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 2

유형학적 연구 및 학습의 의의와 사회의 유형학적 이해

by 남재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책 중 하나가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 & 필립 W. 서튼이 저술한「사회학의 핵심 개념 Essential Concepts of Sociology」이다.


대학에서 느꼈던 불편함을 설명할 길이 없었는데, 현재에는 이를 유형학(Typology), 메타이론(Metatheory) 또는 개념사(Conceptual History, Begriffsgeschichte) 등이 약하다는 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유형(類型)’이란 성질이나 특징 따위가 공통적인 것끼리 묶은 하나의 틀, 또는 그 틀에 속하는 것을 이른다. 즉, 유형을 따질 때는 기준 내지 표지(Marker)로서 같은 유형으로 볼 수 있는 공통적 요소와 다른 유형으로 볼 수 있는 차별적 요소를 중심으로 한다. 개념의 구분이 학계나 강의 등에서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다. 이는 더 넓은 시민사회에서도 오용, 남용, 혼용 등을 발생시킨다. 그래서 사회과학교육의 입문 과정에서는 유형학에 대한 체계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개인적 견해이다.

Cf. 유형학 : 개념들을 분류 및 구획해서 비교 가능하게 하는 기술

메타이론 : 이론이 성립하는 인식론, 존재론, 설명 모형의 수준

개념사 : 개념이 시대나 맥락에서 의미 이동해 온 궤적


본래 사회과학을 전공하기로 했던 이유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일반사회과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 중 두 가지가 응용성이 있다는 점과 ‘개념의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정의와 그것들의 체계’가 있다는 점이었는데 그것들이 마음을 편하게 하고 지적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정작 대학교에 진학해서 보면 실망의 연속이었다. 강의에서 주장이 설명인 것처럼 진술되거나, 양적 방법론이 개별 과목으로 직결되는 고리를 잘 모르겠거나, 교과서에서는 한 개념에 관한 여러 차원의 정의를 정리했는데 강의에서는 하나로만 뭉뚱그려 설명하거나, 과목 간 위계나 연계가 떨어지고 이들이 모여 유기성을 형성하지 못하거나 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대학이나 학문은 본래 그렇게 ‘다양’한 것이지, 고교처럼 국가 수준 교육과정을 통해 통일적, 체계적으로 정리될 수는 없다는 말도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있다. 고교 수준 교육과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성이나 정확성 등을 제고할 필요가 있기는 해 보인다.


특히나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이 순연하지 못하고 입시가 칸막이로 작동하는 상황에서, 이는 더 중요한 과제가 된다. 많은 학생들이 고등교육에 요구되는 비판적ㆍ분석적 사고 등을 충분히 습득하지 못한 채 대학에 오는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교수자가 하는 말의 유형학의 문제, 설명ㆍ주장 혼재의 문제 등을 그냥 그렇구나 내지 교수님이 하는 말이니까 하고 흡수해버린다. 전문가적 권위와 학생들의 미숙,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의 순연 부재 등이 낳는 최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인문사회 분야가 이런 방향 없는 표류나 교수자들의 각자도생 등이 상당해 보이기도 한다. 학문 자체가 다차원을 띠다 보니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학문 생태계의 응집력이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선 적어도 학부교육에선 이러한 다차원성이 제3자적 시각에서 체계적으로 교육되어, 최소 개론ㆍ원론ㆍ입문 수준의 교육의 질이 균질화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학습이나 연구 및 교수 등의 차원에서 가치가 개입될 수밖에 없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그리고 그것들의 개념들을 다룰 때, 제3자적 관점 내지 제로 베이스의 디폴트 값을 가지고 무엇을 판단하기 전에 검토해 보는 과정은 고도로 중요하며 필수라고 할 것이다.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의 순연이라는 구조적 과제가 빠르게 달성되기 난망하고, 중등교육은 고도의 통제ㆍ제약이 있다. 그래서 대학에서 교수자 입장에서도 연구자 관점이 아니라 교육자 입장에서 교수 전략과 방법 등을 더 독자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문제에 관한 워크숍ㆍ연수 등이 각 대학에서도 있는 듯한데 다행인 일이다. 다만 이는 주로 AI 시대를 맞고 팬데믹 시절 비대면 교육 시기를 거치면서 교육공학에 대한 관심도 증가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내가 제기한 문제의식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각 단과대나 학과(부)에서 학문 분야별 특질에 맞게 내부적 차원에서의 보다 체계적 고민의 지속이 필요하다.


많은 분야에서 통상 방법론은 양적 방법ㆍ계량 위주로 진행되는데 입문ㆍ개론ㆍ원론에서 메타ㆍ유형의 문제가 심도 있게 다루어지지 못한다. 그래서 메타이론ㆍ유형학ㆍ개념사 등이 기초 공통ㆍ필수 과목으로 편입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런 교육이 없으면 토론 등 자기 생각을 펼쳐놓아도 그것이 상호 공유 전제라던가 차원 등이 불일치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상호작용이 아니라 서로 다른 영역에서 공중에 검을 휘두르는 격이 된다.


보통 하나의 대상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은 서로 다른 차원과 문법을 지니고 있고 이는 서로 다른 전제들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시각들이 특정 쟁점에서 충돌하는 경우, 공유하는 전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검토가 없으면 서로 다른 층위에서 검을 휘두르는 격이 되어 있다든가 하면서 실익도 없는 소모적인 논쟁이 될 우려가 있다. 알고 보면 ‘그래서 우리가 왜 논쟁을 하고 있었던 거지?’, ‘쟁점이 뭐지?’ , ‘실제로는 양립가능한 걸 가지고 다소 무의미한 논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들이 상당하다. 어떻게 보면 지적ㆍ사회적 집중력 등 자원의 낭비. 토론에서의 승리나 자기의 주장 관철 욕구 등으로 인해 의의가 몰각되는 것이다.


인문사회 분야의 어떤 시각 또는 분석적 틀 등은 이데올로기로도 취급된다. 국제관계적 자유주의와 현실주의 같은 것들은 기본적으로는 국제관계를 특정 차원에서 이해하는 틀이지만, 실제로는 연구만이 아니라 정책 등 여러 담론의 차원에서 규범적/실천적 이데올로기로도 이해되는 경우가 있다. 특정 차원에서 대상을 이해하는 경우 아무래도 시사점이 가리키는 규범적/실천적 방향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학문적 개념은 규범/실천 제시라기보다 설명/분석을 위한 의도적 구성 도구라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학문의 기본적 사명은 어떤 대상에 대한 온전한 해명이다. 이것이 분야별 특성에 따라서는 실천적 지침을 제공하거나 그 자체가 실천과 불가분인 경우들도 많이 있다. 이러한 응용/실천 요소를 어느 정도로 강조할 것인가는 개별적 판단이지만, 적어도 학문 연구나 학습 등을 할 때에 서로 다른 차원을 자기도 모르게 연결해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건 여담이지만, 원칙적으로만 보면, 지식인의 사회 참여를 의무라거나 반대로 의무 위배라거나 라는 식으로 곧바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다만 구체적인 맥락과 양태 등에 따라서는 문제가 되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학계를 과도하게 개인이나 조직 등의 이익을 위해 끌어다 사용하면서 학계와 학문의 신뢰를 손상시키는 등의 행위일 경우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예컨대 사회과학 분야는 실천과 아예 분리해 버리면 현실 설명력이 떨어질 가능성도 높으므로, 균형감 등만 지킨다면 지식인이 공직에 나아가거나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일단 비판하고 들어가는 것은 그다지 적절치 않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해 생각나는 것들을 그냥 두서없이 정리했다.


- 사회학(Sociology)의 경우, 개념의 정확한 구분은 사회의 연구와 이해라는 학문적 목적에서 필수이다. 물론 개념은 이념형(Ideal type)으로서 목적을 위해 특정한 부분을 부각해 구분해서 이해하는 등 도구이지 정말 본질적으로 완벽하게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반드시 전제되는 건 아니라는 점을 균형적으로 유의할 필요가 있다.


- 정보사회의 도래와 이로 인한 역기능으로서 가짜뉴스와 음모론 등의 문제가 부상하면서 '팩트(사실) 체크'가 강조된다. 그런데 사회적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Fact)보다도 진실(Truth, 철학적 차원의 참 내지 진리가 아니다.)이다. 객관적 사실 그 자체보다 거기에 부여된 의미나 가치 그리고 그 사실이 놓인 맥락 등까지 포함하는 것이 진실이다. 형사소송은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중시한다. 객관적 구성요건만이 아니라 주관적 구성요건이나 기대가능성 등 책임 등의 영역까지 포함해야 조리에 맞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언론이 사실을 보도한다고 할 때, 그 사실을 어떤 의도와 맥락에서 보도하는 것인지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 사회(Society)는 2인 이상으로 구성되어 상호작용하며 공동의 사회적 의식(e.g. Nation이라면 민족 또는 국민 공동체 의식, 문학동아리라면 문학이나 문예창작에 대한 공통의 관심 등)을 가진 집합체나 관계나 연결망 또는 그 총체이다. 만약 2인 이상으로 구성되지 않고 단 1인만 남겨진 무인도에 떨어졌다면 그 무인도에 국한해서는 사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 간 상호작용은 경쟁, 갈등, 협력 등 매우 다양한 양태로 나타나므로 만약 선사시대에 아예 적대하여 사생결단한다는 상호작용을 하는 서로 다른 인간들을 묶어 사회라고 할 수 있을지 고민될 수 있다. 보통은 그런 경우도 사회라고 부르고 그렇게 지칭하는데 크게 위화감도 없다. 왜냐하면 예컨대 ‘인류사회는 선사시대에는 생존을 위한 투쟁의 양상이 많았다.’라는 문장이 크게 위화감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극단적으로 생물학적 동류의식 정도를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이 경우는 맨 처음에 정의한 일반적인 적극적 사회적 의식과 달리 가장 극단적으로 소극적인 사회적 의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적대는 서로 적이라는 상대방을 상정하고 적이란 서로 이해관계나 사상 갈등 등 서로 충돌하며 영향을 주는 상태가 있으므로 무관심이 아니다(지멜). 아예 무관심으로 아무런 사회적 의식도 관계도 없다면 사회라고 보기 어렵다.


- 그렇다면 공동체(Community)와 사회를 어떻게 구분할까? 구분할 필요 없다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앞으로의 문제이고, 일단 단어의 차이가 있다면 무언가 구분의 표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공동체란 유대감 등 공동체 의식을 가진 사회적 단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경우 ‘공동체 의식’이라는 것에 대한 해명이 좀 더 필요하다.


공동체라는 표현을 듣는 순간 뒤르켐의 기계적 연대(Mechanic Solidarity)와 유기적 연대(Organic Solidarity), 퇴니에스의 공동사회(Gemeinschaft)와 이익사회(Gesellschaft)의 구분을 떠올릴 수 있고 이를 사회와 공동체의 구분에 이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개별자로서의 자아와 사회라는 개념은 본래 근대적 산물이다. 대개 전근대에는 혈연이나 지연 등의 그 자체가 목적인 사회적 관계를 본위로 비타산적인 집합체가 상당했고, 근현대에는 예컨대 거래나 운영 등 경제생활이라는 목적을 위한 사회적 관계를 본위로 한 집합체가 상당하게 되었다. 전자를 공동사회 내치 ‘공동체’로, 후자를 이익사회 내지 ‘사회’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양자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표지는 개인성의 성립 여부로서, 자아(Self)라는 개념을 독자적으로 상정한 것은 국가를 개인이 구성한다는 사회계약론 등이 등장한 근대부터이다. ‘혼융된 공동체’에서 ‘개인들의 사회’로 이행한 것이다.


그런데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공동체와 사회 개념 모두 보정이 필요하다. 우선 사회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근대의 개인 본위 합리적인 요소들만이 아니라, 보다 중립적 관점에서 그 요소들을 포함한 사실상 거의 모든 인간 간 상호작용들의 총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 공동체의 경우에는 혈연, 지연 등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가족관계나 동아리나 친목회 등도 강한 유대감 등이 있는 경우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현대적 관점에서는 공동체도 사회의 일종 또는 구성요소이며 유대감 등 주관적 공동체 의식을 핵심 구분 표지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공동체는 사회조직ㆍ사회집단ㆍ사회구조 등을 포괄한다. 왜냐하면 예컨대 회사와 같은 전형적 사회조직을 보더라도, 애사심 같은 공동체 의식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냥 기능적인 결합만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 사회집단은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묶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정형성, 체계성, 구성원 간 상호연계성 등을 요하지 않는다고 본다. 예컨대 여성이라는 사회집단은 그냥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묶음일 뿐, 사회집단 내부에는 정형성, 체계성 등이 없고 직접적인 구성원 간 상호연계성 등도 없다(정확히 말해 여성운동이라거나 하는 목적을 위한 시민단체와 달리, 이러한 목적을 배제하고 아예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세상의 모든 여성이 상호연계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사회집단이 객관적으로 공유하는 정체성을 본위로 묶여 있지만 꼭 공동체 의식을 가지리라는 법은 없다. 예컨대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나 그것을 공동체적 의식으로까지 생각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상호 유대감을 가진다는 설명에는 의문 부호가 달린다. 하지만 모든 여성이 그 정체성으로 인하여 대개 공통적으로 처하게 되는 상황 등을 설명할 때에는 사회집단이라는 개념 사용의 살익이 있다.


사회집단의 한 구분 유형인 내집단과 공동체는 겹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각 개념의 구분 표지가 되는 개인의 소속감과 공동체적 의식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사회의 구성요소들을 포괄하면서 정형성ㆍ지속성을 가지는 사회구조의 경우도, 예컨대 국가는 정부로만이 아니라 정부+국민을 합쳐서 정의할 때 근대국가의 경우 대개 국민의식을 또는 그것을 공유한 공동체로서의 내이션을 본위로 성립한 것인데, 공동체 의식이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동체 의식이라기보다 구조화된ㆍ문화적 관성이 되어가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본래 한민족이라는 강한 내셔널리즘적 정서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내이션이 국가를 구성한다’라기 보다는 ‘국가 구성을 위해 내이션이 접착(Binding) 요소가 된다’라고 설명하는 편이 맞아 보인다.


- 사회조직(Social Organization, 또는 조직 Organization)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수행하는, 개인들이 구성한 체계적 집합체이다. 예를 들어, 정부는 국민의 권리와 복리 증진 및 국가 행정과 안보 등의 원활한 운영 등을 목적으로 사회보장의 지속가능한 운영/전략 산업의 성장 지원/안전 인프라의 확충 등의 목표를 추진하는 사회조직이다. 다만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그 체계성이 반드시 (근대적) 관료제만큼 엄격하게 요구될 필요는 없고, 팀제 조직 등 탈관료제 사회조직도 포함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족을 사회조직으로 볼 수 있을까? 내가 대학에서 여쭤봤을 때 한 교수님은 그렇다고 했다. 기능론적으로 보면, 사회의 유지에 기여하는 모든 기제(機制)가 사회조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경우 가족도 사회조직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맨 처음에 제시했던 베버 등이 제안한 근대적인 사회조직의 정의에 따르면, 가족을 사회조직으로 보기에는 어렵다고 본다. 가족은 특정의 구체적인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개인 간 친밀한 사회적 관계에 기초하고 구성 그 자체가 목적인 집합체이다.


-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는 개인부터 구조까지 다차원적인 모든 사회의 요소 간 상호관계이다. 아직 알아가는 급우 관계와 같은 느슨한 관계부터 수십 년 간 유지된 혼인관계와 같은 견고한 관계가 있다. 또 정부와 성소수자 관계처럼 사회조직-사회집단, 성소수자와 여성 관계처럼 사회집단-사회집단, 대기업과 중소기업처럼 사회조직-사회조직, 사원과 기업처럼 개인-사회조직, 여성 개인과 남성 전체처럼 개인-사회집단, 노인과 노인 인식에서 노후보장에 이르기까지의 총체적 노인 관련 사회구조 즉 개인-사회구조 등 다종다양한 차원의 경우의 수들이 있다.


- 한 개인이 수 개의 집단이나 조직 등에 소속되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다. 개인이 상대적 다수자이면서 상대적 소수자이거나, 사회 내에서의 서로 다른 지위에 따른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거나 할 때 상호교차성적 이해나 역할갈등 해결 등이 요구된다. 참고로 지위(Status)란 사회 안에서 개인이 점하는 위치를 말하는 것이고 역할(Role)은 그 지위에 기대되는 행위를 말한다. 역할행동(역할수행)은 보상을 받는다.


- 사회연결망(Social Network)은 개인, 공동체, 사회집단, 사회조직 등 모든 사회적 구성요소 간의 관계를 연결망이라는 도구로 이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보통 시각화, 계량화라는 이점 때문에 방법론적 차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관계들의 총체적 연계를 중범위 수준에서 표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어서 미시와 거시를 연결해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데에 실익이 있다.


- 사회규범(Social Norm)이란 어떤 가치에 근거하여 질서를 수립하고 그것의 이행을 요구하면서 위배한 경우 여러 형태의 제재가 가해지는 지침, 선언 등을 말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주로 원리 또는 그 원리의 강제성 등에 따른 유형/종류의 총칭이다. 통상 관습, 종교, 도덕윤리, 법 등이 된다.


앞서 역할행동은 역할에 기대되는 행위의 수행이라고 하였는데, 그에 부합하지 않거나 심지어 반대되는 행위를 한 경우 보상이 아닌 비판, 징계, 처벌 등 제재가 가해진다. 이런 점에서 역할의 경우에도 관습이라던가 도덕윤리 등의 형식을 띠고 사회규범이 될 수도 있겠다. 역할 자체가 속하는 사회규범이나 사회제도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면 일탈행동(Deviance)이 된다. 형법의 위배 행위인 범죄(Crime)는 일탈행동 중 하나이며 범죄가 아닌 일탈행동도 당연히 존재한다.


- 사회제도(Social Institution, 또는 제도 Institution)는 원리, 체제, 체계, 기관, 조직 등을 포괄하고 관습, 종교, 도덕윤리, 법 등으로 구체적으로 포섭되기 어려운 모든 사회규범 등을 포함한다. 특히 행위자의 가치 준수 등을 주로 강조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것 예컨대 사회조직에서의 인사제도나 재정제도, 특정 사회조직에 속하는 기관이나 그 기관의 총체까지를 포함한다는 점이 표지로서 중요해 보인다. 사회제도는 사회규범을 포괄하나 모든 사회제도가 꼭 사회규범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가족을 사회제도로 보기도 하는데, 만약 사회적 기능의 차원에서 보면 이 설명이 더 타당해 보인다. 사회조직을 사회적 기능의 수행이라는 점을 표지로 구분한다면, 사회제도와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엄밀히 말하면, ‘가족’이라는 집합체 그 자체는 사회조직이라 보기 어렵지만 이성혼 기초, 중혼금지 등 가족 구성에 적용되는 사회규범들은 사회제도로서 ‘가족제도’로 볼 수 있다.


제도가 있는데 정의(Justice)가 없다는 말은, 예컨대 제도가 잘 작동하여 그 본질인 안정적 운영을 담보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가 가치적/당위적 합치 내지 그 내용으로서의 정의 등에 부합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예컨대 ‘제도가 기능하는 국제사회’라는 말이 반드시 ‘정의로운 국제사회’라는 말과 정확하게 합치된다는 보장이 없다. 또 아돌프 히틀러의 수권법(전권위임법) Ermächtigungsgesetz 은 제도이지만 정의에 정면으로 대적한다.


- 사회구조(Social Structure, 또는 구조 Structure)는 사회적 관계, 공동체, 사회조직, 사회제도, 사회연결망 등 서로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사회 구성요소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구조는 수많은 정형화된 상호작용과 지속성을 특징으로 한다. 정형성과 지속성은 거의 항상 장기간의 구축을 요한다. 그래서 구조화라고 하면 보통 시간이 오래 걸려 고착화되어 가는 현상을 의미한다.


사회는 사회구조와 달리 정형화되지 않은 상호작용까지도 사회적 상호작용이라면 모두 포괄한다고 볼 수 있다. 사회구조는 현대로 오기까지 복잡화, 정교화되고 때로는 붕괴하고 새롭게 형성되는 등의 과정들을 거쳐 왔다(e.g. 앙시앵 레짐의 붕괴와 공화국 등 근대사회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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