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에 관한 좀 더 깊은 생각

by 남재준

젠더(Gender)라는 개념은 ‘사회적 성’으로서 섹스(Sex)라는 ‘생물학적 성’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이 정의는 젠더와 여성주의 등에 관한 논쟁을 할 때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양자를 혼용하면서 논쟁을 하게 되면 내용이 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성주의에 관하여 논의하려면 젠더라는 개념에 관하여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 개념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면 논쟁의 차원/전선은 옮겨진다. 젠더를 섹스와 구분하는 것에 관한 논쟁이 된다.


이 글에 나오는 내용들은 단지 고등학교 사회와 문화나 대학교 사회학개론 등에서 이미 다루는 내용들이다. 많은 이들이 사회와 문화(舊 사회·문화)를 이수하거나 수능 선택과목으로 고르면서도 젠더 논쟁이 엇나가는 것을 보면 약간 의문이 있다.

(사실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도 아닌데.. 다만 개조식으로 정리되어 외우는 데 지나지 않고, 보통 시험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사회불평등의 양상이라는 부분에서 그냥 개념만 정의하는 수준으로 넘어가는데, 이 중단원은 기본적으로 숫자 장난 문제를 내는 데 쓰인다.)


내 생각으로는, 젠더는 섹스와 구분해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우선, ‘실제로’ 사회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구분되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무의미하다. 굳이 따지자면, 모든 사회적인 것은 결국 자연적인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인간과 사회에 관하여 초점을 두고 연구하는 것이 기본적인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주제가 된다.


여기에는 꼭 ‘인간이 특별하다’라는 명제가 전제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자연과학을 연구한다는 것이 반드시 자연에 어떤 각별한 규범적 가치를 부여해 대우하는 것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점과 같다. 물론 인간이 고유의 특질을 가진 존재인가 하는 질문 자체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중요한 연구 주제이기는 하다. 환원주의적으로 본다면, 그냥 인간을 생물학적으로만 설명하고 싶기도 하겠지만 과거에 우생학이라던가 이런 시도들의 실패는 이미 선을 너무 많이 넘었을 뿐 아니라 실증주의가 완벽하지 않음을 방증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그렇다면 인간을 초점에 놓고 볼 때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취할 것이냐 아닌가가 중요하다. ‘사회는 개인만으로 구성된다.’라는 인식을 전제하고 출발할 것인가 아닌가 이다. 일견 타당해 보이기는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경험적으로 감각되는 존재를 제외하고는 대개의 제도니 구조니 하는 것들은 전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따진다면 국가, 종교, 법 등 비가시적인 것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일관적이다. 그렇지만 실제 인간 생활은 그렇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것들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정교화하고 발달해 왔다. 가시적인 발명품이나 생산물 등을 제외하고, 자연과학 이론 같은 것조차도 실은 인간이 자연을 인식하는 틀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천과 해양 등을 구분하지만, 이건 우리가 구분하는 것일 뿐 원래 자연이나 자연물에 그런 구분이나 이름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아주 엄격한 실증적 차원에서 본다면 일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 전제를 밀어붙일 실익 또는 의미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방법론적 개인주의가 아니라, 일단은 비가시적이지만 분명히 인간의 집합적 관념에 의하여 존재한다고 보는 것들이 실재한다고 가정하고 시작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제 더 구체적인 젠더에 관한 논의로 들어가 보겠다. 언뜻 성별이라는 것이 생물학적 구분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적어도 ‘남성성, 남성적인 것, 남성들의 문화’ 또는 ‘여성성, 여성적인 것, 여성들의 문화’ 등은 그냥 생래적으로만 설명하는 건 문제가 크다. 왜냐하면 객관적으로 그리고 실제로는 그러한 느슨한 인식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동성은 기본적으로는 같은 생식기관의 구조를 가진다. 그런데 남성성과 여성성과 같은 것들은 이러한 구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보기에는 매우 모호한 개념인 데다, 그것에 부합하지 않거나 최소한 부합하는 건지를 고민해야 하는 경우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규범적/감정적으로 이상하다’와 ‘다르다’를 섞어버린 것으로서, 결국 젠더와 섹스의 혼용은 ought를 is로 바꿔버린 경우에 해당한다. 일단 ‘규범적/감정적으로 이상하다’와 같은 요소가 포함되는 순간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라고 보기 어려워진다.


결론적으로 자연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과 ‘실제로’ 분리되느냐는 별론으로 두고, 사회적인 것을 ‘별개로’ 논의하는 건 분명히 유의미하다. 그리고 젠더는 ‘사회적인 것’에 해당한다. 다만 모든 사회적인 것들 중에 젠더는 가장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이어서 우리가 이를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 늦었을 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취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사회적인 것’에서 ‘사회’란 단지 ‘개인의 총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사회적 관계, 사회제도, 사회구조, 문화 등의 독자적 존재가 상정된다. 그리고 젠더는 이러한 사회의 구성요소 중 하나에 속한다.


사회적 관계, 사회제도, 사회구조, 문화 등은 사회화(Socialization)를 통해 학습되는 것이다. 아주 세부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식사 예절과 같은 것이 그렇다. 이는 문화의 구성요소 중 비물질문화이고 또한 비물질문화 중에서도 제도(규범)문화에 속한다. 젠더는 의식적으로 배우는 점도 있겠지만 옷이나 행동거지나 놀이나 장난감이나 주위 특히 부모 등의 언행 등에 의해 자연스럽게 체득되기 때문에 더욱 인위적으로 학습된다는 점을 의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최근에는 젠더 개념 자체가 사회적 주목을 더 받게 되어서 아예 노골적으로 남자라면 또는 여자라면 과 같은 표현을 예전보다는 잘 쓰지 않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젠더는 여전히 강력하게 실재한다.


다른 사회적인 것들처럼, 젠더가 사회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반드시 부당하다거나 정당하다거나를 함의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만, 규범적 차원에서 본다면 젠더로 인해 누군가가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경우는 문제가 된다. 여기서 부당한 대우는 단지 우리가 뚜렷하게 인식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문화나 구조에 스며들어 있는 요소들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젠더로 인한 사회문제는 단지 소위 ‘여성혐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성에게 남성성을 강요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회문제가 된다. 그리고 여성혐오라는 개념은 여성이라는 젠더의 사회집단에 대한 직접적 감정으로서의 혐오만 두고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는 성평등이 많이 진전되어서 여성의 교육이나 보건 등의 차원에서는 성취를 이루었다. 그런데 세대를 본위로 볼 때, 아직 대강 40대 이상의 여성들은 상당 부분 슈퍼맘이 되어야만 하는 구조적 상황에 처해 있거나 자신이 민주적 가장이라고 착각하는 위선적인 남성들의 권위에 눌려 있다.


여성혐오가 문제인 진정한 이유는, 대개의 경우 그것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문제라고 인식 자체를 못 하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상당 부분 문화나 사적 영역이어서 정책으로 해결하는 건 어렵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렇게 사시오.’라고 강제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니까. 그러니 사회적 담론에서의 인식이 중요하다.


젠더의 차원에서 보면 역사를 이해할 때도 오해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역사에서 활약한 여성들의 상당수는 어디까지나 ‘남편의 권위에 기대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살리카법(Lex Salica)에서 여성의 왕위 계승이나 여계 왕손을 불인정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성이 섭정을 하거나 하는 것은 황후나 왕비나 대비나 태후나 그런 입장에서였지만, 예를 들어 부왕과 모후의 입장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동양에서는 기본적으로 ‘아녀자가 정사에 참여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나’가 꼭 전제되었다. 일본에서는 현재에도 여성궁가 창설 문제가 논쟁이 되고 있다. 우리의 호주제도 일본의 가(家) 제도에서 비롯된 것인데 일본만큼 사적 차원과 별도로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보수적인 나라는 흔치 않으니 사실 여성 천황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성이 권력을 잡은 것도 사실이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애초에 여성혐오나 젠더 등의 제반 개념들이 단지 가시적이고 실증적인 것의 차원에 묶여 있지 않다는 점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젠더는 기본적으로 사회문화적 개념이다. 그러니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도 여성이 권력을 잡았다는 사실보다도 그 권력의 원천이나 권력의 배후에 있는 구조나 문화나 제도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신격화된 여성이나 여신조차 '신들의 왕'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는 모통 '모성적' 존재로 상정된다. 당연히 그렇지 않은 여신들도 있지만 그들은 '의외인', '이단적인' 존재 등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에서, 여성혐오라는 개념은 여성이라는 집단에 대한 직접적 감정으로서의 혐오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반드시 개별 남성에 대한 도덕윤리적 비판 등으로 직결되는 것도 아니다. 남성들이 ‘선의’로 여성들을 ‘보호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여성의 주체성을 상실케 하고 심지어는 집착과 데이트 폭력이나 가정폭력과 같은 범죄로까지 심화하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젠더와 같은 개념은 반드시 어떤 실천적 함의나 규범적 판단 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니 젠더나 여성주의에 관한 논쟁을 할 때, 개별적인 남성들이 반드시 ‘피해 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많은 남성들이 이 문제에 대해 약간이라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때가 많다.


단지 아예 듣고 싶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젠더에 관한 이해는 일상적 젠더 간 관계를 개선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나 싶다. 앞서 언급했듯 젠더라는 개념을 구속구로 이해하기보다 그러한 차이가 실제로는 어디에서 비롯되며, 내가 나도 모르게 폭력이 될 수 있는 행동을 한 것은 아닐까(꼭 신체적 폭력이 아니어도) 하는 반추를 해볼 수도 있다. 진정한 젠더나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도 아마 이러한 데에서 비롯될 것이다.


한편 젠더가 그 자체로 자연적이지(‘당연하지’) 않고 반드시 부당성 또는 정당성 등을 함의하는 것이 아니라면, 트렌스젠더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젠더가 필연적인 게 아니면 젠더를 전환한다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며, 또한 부당하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라고 할 수도 있다. 또는 젠더가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을 인정하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트랜스젠더를 수용하기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젠더의 구분이 오랫동안 형성되어 오면서 사회안정에 기여한 측면도 있고, 화장실 사용 등 아주 구체적인 생활에서의 구분의 실익도 있는 상황이라는 점 등이 근거가 된다. 서구에서도 아직 이 부분에 관하여서는 다양한 논쟁이 있는 것 같다. 젠더라는 개념 자체로부터 트랜스젠더의 존재 가능성도 나올 수 있는데, 젠더 개념으로부터 바로 의심할 것 없는 규범적 결론이 나오기는 어려우므로 약간 더 복잡하다.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다. 성적 지향성(e.g. 동성애)과 마찬가지로, 성적 정체성 즉 젠더도 자기 마음대로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되는 것’에 가깝지 않은가 싶다. 왜냐하면 만약 그게 선택이 가능한 것이면 그렇게 할 실익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서구에서의 상황에서 보듯이, 성적 정체성은 어떤 면에서 성적 지향성보다 훨씬 규범적/구조적 압력이 심한 경우에 속한다. 바꿔 말해,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게다가 성전환이라는 것은 신체적 고통도 수반하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한다면, 젠더는 사탕 맛을 고르듯이 쉽게 고를 수 없는 것이다. 사회적인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개인에 대한 압력이 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렇게 느끼고 최종적으로 모든 비용을 감수하고서라도 전환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막을 수는 없지 않을까 싶다. 이미 가정을 형성한 후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법원에 오기 전에 이미 엄청난 내적/외적 차원에서의 심리적 고통과 갈등을 거쳤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이렇게 된 상황에서, 억지로 정정을 불허한다는 것은 별로 실익이 없다.


또 앞서 언급했듯이, 젠더 자체는 서구에서조차 아직 그 전환의 규범적 지위나 처우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만약 트랜스젠더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젠더 자체가 근본적으로 흔들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동성애를 비범죄화하고 동성혼을 법제화한다고 해서 이성애나 이성혼 중심의 문화에 거대한 지각 변동이 생겼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물론 다수자인 사람들은 불편할 수 있겠지만, 그걸 막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나 성전환자 등이 자기의 지향성이나 정체성을 부인하고 연애나 결혼을 하는 경우에 결국 그 관계를 감당하지 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와 심리적 고통 및 상처를 남긴다. 그 당사자에는 본인만이 아니라 연인ㆍ가족도 포함된다. 차라리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정체성이나 지향성을 인정하는 경우, 적어도 그런 실존적/심리적 문제들은 덜할 수 있다.


다만 성중립 화장실 논쟁 등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좀 더 가시적이고 인위적으로 구체적인 생활 시설 등을 트랜스젠더인 이들을 위해 안배해야 하는 문제가 부상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동성애의 경우보다 트랜스젠더의 경우 ‘Closeting’의 난이도가 약간 더 있지 않을까 짐작한다. 이 때문에 생기는 구체적 문제가 아닌가 싶다. 이 지점은 좀 더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안타깝지만 트랜스젠더 권리 보장의 일부 진전과 Closeting의 유지를 일단은 맞바꿀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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