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독재 두 가지가 있다.
1. '좋은' 독재
2. (당연히, 나쁘다는 의미에서) 독재라고 인정하는 독재
독재의 진정한 무서움은 독재를 독재라고 말하지 않고, 동시에 독재와 독재가 아닌 것 그리고 독재의 시비에 대해 교묘하게 경계를 흐려버리는 물리력ㆍ세뇌ㆍ가스라이팅 등에 있다. 또 독재의 본질을 모르고 그것을 낭만화하거나 현실적ㆍ합리적인 척하며 수용하려는 자들도 있다. 엘리트와 비엘리트를 불문한다. 인간의 존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현재까지 계속 중인 유혹과 응전이다. 의식적으로 영구히 싸워야 하는 이유이다.
1번에는 경제발전이니 국가부흥이니 계급해방이니 온갖 좋은 말들이 다 들어간다. 핵심은 인간의 개인으로서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박탈한다는 점이다. 독재는 국가의 독재만 있는 게 아니다. 미시적 독재도 있다. 남에게 폭력을 당해 본 사람이 독재를 옹호하는 경우는 두 가지 뿐이다. 본인이 가해자가 되었거나 이미 주체성을 박탈당해 뭐가 좋고 나쁜지를 판단하지 못하거나.
2번에는 외세 방어니, 민족단결이니 온갖 정당하거나 권위 있을 것 같은 말들은 전부 들어간다. 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이자 메타 이데올로기이다. 그 어떤 명분으로도 개인의 존엄성ㆍ인격ㆍ자율ㆍ주체성을 본질적으로 침해할 수 없고, 모든 이데올로기는 이 한도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에서만 관용된다. 그러지 않으면 자유주의의 정의(Definition)의 내적 정합성이 완전히 깨진다. 개인을 '위한' 이데올로기는 많지만 개인에 '의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결과적으로 전자는 정당성의 탈을 쓴 폭력으로 변질될 여지가 매우 크다. 이사야 벌린이 소극적ㆍ적극적 자유 개념을 분리했던 본래의 의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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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의 정상상태와 예외상태의 구분 자체가 슈미트의 현실인식의 불완전을 보여준다. 만약 정치가 아ㆍ적, 생존의 문제일 뿐이라면 정상상태는 예외상태가 되어야 하고 예외상태가 정상상태가 되어야 한다. 물론 슈미트가 그 구분을 '소위 정상/예외라고 규정지어지는 것'으로 본 것이라고 전제하면 약간 달라지겠지만.
슈미트적 세계는 원천적으로 지속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대개의 경우 결단하는 인간이 있다면 저항하는 인간도 있는데, 결단자가 임계점을 넘는 경우 권력관계를 저항자가 전복시키는 것도 가능하며 실제로 발생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설령 주권자가 모든 국민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루소적 일반의지라는 건 거의 존재하지 않고, 민심이라는 건 다양하며 가변적이므로 결단하는 민심이 있다면 그 결단에 저항하는 민심도 있으므로.
자유민주주의는 본래 역사적 격동을 최대한 규범ㆍ구조ㆍ제도ㆍ문화 안에 총체적으로 흡수하여 개인의 존엄성ㆍ권리ㆍ삶과 일상의 평온ㆍ선택의 존중 등을 최대한 보호하려는 것이다. 윤석열의 계엄이라는 '결단'을 막은 것도 따지고 보면 자유민주주의의 다원적ㆍ다층적 방파제이다.
카를 슈미트를 지지하면 쉽게 독재의 정당화로 미끄러질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는 슈미트적 세계관을 부인한 적이 없다. 애초에 자유주의 사상의 본질적 특성이 핵심 가치를 둘러한 Broad한 이해ㆍ해석들의 공존이며 동시에 이러한 인식ㆍ관점의 다원성을 보장하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 중 하나이니까. 오히려 슈미트적 세계관ㆍ인간과 영구히 싸우기 위해 존재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슈미트적 괴물은 영속할 것이므로.
동시에 자유주의는 슈미트의 반대ㆍ필연적 적이기도 하다. 문명적 계승이라기 보다는, 왕정이나 공산주의 그리고 시장근본주의 등에 이르기까지 슈미트 이전부터 모든 종류의 개인에 대한 압제와 싸워왔고 슈미트 이후에도 네오파시즘ㆍ내셔널리즘ㆍ포퓰리즘 등과 투쟁 중이다
그러한 대의에 관한 버크적 자유주의도 있었고 롤스적 자유주의도 있었다. 어떤 맥락과 관점이건 종국적으로 개인에 대한 전체의 세뇌ㆍ가스라이팅ㆍ폭력 등을 배격해야 한다는 점에서 본질이 같다. 상이한 차원이더라도 자유주의 윤리의 공통분모는 결국 개인과 소수의 자율성을 위한 방어이다.
인간이 정말 성악설이나 슈미트적 세계관 등에 의해서만 설명되는 존재라면 자유주의 원리가 탄생ㆍ확산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유의 사상들은 인간과 사회의 중요한 하나의 본질적 측면을 지적하지만 그것은 단면에 불과하므로 세상을 반만 본 것이다.
[퇴락한 종친 나부랭이가 허망하기 그지 없는 대망을 품고 무학대사의 참언을 석경루 아래에 묻었느니라.
헌데 꿈과 같이 그 대망을 이루었느니라.
허나 오늘은 내 육신을 묻힐 곳을 찾아서 가묘를 세우려 하고 있느니라.
무학대사의 참언을 묻을 때는 나 역시 그 꿈이 이루어질까를 반신반의하며 묻었으나 내 손으로 세우는 가묘에 내가 묻히는 꿈은 의심할 나위가 없질 않겠느냐.
내가 세상을 반쪽만 보았다..
내 앞에 있는 세상은 훤히 보이면서도 내 등 뒤에 있는 세상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왔으니...
_ 드라마 <명성황후>, 흥선대원군의 독백 중에서]
슈미트적 시선은 “앞의 세계”를 선명하게 그린다. 위기, 적대, 결단, 승패, 질서 창출. 하지만 자유주의가 집착하는 건 대개 “등 뒤의 세계”이다. 결단이 남긴 잔해를 어떻게 흡수해서 일상의 평온, 권리, 존엄으로 다시 돌려놓을 것인가.
슈미트적 세계관은 중요한 진실(앞의 세계)을 말하지만, 자유주의는 그 진실만으로는 인간이 지속가능하게 살 수 없다는 또 다른 진실(등 뒤의 세계)을 붙잡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