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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석연 전 법제처장의 최근 행보에 관하여
나는 이석연 전 법제처장이 이재명 대통령을 지원했거나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직을 수락한 것을 부정적으로 본다. 만약 법적 관점에서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계엄과 탄핵 국면에서는 현실적으로 이재명 대표가 좋건 싫건 구조적, 상황적으로 그에게 헌정 질서의 안위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아주 효과적으로 성공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다음 국면에서 대통령직에 올라야 하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이석연 법제처장이 종래에 가져온 입장들이 민주당 측의 입장들과 부합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국민통합이니 하는 추상적인 감정으로 이런 문제를 결정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해 어느 후보도 특히 이재명과 김문수 두 양대 정당의 후보의 경우에는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양대 정당이 민주주의와 헌정 질서를 서로 다른 차원에서 위험한 한계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어느 정도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경우 막을 수 없는 압도적 다수의 민주당이 나라를 끌고 가게 되는 것이었다.
민주당이 독재를 한다는 국민의힘의 오버하는 프레임의 견지에서 나오는 논리가 아니라, 최소한의 견제 장치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문화의 가장 큰 폐단 중 하나가 자제와 절제가 없다는 점인데, 이건 아무리 제도적 장치를 늘려도 문화와 태도가 자리 잡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와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잠식한다. 그러니 최소한 단기적으로 볼 때, 다당제나 절제가 있는 양당제로 갈 수 있는 조건이 아닌 한 한 정당이 국회와 정부를 모두 장악하는 상황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
사법부나 언론 등은 간접적이거나 최소한도에서 견제를 하게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대선에서 국회 의석수가 변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견제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이재명 후보든 누구든 힘을 싣지 않는 것이 맞았다고 본다. 더구나 그 자신이 그전의 입장과 크게 바뀐 것이 없다면 더더욱. 이건 이석연 전 법제처장 개인에게 있어서는 일관성의 문제이기도 했다고 본다.
대통령 직속인 한 국민통합위원회 같은 건 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위원회를 새로 구성한다고 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국민통합을 이루어 내겠다는 것인가? 이재명은 그 자체로 대선 사후적으로라도 ‘통합적’ 지도자가 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이변이 없는 한 이재명은 사람들의 호오가 극명히 갈리는 지도자로 남을 것이다. 그런 지도자 하의 위원회는 별다른 역할을 하기 어렵다.
설령 이재명 대통령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위원회를 하나 구성한다고 해서 국민통합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국민통합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국민통합은 정치지도자의 리더십, 정치문화, 사회적 바이브, 문화적 경향 등 여러 가지가 자연적, 유기적으로 합쳐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건 위원회 하나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2. 법에 관한 기본적인 생각
이렇게 말하면 충격적일 수도 있겠는데, 나는 법의 이념으로서 정의(正義)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있다. 바르고 옳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 많은 시각으로 나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정의가 구체적 규정에 반영된다는 차원에서는 유의미할지 몰라도, 실제로 그것을 사법적 차원에서 직접 적용하거나 판단하는 일은 없다는 점이다.
또 다른 이념인 법적 안정성은 실무에서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는 듯하지만, 이것은 다소 수단적인 목적이다. 법적 안정성이 본질적인 목적이 되면 부당한 일도 있을 수 있고 실제로 이를 시정해 나가는 것이 주요한 과제이기도 하다. 합목적성도 비슷하다. 예를 들어 어떤 법률의 목적은 사법적 판단에 반영될 수는 있긴 하지만 일차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 성문법을 기준으로 볼 때, 이러한 유형의 법은 쉽게 제정/개정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오래된 법일수록 입법목적은 현재와 과거 사이의 시대적 맥락의 괴리가 커진다.
결국 입법목적은 정확히 입법자의 그 당시의 목적만을 가지고는 판단할 수 없고, 사법에 의해 현재적 가치판단이 반영된 재구성이 불가피하다. 현재의 입법일수록 이러한 경향은 덜할 수는 있는데, 모든 입법목적이 일반적으로 그리고 일차적으로 법의 목적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그 자체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법의 이념이 되는 것은, 내 생각에는 구체적 타당성이다. 내 생각에는 이것을 조리(條理)라고도 볼 수 있다. 조리는 거의 쓰일 일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최후의 법원(法源, 정확히는 민법(제1조).)이다. 정의는 현실적으로 여러 차원이 있지만, 결국 사법에서는 구체적인 타당성, 다시 말해 조리 있는 절차와 판단을 통해 구현될 수 있다. 또 합목적성에서의 목적은 결국 입법 당시의 목적을 법해석에 반영할 때 그 자체로 또는 재구성된 것이 조리에 맞아야 한다. 법적 안정성은 최종적으로는 결국 조리에 복무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이제까지 국가기관의 공표 등을 통한 정당한 신뢰에 근거한 개인의 이익이 보호되지 않는다면 부당하기도 하지만 법적 안정성이 흔들리는 것이기도 하다. 정당한 신뢰를 보호한다는 것은 본질적, 궁극적으로 조리에 부합하는 일이다. 법규범의 세밀하고 타당한 해석, 사실관계의 엄밀하고 논리적인 재구성, 그리고 정합적인 포섭 등은 그 자체로 법, 그리고 사법의 이념이라고 할 만하다.
물론 조리 역시 추상적이고 해석을 요하는 개념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무엇이 더 조리 있는지를 두고 다툴 수는 있으며, 완벽하게 정의롭거나 모두가 수용 가능한 결론은 있을 수 없어도 감정적으로는 수용하기 어렵지만 조리의 측면에서 더 반박하기 어려운 결론은 있을 수 있다.
2. 최근 정치권의 사법에 관한 태도의 문제에 관한 생각
사법이 어떤 문제에 대해 법적 판단을 내릴 때, 기본적으로 그 전제와 틀은 구체적 사건일 수밖에 없다. 구체적 사건에 관한 규범과 그 해석이라는 전제를 판시할 때, 일반적인 사회문제 등에 대해서도 규범적 선언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선포권 행사의 헌법적 결론은 이미 그의 탄핵소추에 관하여 심판할 때 도출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윤석열 전 대통령을 비롯해 이번 사건에서 형사적 책임을 져야 할 소지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형사적 처리는 이제 사법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우리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제도/구조’에 대한 신뢰를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민주당은 사실은 개별 판사에 대한 신뢰의 문제인 것을 사법이라는 제도/구조에 대한 신뢰의 문제로 엮고 있으므로 문제가 된다. 제도/구조에 대한 신뢰는 단지 ‘사법이 믿을 만하다’라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사법의 독립 보장이 ‘법적 분쟁과 사건을 처리하기 위하여 필수 불가결한 원리’라는 점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개별 사건에 대한 개입 소지를 만드는 것은 어떤 식으로건 사법부 독립의 침해가 될 수 있어 엄격하게 통제되어야 한다. 민주당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문제를 자기들의 정의에 근거해 감정적으로 밀어붙이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사법의 독립 나아가 권력분립 자체를 흔들 수 있는 행보를 보였다(소위 ‘내란전담재판부법’).
모든 사안을 처리할 때, 내가 피적용자의 입장이 되어서도 그것을 수용하게 되겠는가, 또 제도/구조 전체의 운영이나 안정적 지속 등의 측면에서는 어떠한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민주당은 계엄 사건의 처리에 관하여 계속 개별 판사를 공격하고 나아가 사법부 자체에 대한 제도적 신뢰를 훼손함으로써,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에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 이는 헌법에 부합하는 사후 수습이라고 보기 어렵다. 더구나 이러한 민주당의 행보는 사법개혁의 명분도 갉아먹고 있다. 사법개혁은 입법이 요구되므로 정치권에서 주도할 수밖에 없으나, 동시에 여의도의 의도가 과연 자신의 정치적 이익 내지 단순한 편견 등에 기반한 건 아닌지 상시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아무리 의도가 사법제도의 합리화에 있다고 하더라도, 외부에서 보기에는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합리적이므로 사법부와의 논의가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기득권적 시각이 섞여 있는 의견은 배제하는 등의 프로세스가 이루어진다. 문제는 민주당이 사법부에 대한 존중과 견제의 균형을 전혀 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3. 법왜곡죄에 관한 생각
법왜곡죄(Rechtsbeugung)는 기본적으로 위험한 죄목이다. 왜냐하면, 사법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수사나 공소제기, 재판 등의 제반 사법절차에서 나타나는 법의 ‘왜곡’이 아주 명확하게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하는 식으로 드러날 수 있다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사법절차의 운영이 그렇게 기계적인 것이었다면, 애초에 법학도 법학자도 법조인도 불필요했을 것이다. 사소하거나 자명한 사안도 있지만, 많은 경우 법적 문제들은 해석의 여지를 약간이라도 남긴다. 어느 것이 옳은지를 결정하는 가치판단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규범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실관계조차도 이미 불가역적인 과거를 현재에 재구성하는 것이고 거기에도 가치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
또 매번 형사법 입법과 관련해 논쟁이 되는 부분이지만, 과연 법왜곡죄가 과도하게 포섭 범위가 넓을 여지가 없는지 그리고 설령 법의 본질상 오판 등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고 그것을 법적으로 다툴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을 감수할 정도로 입법을 해야만 하는 제도인지 숙고해 보아야 한다(예를 들어, 사법부가 대통령비서실과 사전에 모의하는 등의 행위만을 포섭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게다가 이 죄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대개 법조 공직이 행위주체가 되는 신분범이다. 법왜곡죄 자체가 비록 판결에 대해 직접 판단하지 않더라도 사실상 재판에 대한 재판이 되고, 사법절차에서 이것이 법왜곡죄가 되는지 안 되는지를 계속 의식해야 하므로 사법의 합리적 운용을 저해한다. 정치적으로 남용될 수도 있고 이는 사법의 독립 침해 문제와 직결된다.
구성요건을 구체화한다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범위에서 법왜곡죄가 적용된다는 것인지를 특정하는 것도 어렵다. 또 법왜곡죄를 적용한 사법절차에서의 행위들이 법왜곡죄가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사법이 위법한 행위를 해서 논죄한다고 하면 그 주체는 다시 사법이 된다.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형법 제123조) 등이 비록 한계는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경우에 적용될 수 있다.
4. 국민주권은 완전한가
‘국민이 법조인보다 법을 더 잘 안다’라는 말은 감성적으로 그럴듯해 보이고 무엇보다 민주주의에 부합해 보인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내가 보기에는 아니다. 계엄 이후 절차를 보면 법조인 출신 정치인들이 법을 자기 이익대로 해석했지만 그건 정치인으로서 정치공학의 문법과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국민들은 점점 더 미묘하게 편이 나뉘어져 갔고, 결국 탄핵의 찬반 여론이 대강 6:4가 된 상황에서 정작 헌법재판소의 결론은(그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8:0이었다. 법조인이 완벽하다거나 국민이 어리석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라, 국민이 완벽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 법과 법치주의는 민주주의를 지키기도 하지만, 민주주의를 견제하기도 한다. 헌법은 자유민주주의를 국가와 정치의 원리/체제로 선언했고 통치구조를 민주정치체제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법치주의, 입헌주의, 기본권, 사법 작용 등을 통하여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했다. 내 생각으로 전체적으로 법에서 민주주의보다 중요한 건 ‘균형’과 ‘조리’이다. 오늘날 이것이 더 가시적으로 중요해진 이유는, 과거에 큰 틀에서 이러한 내용요소들이 민주주의에 자연히 내포/전제된 상태에서 언급되었으나 이제는 그것들을 민주주의와 분리해서 볼 필요가 커졌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과연 지금 실현되고 있는 민주정치가 제대로 법치주의 등을 반영하거나 그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가 의문시된다.
또 법 특히 사법은 언제나 유보적이고 절제적이며 신중하다. 이해관계 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동시에 모든 것이 불완전한 경우가 다반사인 상황에서, 최종적인 규범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입장이 되는 경우, 사실관계나 가치판단에 대해 쉽게 단정하거나 하는 것을 극도로 삼갈 수밖에 없다. 한 번의 오판이 굉장히 치명적이고 경우에 따라 불가역적인 피해를 가져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법은 보수적이고, 보수적이어야 한다.
최근의 정치문화나 정치와 사회의 경향이 민주정치체제에서 나타난 현상인 이상, 이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기도 하다. 정치체제는 공동체의 정치적 의사결정을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정하는 시스템일 뿐이다. 그 자체로서 규범적 온전성까지 담보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 정치체제를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가의 규범적 원리와 그것의 준수와 실천이 요구된다.
정치체제에서 주권의 소재가 어딘가의 문제는 거의 필연적으로 규범적 판단이 들어간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체로 주권자는 성역이다. 그것이 왕이건, 귀족이건, 국민이건. 민주주의 체제는 다른 체제보다는 모든 개인의 의사를 존중할 수 있는 여지가 제일 큰 정치체제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 자체가 항상 모든 개인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한다는 법은 전혀 없다. 민주주의는 쉽게 선동적이거나 참주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많다.
모든 정치체제는 인간이 구성하는 것이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 주권자도 인간이므로 누가 되었건 간에 잘못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주권자는 그 자체가 모든 권위와 권력의 원천이 되어서 규범적 성역이 된다. 정치인을 선택하는 건 국민인데 정치인이 잘못하면 백이면 백 정치인이 잘못한 것이고 국민은 잘못한 게 없는 것처럼 된다. 과연 그러한가? 내가 보기에는 국민이 항상 면책되는 경우 중에는 마치 봉건 시대에 사실은 왕이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을 왕이 성역이므로 신하가 대신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과 같은 경우들도 상당하다.
시원적 권력이 되는 주권자에게는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으므로, 다른 누가 아닌 주권자 스스로가 책임감과 성찰하는 자세 등을 가질 필요가 있다. 군주가 성군이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민도 성찰적 시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대 대의민주주의의 여러 가지 장치들은 모두 인간이 운용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들은 공동체와 주권자의 성찰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정치체제는 그 자체로 완결된 완벽한 것일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성찰과 시정이 원리로서 반영되어 가능한 체제인가 그렇지 않은 체제인가가 제일 중요하게 된다. 이 점에서 나는 현대 민주주의의 유지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나 동시에 매우 비판적이다. 민주주의는 지속적으로 검증 받고 견제받아야 한다. 그럴 여지가 없는 경우 민주주의 자체만으로는 아무 소용도 의미도 없다.
5. 헌법적 가치와 개헌에 관한 생각
헌법은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를 동시에 포괄하면서 그 둘 사이에서의 균형을 유지한다. 헌법은 개인주의, 인본주의와 자유주의에 근거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사회적 시장경제나 사회권 등을 함께 규정하고 있다. 그러니 결국 기본 체제나 원리 그 자체보다도 전체적으로 헌법이 지향하는 것은 인본주의적 가치에의 복무이며 통치구조건 기본권이건 하위법이건 전체 법체계가 통일적으로 그러한 방향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그러한 가치에의 복무인가에 대해서는 참으로 여러 가지 관점이나 방법에 의하여 가능하다. 다만 그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무엇이 인간존엄성, 자유, 민주주의 등에 복무하느냐는 다양하지만, 무엇이 거기에 반대되느냐는 명확하다. 그리고 이 지점부터가 사법적 통제의 대상이 된다.
개헌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두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첫 번째는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기본권 개헌이 반드시 주가 되거나 통치구조 개헌에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개헌 절차가 정치권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기보다 국민의 숙의를 통해 개헌 자체가 그간 파괴된 민주정치체제의 자유주의적 원리를 복원하고 상호 공존과 관용을 되살리는 과정으로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단지 통치구조 개헌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정치적 거래나 필요에 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 본질적으로 통치구조는 어느 유형이 되었건 정치문화가 건전하지 않은 한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국민 개인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므로, 통치구조 개헌에만 사회적 비용을 할애한다는 건 국가-사회적 집중력의 낭비이다.
6. 변호사 등 공직의 윤리와 사명에 관한 생각
변호사가 대체로 서비스업의 하나처럼 여겨지고, 공공성보다 수익성을 중시하는 것은 최소한 일정 부분 로스쿨 제도의 책임도 있다고 본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로스쿨 제도는 구조적으로 자기가 힘겨운 배경을 가지고(꼭 계층이 아니더라도), 사람의 인격에 대한 존중과 법이라는 공적 질서/시스템의 수호를 지향하는 법조인들을 배출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변호사나 나아가 국회의원 등 모든 공직은 기본적으로 자기의 영달이나 부귀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아예 나아가서는 안 된다. 이건 단지 도덕윤리적 차원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변호사나 국회의원 등이 하는 일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과 인생에 영향을 미치므로 실존적/현실적 차원의 공감이나 이해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이다. 변호사 등이 되고 싶다는 욕구는 일차적인 것이고, 결국 그 일의 실제와 의의에 대한 부분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는 다른 직업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결국 타인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변호사와 같은 직업에 대해서는 최우선으로 그렇다. 이는 공법이냐 사법(私法)이냐 등을 초월하여 법 자체가 가지는 본질에 기인한다. 법은 메커니즘/시스템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가치를 내포하며 무엇보다 강제력을 수반하는 사회규범이기 때문이다.
또 법은 혁신과 효율성 등의 가치가 지배하는 시장보다 시간이 흘러도 변화하지 않는 가치를 보호하면서 이를 급변하는 현실에 적응시키고 민간 행위자들을 뒷받침하면서 동시에 규율하는 역할을 한다. 법은 사회명목론과 이기주의에 기초해서는 존립할 수 없으며 존재 의의도 없다. 모든 민간 행위자들은 그 자신이 이해관계에 있거나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민간 행위자였다가 법조인이 되어야 하는 경우, 그 이해관계에 자연히 더 기울어 생각할 수 있다. 이는 균형이라는 법적 대의에 치명적이다. 이 점에서도 개인적으로는 로스쿨 제도의 설계 원리 자체부터를 부정적으로 본다. 따라서 만약 미국과 같이 상당 부분 금권 등에 의하여 잠식되는 경우, 형식만 민주주의나 법치주의일 뿐 실제로는 이미 끝난 게임의 승자들을 보호하고 각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직업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 사회나 경제 무엇보다 사람들의 일상의 규범적 기반 자체가 붕괴하는 현상으로 귀결된다.
결론적으로, 법조인들은 특권을 줄이건 대우를 줄이건, 생계유지가 가능한 정도로만 보수를 유지하는 편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