보수여야 한다’라는 생각을, 아직 국민 전체 내지 충분한 다수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음에도 ‘우리가 보수다’라고 먼저 치고 나간 것이다.
그런데 2016년 안팎에서 성인이 된 Z세대들의 관점에서 보면, 민주당은 안 그래도 위선적인 진보 기득권인데 이제는 아예 보수를 자처하니 정말 기득권으로 볼 여지가 더욱 커졌다. 이건 보수 Z세대건 진보 Z세대건 똑같다. 민주당은 이념 정당이 아니라 세대 정당으로 밖에는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민주당은 도덕적 우위에 취해 있는데, 심지어 겉으로는 여전히 민주, 통합, 실용, 중도 이런 용어를 쓰기 때문에 마치 정말로 포용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실체를 민주당식 감성 렌즈를 빼고 보면, 민주당에게 국민이란 어디까지나 자기들을 지지하는 절반의 국민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이전 민주당계 정권과 비교해 정책이 크게 바뀐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뭔가가 바뀐 것처럼 마케팅을 한다.
오히려 보수 진영 일부 인사들이 항복한 것이야말로 민주당이 더는 비주류가 아니라는 점을 방증한다. 민주당이 정말 비주류라면 이런 현상이 왜 있겠는가? 국민의힘이 너무 비합리적이라는 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조갑제나 정규재를 무슨 보수 원로라고 하는 건 코미디 같은 얘기고, 김상욱/이혜훈/권오을 등은 과연 그게 정말 신념을 주체적으로 변화시킨 건지 아니면 변화하는 대세에 항복한 것뿐인지 의구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석연의 경우는 약간 후회하는 마음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매우 위험하다고 본다. 유의미한 진보정당은 원외로 밀려났고, 아직은 가정에 불과하나 정말 민주당이 보수정당을 잠식해 들어간다고 하면 그건 그동안 무시해 온 국민의힘의 소위 ‘독재’ 주장이 슬슬 아닌 것만은 아니게 되는 것이다.
민주당 혼자서 개헌선에 육박하는 의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도 모자라 범여권이 국민의힘 의석의 절반을 가져간다고 한다면? 조국혁신당은 민주당이라는 텐트 안에서의 범여권 정당이고 민주당의 브레이크 또는 액셀러레이터일 뿐이다. 야당이 말 그대로 무의미한 국가가 된다면 ‘민주독재’라는 말이 정말 성립하게 된다.
결국 모든 건 이제 국민의힘에 달렸다. 국민의힘이 개심하고 혁신을 하거나, 아니면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가 민주당의 기만적인 민주주의 왜곡 흐름에 그대로 쓸려나가던가.
글쓴이의 글 말미의 분석은 일리가 있지만, 그게 현실이 되면 어떨지에 대한 규범적 판단이 필요하다. 사회를 분석하거나 이해하거나 평가하거나 하는 입장은 우리 자신이 그 맥락 안에 있다. 우리 스스로도 이해관계자고 행위자가 되는 것이고, 관찰자라는 것은 절반 정도는 관념적/윤리적으로 그렇거나 그래야 한다는 의미일 뿐이다.
이재명이 홀로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되는 순간을 어떻게든 막지 않으면, 민주주의라는 간판을 달고 민주당이 정말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하고 휘두르는 상황이 올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