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7월 15일, 지미 카터(Jimmy Carter, 1924~2024) 미국 대통령은 ‘신뢰의 위기(Crisis of Confidence)’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정체성은 더 이상 그가 무엇을 하였는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가졌는가에 의해 정의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를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이 삶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갈구를 충족시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왔습니다. 우리는 물질적 상품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올리는 것이 목적이나 확신 없는 우리 삶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배워 왔습니다.”
이는 전후의 절정에서 위기의 과도기로 이어지고 있었던 70년대 미국의 자기 확신 상실과 본질적 문제 외면 및 소비주의(Consumerism)로의 회피를 적확하게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 에너지 위기, 소련/라틴아메리카/중동 등에서의 외교안보적 위기 등에 묻혀서 그는 ‘나약하고 무능한 대통령’으로 남았다.
다음 해 대선에서 그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 공화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진실은 미국을 여전히, 그리고 더 강하게 지배했다.
미국예외주의, 팽창적 성향의 신보수주의, 과감한 자유시장과 개인의 야망에 대한 긍정, ‘약해빠진’ 사회문화적 진보에 대한 대대적인 걷어내기, ...
레이건 이후의 미국은 자신들의 공허를 외면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마초적 자유지상주의를 되살렸다.
이러한 경향은 민주당 행정부였던 클린턴 행정부 때에도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고, 오바마 행정부 때 조금 더 진전된 개혁과 구체제 사이의 긴장이 흘렀으나 최종적으로는 트럼프주의라는 아주 강경하고 기형의 정점을 찍은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 체제로 귀결되었다.
트럼프의 피해자 서사나 기득권에의 저항 서사, 무엇보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든다는 구호 등은 모두 내적 모순과 공허로 가득 찬 것이었다.
레이건 행정부가 1981년에 출범하기 전에 카터 행정부에서도 이미 예산개혁을 통한 지출 절감이나 규제완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런칭했으며, 이후 클린턴 행정부에서도 쌍둥이 적자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규제완화와 자유무역 등은 활성화하고 복지는 조건부로 했다.
오바마와 바이든 등은 레이건의 유산을 온전히 깨뜨리는 데에까지는 나가지 못했다.
다시 말해, 80년대부터의 미국정치는 어디까지나 레이건주의가 만든 흐름에서 완전히 이탈한 적은 없으며 기득권은 기본적으로 공화당과 자산가 및 고소득층 그리고 거기에 부합하는 민주당 주류 등이 모두 하나로 있었다.
트럼프는 단지 공화당 내부에서 그간 정계에 잘 보이지 않았을 뿐, 사회경제적 계층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의심의 여지 없는 기득권이었다.
뭐 기득권인 건 그럴 수 있는데, 적어도 자기가 남에게 기득권이라고 말할 처지는 되지 못할뿐더러 그가 ‘나는 서민의 대변자’ 비슷하게 말하면 정말 위선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과거의 아메리칸 드림 비슷한 것이 이미 파탄 난 ‘기회 없는 미국’에서 마치 그 꿈이 가능한 것처럼 포장해서 환상을 만드는 것이라면 더욱.
트럼프의 등장은 이전의 존 매케인, 미트 롬니 등 2008-2009 금융위기 이후 민주당 측의 비판에 의해 온건화한 신자유주의를 어느 정도 수용한 공화당 온건파를 밀어내고 전면적으로 재등장한 그리고 더 강경하고 기형적인 레이건의 귀환을 의미했다.
정치적 바이브나 리더십의 차원에서, 레이건은 민주당 온건파까지도 항복하게 만드는 사교적 카리스마가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자신이 성공한 루트대로 철저하게 손익 계산의 사고를 사용하고 그걸 위한 위압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날것의 시장의 문법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영역인 공공 차원에서는 소시오패스로 취급되기 딱 좋은 것이고 중장기적으로는 파탄이 예정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국의 우위는 미국이 자신의 권위를 어느 정도 유지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런데 권위를 깨뜨리고 동맹국이나 정적들이나 관료나 전문가 등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하는 순간 미국 자체의 권위도 함께 실추된다.
말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참아주어야 할 이유’가 점점 잠식되어가는 것이다.
‘자기들이 뭐 어쩔 건데?’라고 할 수도 있지만, 유럽연합이나 영연방 국가들이 이미 반격을 시작했고 일본이나 한국도 내심 불편해하는 게 당연하다.
이는 외교안보적 차원에서 치명타이다.
이미 신냉전 국면으로 들어가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팽창주의적 경향과 도전 그리고 영향력이 막강해졌는데, 서구는 탈냉전 이후 환상에 취해 있었던 상태에서 탈각되면서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방대한 구조적 결과로 인해 내부적으로 혼란한 상황이다.
대안적 패러다임의 등장과 전환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기성 정치 세력이 국민에게 응답하지 못하고, 국민의 불만이 대대적으로 우익 포퓰리즘의 형태를 빌려 터져 나온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미 공간적 분업이 안착된 글로벌 공급망을 혼란하게 하고 현실적으로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국내 고용 확보나 투자 유치 등을 위해 동맹국들을 상대로 관세 장벽을 부활시키고 자국에의 투자를 강요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결국 이러한 행태는 제1세계에서 각국의 내부 사정을 꼬이게 할 뿐 아니라 이 세계를 주도하는 미국과 다른 동맹국들의 관계도 꼬이게 한다.
최근의 베네수엘라 침공 사건이나 그린란드 편입 욕망의 표출 등은 이미 이런 식으로 불 붙은 위기에 아예 기름을 들이부은 격이었다.
트럼프는 본래 대외 개입이 아니라 고립주의를 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도 외피상 고립주의의 대표적인 사상인 먼로 독트린을 언급하지만, 조지 W. 부시처럼 미국의 도덕윤리적 명분이 표면상으로나마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도 이를 최소한도로나마 믿어주지도 않는 상황에서 베네수엘라로 쳐들어갔다.
결국 아메리카 대륙 안에서의 패권주의와 유럽/동아시아/오스트랄라시아 등에의 무리하고 무례한 대우 등은 고립주의와 신보수주의의 기형적이고 위험한 혼종으로 거듭났다.
베네수엘라 침공의 제일 큰 문제는, 다른 게 아니라 미국의 이전 중동 지역에서의 군사적 개입 등에 대한 국민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게 ‘옳은 것’이냐를 떠나서, 과연 트럼프가 그렇게 강조하는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며 합리적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미 이전의 경험으로, 문화적 맥락이나 정치사회적 맥락 및 경제적 조건 등이 완전히 다른 국가에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이식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배웠다.
또 그 지역의 기본적인 안정을 지키는 데에도 많은 군사력과 물적 자원 등이 동원되어, 최종적으로는 국민에게 날아오는 비용 청구만 엄청나게 된다는 것도 알았다.
석유 산업 관련 이윤 동기라는 말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그 정도로 갑자기 미국경제가 근본적으로 나아진다든가 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워 보인다.
무슨 마약 카르텔이니 하는 얘기는 언급할 가치도 없고.
아무리 마약 유통 구조를 근본적으로 뿌리 뽑고 싶다고 해도, 군사적 비용이나 역내 및 역외 국제관계의 복합적인 혼란을 가져올 수 있는 일을 그냥 한단 말인가?
국익도 아니고, 규범도 아니면 트럼프의 침공은 그냥 자기를 위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잘 보면, 트럼프의 많은 정책들은 자기를 위한 것이거나 아니면 자기의 정치적 기반을 위한 것이다.
거창한 공적 가치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정치는 경영이 아니다.
정치공학적으로 자기의 이익을 세우고, 심지어는 거기에 자기의 경제적 이익 도모 의도가 미묘하게 섞여 있으며, 자기 소속 상층의 이익이 더 극단적으로 보호되고, 미국의 자국 이기주의가 극단을 달린다.
결과적으로 이 비용을 치러야 하는 사람들은 서민 가계이다.
일차적으로는 동맹국들도 있지만, 그들은 일단 미국 국내 주체가 아니고 무엇보다 보복 조치를 가해서 수입이 저하되고 국산품의 저가 유인도 사라져 궁극적으로는 미국 서민들이 고물가에 시달려야 한다.
관세 수입은 대대적인 감세의 세수 감소분에 비할 때 바다에 호수를 들이붓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2025년 말 기준 대략적인 예상치를 놓고 볼 때 개인소득세가 전체 세수의 약 50%를 차지하는데, 트럼프 2기 관세 수입은 그 소득세 세수의 약 1/10 정도 밖에 되지 않고 향후 계속 세수 결손이 발생할 예정이다.
이 래퍼 곡선들의 신봉자들은 이루어지더라도 지속 불가능하며 현실적으로 거의 가능성이 없는 망상에 빠져 있다.
고용이 일시적으로 호전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긱 이코노미의 문제는 개선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제조업 기반이 한참 전에 상당 부분 붕괴한 상황 속에서 AI 등 최신 첨단산업은 매우 소수의 고학력자들만을 수요한다.
나머지는 자동화되어가고 있으면서 동시에 불안정고용만을 양산한다.
이는 고용 없는 성장을 넘어, 근본적으로 생산-분배-소비의 연쇄적 고리가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투자와 성장이 활성화되고 일시적으로 소비가 진작되어도, 정작 고용과 복지 그리고 중장기적인 삶의 질 및 자산 형성과 상향 사회이동 가능성 등이 심각하게 부진하면 그 모든 산업 담론은 아무 의미도 없다.
결국 근본적으로 체제 재설계를 하건, 아니면 현행 체제에서의 중장기적 패러다임 수정이 불가피한 것이다.
미국을 포함해 상당수 국가들의 정치권에서 AI가 가져올 사회경제구조적 파급효과에 어떻게 전면적으로 대응할지가 핵심 논제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AI에 관한 논의는 상당수가 그 산업의 발전과 투자 그에 대한 우려와 규제 문제 정도에 있다.
하지만 정치권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버니 샌더스가 언급하여 경종을 울린 점에 닿아 있다.
트럼프 행정부 치하의 재정 운용은 레이건 행정부를 상당 부분 닮아있다.
보건, 복지, 교육, 환경, 외교 등 예산이 삭감되고 민영이 확대되면서 동시에 국방 예산은 대폭 증액되었다.
2026-2027 회계연도에 국방 예산을 50% 이상 증액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 재원으로 관세 수입을 언급했다.
효율을 운운하며 공무원 수를 대대적으로 감축했는데, 미국은 전체 고용 중 공공 부문 고용 비율이 낮다.
OECD 평균이 약 18%이고,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약 30%, 캐나다가 약 19%, 영국이 약 16% 정도이다.
미국은 약 15%인데 이보다 낮은 국가들은 11% 정도인 한국과 8% 정도인 일본이 있다.
게다가 연방제이므로 많은 사무들이 주정부의 소관이어서 연방정부 공무원의 전체 공공 부문 인력 안에서의 비율은 10%에서 15% 남짓이다.
미국의 행정 지체와 무능은 익히 알려져 있는 바이다.
또 미국은 원래 ‘적게 걷고, 적게 쓰자’라는 기조가 오래 전부터 확립된 나라이다.
GDP 대비 총 조세 수입만 보더라도, OECD 평균이 약 30%대 중반이고 유럽이 약 40%대 초반이다.
미국은 일본, 한국과 더불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이다.
그런데 공공 지출은 여러 구조적 영향이나 추세 등으로 확대가 불가피하다. (더구나 국방 지출은 아예 의도적으로 증액하려고 애를 썼으니.)
그런데도 증세를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국채를 계속 동원했고 결과적으로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이 계속 증가했다.
클린턴 시절 정도를 제외하면 미국은 거의 항상 재정적자와 정부부채가 문제가 되어 왔다.
부채 상환을 위한 이자 비용이 예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더구나 그 적자나 부채는 복지 등 서민을 위해서 대대적으로 지출된 것이 이유인 것도 아니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법인세, 소득세, 상속세, 증여세 등을 감세했다.
서민 감세라는 것은 누진세를 시행하고 있는 경우 기본적으로 무의미한 얘기고, 실제로 누진세 하에서 감세를 하는 경우 역진적 효과가 발생한다.
미국은 원래도 과세를 강하게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한 국가인데,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구조개혁이 없는 상황에서 감세가 과연 얼마나 유의미하겠는가?
서민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쓴 것도 아니고 딱히 양질의 고용을 창출하지도 않는 기업, 이미 현재에도 막대한 이익을 누리고 있는 자산가나 고소득자, 팽창주의 기조 유지를 위한 국방비 등을 위해 미래의 엄청난 극한 긴축 시한폭탄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차원에서 보면, 이건 최소한 자해 행위에 가깝다.
성장이 양질의 – 고용 형태나 임금도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자산 형성이나 상향 사회이동 등의 가능성까지 볼 때 – 고용을 창출하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그 붐만 가능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고 말한다.
거기에다 금권주의와 소비주의가 덧씌워져 미국은 거의 환각과 가스라이팅에 사로잡힌 나라에 가까웠다고 본다.
그러는 동안에 가계부채 문제는 계속 심각해졌고, 현재 고금리 기조 때문에 서민들의 입장에선 설상가상이 되었다.
성장, 물가, 고용, 증시 등 주요 경제지표들이 지표상으로는 그럭저럭 안정적인데 체감 경기는 개선이 없다.
관세 도입이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고 고금리의 여파가 유지되니 실질임금 상승분이 상쇄되었다.
소득 하위 40%는 저축을 소진하고 신용카드 연체율이 상승했는데, 팬데믹 때 실업률 증가의 타격도 한몫 했다.
결국 주요 경제지표가 아니라, 민생 및 사회적/삶의 질 지표 자체를 놓고 판단해야 한다.
경제지표가 개선되어도 그것이 반드시 체감가능한 민생의 개선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 이미 확인된 상황이다.
나아가서는 구조개혁이 필요한데, 트럼프 행정부가 취해 온 방향은 아예 파탄을 더 악화시키고 가속화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것이다.
어쩌면 2008-2009 금융위기보다 더 심각할지도 모르는.
팬데믹 이후 건강보험료 폭등, 저소득층에 대한 메디케이드와 식품 지원 삭감, 공교육 지원 축소, ...
이미 미국에서 살아남으려면 매우 독한 마음이 필요한데, 사회 자체가 해체되는 경향이 생겨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방향으로 계속 흘러간다.
그러는 동안에 사람들의 시선은 정작 증시니 무역이니 산업이니 하는 다소 추상적인 것들에 가 있다.
너무 좌파적인 견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세상은 정말 지속불가능한 방향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게 사실이고, 미국은 이러한 지속불가능성의 극단적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버니 샌더스나 조란 맘다니가 부상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민주당 주류의 점진적 개혁이 근본적으로 자신들의 삶을 바꾸지 못한 상황에서, 트럼프는 그마저도 전부 무위를 넘어 파탄을 냈다.
그러니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더 절망하고, 더 급진적인 분노와 저항의 의사를 표하게 된다.
사회불평등이 심각한 진정한 이유는, 아마도 상향 사회이동이 거의 봉쇄되는 구조적 조건이 강화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불평등 자체가 윤리적인가 그렇지 않은가는 무의미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채택했다면 불평등은 불가피하니까.
하지만 구조적 조건이 다른 사람들의 경쟁이 보정되지 않고, 갈수록 그 조건의 격차가 심해져서 상층은 하층을 모르고 하층은 상층을 모르며 중층은 소멸하면 사회적 안정성에 빨간불이 켜진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에 덧대어져 있던 ‘사회적’, ‘공적’ 요소들을 제거하는 경우 아예 위기의 특이점으로 가는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것과 같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이다.
그 속도와 시점의 문제일 뿐, 반작용은 반드시 온다.
그리고 어쩌면 늦어질수록 더 효과도 파멸적이다.
경제학자 라즈 체티(하버드대) 등의 분석에 따르면 1940년대생이 부모보다 더 돈을 많이 벌 확률이 90%였는데, 1980년대생이 부모보다 더 돈을 많이 벌 확률은 50%이다.
그러니까, 레이건과 대처의 세계는 루스벨트나 복지국가론자들의 세계와 비교할 때 역동적이기는커녕 정반대로 계층 대물림이 더 심해지는 세계일 뿐인 것이다.
공적, 사회적 요소와 사적, 경제적 요소 간의 균형이 붕괴되었을 때, 사적-경제적 요소가 압도적으로 강한 체제는 공적-사회적 요소가 압도적으로 강한 체제(현실 사회주의)보다는 지속가능하더라도 내구성은 계속 떨어지고 어느 시점에 문제가 폭발한다.
그러니까 체제 논쟁에서는 시장경제가 이겼을지 몰라도 시장경제의 논리가 정치, 사회, 문화까지 지배해서 질서의 균형이 붕괴되면 반짝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지속가능하지 못한 것이다.
상향 사회이동이 봉쇄되고, 자신의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서도 모든 걸 걸어야 하며, 선택의 자유가 ‘무엇이 차악인가’ ‘무엇이 더 감당 가능한가’의 문제에 불과하고, 무엇보다 인간존엄성이 침해되고 삶 자체가 모욕을 받는 기분이 드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절망적인데 결국 위기에 처하면 가장 먼저 희생당한다.
이대로 간다면, 아마도 마르크스의 예견은 그런 측면에서 아주 거대한 역사적 흐름 안에서는 언젠가 근본적으로 재평가될지도 모른다.
극도로 냉소적으로 보자면, 이제까지의 자본주의 역사 전체가 서민에게 그냥 당근 하나나 구호 식량 정도를 던져주어서 연명하는 식으로 흘러온 부분도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경쟁에 ‘내던져지는’ 것을 넘어 ‘내팽개쳐지고, 버려’진다.
이것을 부인하고 자유시장을 예찬하기만 하는 사람들은, 그 자유시장의 밑바닥 내지는 맨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아니면 보더라도 워낙 독하게 성공해서 자본주의가 비인간화하고 세뇌한 사람들이던지.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가장 덜 악한 메커니즘이고,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나 법치주의의 견제를 받아야 하듯이 자본주의도 사회제도의 보완과 규제를 받아야 한다.
그마저도 없어지면 사회문화적 자유는 없어지고, 형식적으로만 유의미한 경제적 자유만 남고 국방/치안 등의 명목으로 국가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비용과 권리 침해 감수만 강해진다.
트럼프주의는 작은 국가를 추구하지만 역설적으로 진정으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게 된 큰 국가, 무엇보다 비인간적인 국가-시장-개인과 해체된 사회 그리고 비천한 문화만을 남기는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 기형적 결합의 궁극적 완전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