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개념이나 용어에 약간 더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문학,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매우 그렇고 이는 양적 방법이냐 질적 방법이냐를 불문한다고 본다. 양적 방법이라 하더라도 조작적 정의를 전제하므로, 애초에 자료의 조사와 분석이 전제한 기본적인 개념적 틀이 얼마나 타당성이 있느냐는 중요하다. 내 주관으로 볼 때 몇 가지를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정치의 생활화와 생활의 정치화 / 생활정치, 생활자 우선 정치
생활 정치(生活政治, Life Politics)라는 말은 유물론이나 계급론, 이념과 거시적 구조 등을 본위로 하는 20세기가 거의 지난 뒤, 탈냉전을 맞이하고 새천년을 앞둔 1990년대에 부상했다. 이 개념은 기본적으로는 ‘정치의 생활화’, ‘생활의 정치화’ 사이에서 모호하게 쓰인다. 애초에 두 개념 자체가 다소 모호하고 유사한 개념이긴 하지만 구분은 필요하다.
정치가 생활화된다는 것은 일상인들도 사회운동, 입당, SNS 게시 등을 통해 종교생활, 취미생활처럼 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통상의 대의민주정치 하에서 정치가 제도권의 권력 행사나 투쟁만이 아니라 주권자인 시민의 참여가 강화된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생활이 정치화된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돌봄, 복지, 교육, 노동, 보건, 소비, 문화, 금융 등 다양한 영역들이 학생, 주부, 직장인, 프리랜서, 자영업자 등 일상인, 생활인의 관점에서 중요 정책의제로 상정된다는 의미이다. 보통은 외교, 국방, 재정, 산업, 정무(주로 정당과 국회에서의 역학 관계) 등이 위주가 되는 거시적 차원에서 정치의 초점이 미시적 차원으로 내려온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사실 둘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상인들이 정치에 적극 참여할 때 그 계기가 자신의 생활에서의 문제가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리고 본래 정치권에서 다루는 사회문제의 상당수는 결국에는 국민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어느 것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약간 뉘앙스가 달라질 수도 있다. 생활정치라 하면 정치의 생활화를, 생활자 우선 정치라 하면 생활의 정치화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생활이라는 용어가 실제 정치의 맥락에서 많이 사용된 일본의 경우를 보면, 민주당(1998-2016)은 시민참여와 사회운동을 중시하면서 동시에 복지나 보건 등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공명당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불교(창가학회)와 연계된 중도정당으로서 복지, 보건, 교육 등 생활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민주당은 생활정치와 생활자 우선 정치를 함께 주장한 것이고, 공명당은 생활자 우선 정치를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약간 더 구체적으로 들어갔을 때 어느 쪽으로 더 기울여 이해할 수 있느냐의 차원에서 실익이 있다.
2. 보수
보수주의(保守主義, Conservatism)는 말 그대로 종래의 전통, 질서, 구조, 제도, 문화 등을 지키려는 경향을 지닌 사상을 말한다. 서구에서는 오늘날 미국식의 사회자유주의(Social Liberalism, 진보적 자유주의 Progressive Liberalism)가 아닌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라는 의미에서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경계가 흐릿하다. 또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보수정당들은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고 당명에 자유가 유난히 많이 들어간다. 그렇다면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와 같은가?
실제로는 그렇다고 보기 어렵고, 자유주의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보수주의는 근대 이후 자유주의가 기성 체제/원리가 되면서 그것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등장한 한 유형에 가깝다. 보수주의의 사전적 정의로 돌아가 보면, 본래 보수주의가 처음 등장했던 것은 18세기 말~19세기 초의 시민혁명에 대한 반대 국면이었다. 여기에는 왕당파나 서구 세계의 지배 세계관인 기독교계, 그리고 기조나 버크와 같은 점진적이고 보존적인 반혁명 자유주의자들이 함께 있었다.
한편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대개 국가 주도 개발(한국, 일본, 대만)이나 개발군사독재(한국, 대만) 등을 주도하거나 그 과정에서 수혜를 입은 집단이 자연히 보수화가 되었다. 또 그 과정은 제국주의(일본의 국체 사상, 천황 본위 군국주의 등)라던가 냉전(한국의 북진통일, 대만의 본토수복 등의 차원에서 반공주의) 등이 배후에 짙게 깔려 있었다. 대개 이들은 모두 ‘국가와 민족(일본은 천황도)에 대한 충성, 애국’을 기본으로 한다. 자유민주를 많이 입에 달았지만 이는 집단주의, 내셔널리즘, 권위주의 등에 가깝다. 오히려 싱가포르의 리콴유가 내세운 아시아적 가치가 훨씬 솔직하다고 볼 수 있다. 어찌 되었건 동아시아에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는 명확히 분리된다(물론 당연히 둘을 합칠 수도 있다. 다만 원래 필연적으로 합쳐서 이해할 수는 없다는 점.).
보수주의는 본래 ‘합리성’ 심지어 ‘이성’을 그렇게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다. 적어도 그것이 근대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적 맥락에서의 손익 계산이라던가 실증적 사고 등을 의미한다면 그렇다. 오히려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전통이나 종교 등으로부터의 관행, 경험칙, 지혜 같은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니면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공동체적 대의일 수도 있다. 서양의 기독교적 세계건 동양의 유교적 세계건 각자 문화권에서의 전통이라는 차원에서는 유사한 면이 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개발국가는 분명 이전의 봉건적 질서와 단절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봉건적 문화요소의 일부는 상당 부분 승계했다. 특히 가족이나 직장 등과 같은 사적, 사회적 영역에서 그러했다.
2016~2017년 한국의 탄핵 정국 이후에 보수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자 ‘합리적’ 보수에 대한 담론이 나왔다. 그 말은 종래의 보수가 ‘비합리적’이라는 뜻이 전제되어 있고, 거기에는 다시 ‘비합리적인 것은 나쁜 것’이라는 전제도 있다. 여기서 합리성이란 아마 근대적, 자유주의적 의미의 합리성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본다면, 그 ‘합리적 보수’는 더 이상 보수라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단 하나의 객관적 과거가 있고 그로부터 내려오는 것들을 지키는 게 보수이고, 좋건 싫건 이제까지의 보수는 그래왔는데 그걸 부정하면 더는 보수가 아닌 게 되기 때문이다.
또 보다 원론적인 차원에서 보면, 앞서 언급했듯 보수주의란 본래 자유주의적 ‘합리성’을 전제하는 사상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론적 차원에서도 보수에 굳이 ‘합리적’이라는 말을 붙이면서 정당화할 필요는 없다. 물론 정치적 필요에 따라 등장한 말이긴 하겠지만, 국민의 입장에선 그런 걸 감안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그 말 자체가 말이 되느냐를 놓고 생각해 본 것이다.
정리하면, 합리성과 이성이라는 개념의 협의적 정의를 근대 자유주의적 차원이 내포하고 있는데 이렇게 보면 보수주의는 합리성과 이성을 내포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게 된다. 만약 전통 등에서 비롯되는 지혜나 경험칙 등도 합리성과 이성에 포함할 수 있다고 보면, 보수주의는 합리성과 이성을 본질적으로 내포하게 된다.
3. 진보
진보주의(Progressivism, 進步主義)는 말 그대로 종래의 질서, 구조, 제도, 문화 등에서 더 발전된 방향으로 진전해 나가려는 사상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진보주의는 보수주의보다 더 보편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보수주의는 개별적 문화권에서의 전통 같은 것을 옹호하지만, 진보주의는 인권과 같은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따지고 들어가면, 진보주의라는 용어도 (당연하긴 하지만)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꼭 어원의 차원에서 말하는 건 아니다. 우선 그 정의 자체를 놓고 볼 때, 과연 ‘발전’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전이 축적되면 발전이 될 수 있다. 애초에 어떤 방향으로 가야 발전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기준이 다양하고 또 미래는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해진 과거에 대한 입장인 보수주의보다 훨씬 다양할 수밖에 없다. 현대적으로 보면 그러한 '발전'이 자주 사용되는 근대화론이나 기술결정론에 대한 반격 내지 비판, 대안으로서 제안된 종속이론 등도 진보로 구분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근대적 맥락의 발전의 이면 내지 본질 등에 관한 폭로와 (보수적 의미가 아닌) 반대도 진보적 흐름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본래 진보주의는 서구에서 처음 등장할 때는 근대적 합리성과 이성에 기초해 실증적 과학기술과 사회개혁 등을 통하여 인간의 사회적, 경제적 삶을 향상하는 것을 의미했다. 경제적 삶의 향상은 말 그대로 소득이나 부 등 물질적 제고를 의미하므로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 된다. 하지만 무엇이 사회문화적 삶의 향상인지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불평등이라는 결과를 감수하고서라도 모든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게 진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모두가 결과적으로 평등해야 인간이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으며 그게 진보라고 한다.
또 진보주의는 내재적으로 보수주의보다 우위를 점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서구 차원에서 보수주의의 일부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기독교의 경우를 놓고 보면 인간존엄성과 사랑이 중요한 사상적 요소이다. 그런데 진보주의의 과학기술에 대한 믿음은 우생학과 같은 그에 반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적이 있다. 그렇다면 진보주의가 보수주의보다 더 도덕적,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오늘날의 진보주의는 그러한 과거의 흐름과는 단절적이고 문화권이나 국가 등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그러니 결국 애초에 진보주의란 시공간적, 사회적 맥락 등에 따라 정의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맥락이 다른 서로 다른 ‘진보주의’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건 곤란하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민주당이 진보인지의 여부에 대한 판단을 역사적, 문화적 맥락 등이 완전히 다른 서구의 본위로 놓고 판단하는 건 어렵다.
현실정치의 차원에서 보면, 오늘날 진보주의는 대개 주류 온건진보 정당보다 더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통상 좌파 성향을 띠는 정당이나 정파 등의 성향을 지칭한다. 그러나 진보라는 개념은 보수라는 개념보다도 더 다차원적으로 사용되므로, 따지고 들어가면 어떤 정치세력이 진보냐 아니냐의 논쟁을 구태여 깊이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4. 중도층
통상 정치에서의 중도(Centre, Centrism)와 중립(Neutral, Neutrality)은 서로 다른 개념이라고 이해된다. 중립이란 말 그대로 어느 입장도 들지 않거나 경우에 따라 어느 일방의 손을 들어주고 다른 경우 타방의 손을 들어주거나 하는 것을 말한다. 중도란 통상 정치적 좌우의 양대 스펙트럼/진영이 존재할 때, 그 양자를 적절히 절충하거나 창조적으로 혼합한 사상을 말한다.
실증적 통계 분석의 성격을 지니는 여론조사의 경우, 실제로 존재하는 주요 정당들(보통 양당제에서의 거대양당) 사이에서 어느 한쪽도 아닌 경우를 통칭해 중도층이라고 부른다. 여론조사의 의의는 선거의 성패를 예측하거나 하는 데에 있는데, 만약 중도정당이 따로 유의미하게 존재하거나 하지 않는 한 중도인지 중립인지를 명확히 가르는 것은 실익이 없다. 중도라고 해도 일관되게 보수를 찍으면 보수층이 되고 일관되게 진보를 찍으면 진보층이 된다. 그러니 중도는 크로스 보터들이나 무당층, 부동층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이 되며 이들 중엔 이념적 중도도 있을 수 있고 중립도 있을 수 있다. 선거용 여론조사에서는 이들을 가리는 실익이 없다.
다만 우리나라의 정치적 이념 분포 등을 세밀 분석하는 경우, 예를 들어 보수층 중에서도 중도/온건보수, 강경보수 등으로 하위집단을 나누거나, 중도층 중에서 실제 정치적 중도주의자들과 중립인 자들로 하위집단을 나누는 것이 실익이 있게 된다.
5.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
이 양자도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정치의 사법화란, 사법적 영역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들을 정치적 영역에서 다루는 것을 말한다. 보통 사법은 정치에 있어서는 정책이나 정치인 개인이 지켜야 할 규범적 마지노선으로서 의의를 가진다. 그러므로 사법적 문제 예를 들어 정적의 비리 등 범죄라던가 하는 문제들을 정치로 가져와서 그것을 권력투쟁의 꽃놀이패로 쓰려고 하고, 다시 정적들도 맞불 작전으로 같은 행위를 하는 식으로 정치가 사법적 문제가 되는 스캔들/약점 싸움을 하면 정치가 사법화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사법화는 당연히 정치가 사법적 사고방식을 가지거나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언급했듯 사법적 사안이 되는 무결성(Integrity)의 문제가 정책/입법 등의 의제보다 더 주요 쟁점화되는 정치적 양상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사법의 정치화란, 정치적 영역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들을 사법적 영역에서 다루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정부의 정책이나 국회의 입법 등을 수용할 수 없다며 곧바로 사법부로 가져가 법적 시비를 다투는 경우를 말한다. 사법은 지도 원리나 정책이 지켜야 할 법적 규범의 마지 노선을 검증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그 전제에는 사법적 자제가 있다. 다시 말해, 국민의 대표인 대통령과 국회가 주도하고 형성하는 정치적, 정책적 흐름에 대해 국민의 대표가 아닌 사법부가 구체적인 정치적, 정책적 판단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전형적인 예로서 (인정, 남용 여부에 관한 논란이 있긴 하지만) 고도의 정치적 결단에 대해서는 면책된다는 통치행위의 법리가 있게 된다.
또 더 전형적이고 곤란한 것은 정적에 대한 제거나 타격 목적으로의 무리한 고소/고발이라던가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각하될 사건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사법부가 정치적 무대로 끌려 나와 주목을 받고 결국 최종적으로는 어느 쪽으로부터라도 비난을 들어야 하므로 결정적으로 사법의 신뢰가 손상된다. 이는 사법부의 의지라기보다 대개 정치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므로 정치권의 문제가 된다.
원칙적으로 이러한 양상들은 권력분립의 위반은 아니지만 권력분립이 제대로 운영될 수 없게 한다. 정치는 마지노선을 지키면서 스스로 성숙하게 형성되어야 하고, 사법은 어디까지나 사법의 영역에서 그 마지노선의 위배 여부를 검토하고 통제하는 역할만 해야 한다. 권력분립은 서로의 영역 및 기능과 그에 따른 권한의 한계와 범위를 명확히 알고 지키는 데에서 그 규범적 준수가 보장된다.
따라서 정치 구체적으로 정당이나 국회 등의 영역에서 자율적인 토론, 토의, 협상, 타협 등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은 사법이 아닌 정치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사법과 정치의 영역을 나누어 명확히 사법의 영역이 되는 경우는 정치에서 더는 논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며 그러지 않고 약점 싸움으로 들어가게 되면 정치는 국민을 위한 입법/정책 기능이 몰각되고 인정사정없는 서바이벌 게임과 암투에 지나지 않게 된다.
6. 권위와 권위주의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는 권위에 기반한 통치를 추구하는 것으로서, 보통 독재나 그에 준하는 신대통령제와 같은 왜곡된 민주주의와 연계되어 규범적 차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권위(Authority)라는 개념은 오히려 본래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맞다.
권력(Power)은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는 타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행사되어 타인, 집단, 조직 등을 통제하는 힘을 말한다. 권력은 결과를 본위로 유무를 판단할 뿐이지, 그 자체로 규범적 함의가 있는 개념이 아니다. 다시 말해, 권력은 정당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한편 권위(Authority)는 사람들이 공포감 등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따르게 되는 힘을 말한다. 이는 전문가, 윤리적 선도자 등 다양한 원천을 가진다. 베버의 이념형에 따르면 전통, 카리스마, 합리성/법이 그 원천이 된다. 권위의 원천에 대한 베버의 구분을 본다면, 내 생각으로는 전통과 카리스마에 기초한 것은 권위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전통이나 카리스마의 힘은 공포나 관성 때문일 수도 있고 자발성 때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절반씩인 경우도 있겠다. 합리성이나 법에 의한 지배도 항상 자발적인 것만은 아니지만(예를 들어 관료제나 법적 합리성이 항상 자발적인 것만은 아니니), 적어도 대개 근현대사회의 경우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발적 의사를 본위로 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체제/원리로 하므로 상당 경우 권위를 확보하게 된다.
권위에는 자발성이 전제되어 있으므로 권력의 행사가 공포감이나 세뇌 등에 의한 경우에는 권위가 있는 게 아니라 보통은 권위주의만이 있게 된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권위 있는 권력, 권위 없는 권력, 권력 없는 권위가 있게 된다. 이 중 권위 없는 권력은 대개 용납되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그 차원이 체제/원리 차원에서의 독재 등인가 아니면 현대적 민주정치체제에서 단지 제도적 근거만 있는 권력인가 하는 차이가 있기는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