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성(Masculinity)에 대한 대안적 관심과 문화적 진보의 본질
https://www.youtube.com/watch?v=DoX1eKWFRWU
https://www.theguardian.com/.../a-lot-of-us-are-in-the...
대강 6년쯤 전에, 더 가디언지의 ‘영국 청년 남성들의 남성성 관련 인식과 고민’에 대한 심층 탐사(?) 기사를 읽었었는데 매우 흥미로웠다.
기성세대와 청년 여성 중 일부는(어쩌면 상당수는?) 청년 남성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 경멸하는 경우가 꽤 많다.
사실 뭐 당연한 것이긴 하지만(청년 남성들이 '도덕윤리적으로 악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세대와 젠더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고용 빙하기와 계층 대물림 시대의 청년으로서 남성들이 처하게 되는 상황은 꽤나 우울한 게 맞다.
더구나 집단주의, 징병제, 가부장제 등의 문화를 지녀 온 상황에서 여성주의의 범람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문화에서의 현대 청년 남성들은 자기 자리를 정의하거나 또는 모든 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면도 많다.
말하자면 사회문화적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이 처한 고통과 달리 남성이 처한 고통은 주목받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젠더의 연구는 여성의 시각에서 본다는 데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성은 자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이해는 인격 등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는 공존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자격 있는 우리’와 ‘자격 없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일방적으로 단정하기보다는, 그들이 처한 문제를 복합적으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여성주의가 발원하고 발전한 역사가 더 긴 서구의 청년 남성들은 어떠한 인식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는 우리나라에도 나름의 시사점을 준다.
미래의 남성성(Masculinity)에 대한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여성주의(Feminism)의 이해나 대의를 자유주의적 차원에서 지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의 남성성(Masculinity)에 대한 덜 비판적이고 더 대안적인 차원에서의 관심이 있다.
내가 보기에 사회주의나 여성주의는 당장의 현실적 대안을 제시한다기보다 근현대 사회와 문화의 이면적 단면 내지 한 본질을 폭로하는 사상이다.
계층이나 젠더, 혁명과 같은 개념들은 현대인의 생활 속에서 곧바로 구체적인 지침을 내려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 선의를 가지고 있는 고용자를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악한 자본가’로 바로 건너뛰어 이해하거나 하는 ‘층위의 오해’가 많이 발생한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이제 그 사상들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혁신적인 설명을 제시할 뿐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대체하지 못했고, 자본가라는 것이 사라지지도 못했다.
젠더는 훨씬 더 깊숙이 생활문화적 차원까지 자연스럽게 뿌리 박힌 것이고, 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어렵다.
남성-여성 관계가 자본가-노동자 관계와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유물론적인 성질을 가지는 계급조차 현실적으로 소멸이 어려웠는데 하물며 젠더는 더욱 어렵다.
한마디로, 하루아침에 갑자기 ‘남성’이라는 젠더가 소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막말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체제에서 자본가들은 모두 노동자가 된다고 쳐도, 남성이라는 젠더는 사라져야 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인지 등의 문제가 남는데 이는 경제나 사회가 아니라 문화나 정체성의 문제이어서 절대 결론이 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밑도 끝도 없이 토론을 한다고 하면 결론이 나지 않는다.
결국 큰 틀에서 문제의식에 대해 이해하고 합의하는 건 필요하되, 구체적인 생활에서의 행동이나 문화는 각자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만약 젠더의 근본적 권력 구조나 문화를 지금 당장 ‘고치려면’, 예컨대 어떤 생활문화 차원에서의 구체적인 행동거지까지 알려주는 지침서 같은 게 있어야 할 수도 있지만 여성주의 내부에서조차 기초적인 이해부터 실천 방안까지 전부 차원이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지침이라는 것을 두는 건 인본주의에 근본적으로 위배된다.
이제까지는 대체로 인식과 문화의 변화를 위한 사회운동의 형태로 제시되어왔으나 젠더는 약간의 지적 이해가 요구되는 개념이라 생활문화와 일상의 차원에서 큰 오해를 받았다.
‘여성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근본적으로 다시 이해하는 것은 좋지만, 제도적 평등이 달성된 상황에서 문화적 평등이라는 추상적 목적을 위해서는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인가?
젠더는 사회화되는 것인데, 그것을 재산처럼 어떻게 처분하거나 할 수도 없는 남성들에게 아무런 대안을 주지 않는 것도 문제가 있다.
남성성이라는 모호한 개념은 섹스와 별도의 젠더라는 개념을 성립시키지만, 동시에 남성성에도 여러 버전이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적 전환의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근본적 난점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시대에 어떻게 성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가의 문제에 있어서의 남성들 특히 내 또래의 남성들에 대한 깊은 공감이 있다.
사실 기성세대 남성들의 경우에는 대체로 사회경제적으로 권력자의 위치에 서 있는 경우(가장, 상사 등)가 상당해서, 젠더적 차원에서의 문화변동에 대한 방파제가 어느 정도 있다.
달리 말하면, 문화변동으로 변화하는 사회규범 같은 것에 대해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만 준수하거나 하는 식으로 종래의 남성성을 보존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그 아랫세대의 남성인 경우는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미디언 중 하나인 마크 매런(Marc Maron, 1963~/미국)의 최근 에스콰이어 인터뷰를 보면 흥미로운 답변이 나온다.
‘(미투 운동과 진보적 중년 남성들 간의 충돌, 그리고 그사이에서의 청년 남성들의 혼란 등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많은 남성들이 우려하고 있죠 – 청년 남성들이 여성과의 상호 관계에서 어떻게 가닥을 잡아야 할지에 대한 혼란을 느낍니다. 전혀 모르겠고 너무 다층적이고 복잡하죠. 그래서 혼란스럽고 두려워합니다. 여성과 대화하기 위해서 ’동의‘를 받아야 하는 건지 어떤지? 이 국면에서 반(反)-깨어 있음이 끼어들어 와서 진보적 흐름을 밀어내죠. 이런 문제에 관해 예전에 제 쇼에서 언급했는데, ’85%는 깨어 있고, 15%는 나 자신에게 맡겨둔다‘라고 했죠.
깨어 있음에 대한 반대(Anti-woke)에 관한 사상 중에는 ’전혀 자기검열을 할 필요가 없다‘라는 주장이 있죠. 그렇지만 아뇨, 문명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많은 단어들을 이제는 사용하지 않게 됐죠. 거기에는 당사자들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었습니다. 단순히 더는 사용 못 하는 게 짜증 난다고 해서 그런 단어의 사용을 정상인 것처럼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저능아(Retard)라는 말을 더는 쓰지 않는데, 반대자들이 ’그냥 단어일 뿐이야‘라는 식으로 어떻게 방어하건 간에, 그걸 다시 정당화하면 학교나 사회에 있는 정신건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과 그 가족에 대한 상처가 되죠. (중략)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관용과 특정 상황에서 적절하게 행동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요. 이제는 그런 게 없어졌죠. 저는 관용이나 공감 없이 어떻게 민주주의가 작동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생활문화에서 소위 PC라 불리는 것은 다소 오해를 받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이런 문제를 너무 직접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 젠더나 장애 등에 관한 차별의 문제는 결국 생활문화의 경우까지 내려오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컨대 ‘실제 모든 남성들은 여성들을 싫어한다’라는 식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다.
또 매런의 인터뷰도 오해받을 수 있는 것이 ‘정신질환을 겪는 이들이 Retard라는 표현을 들으면 마음의 상처를 받기 때문에 쓰지 말아야 한다’라는 게 핵심인 것도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젠더 개념의 의의는 남성과 여성의 사고방식에 대한 차이를 직면하고 그것을 감안한 배려 등이 필요하다는 점에 있다.
연애나 혼인 등 제반 젠더 간 관계에 있어 그간 남성 본위적으로 이해되는 점이 있으니 그런 점을 염두에 두는 것 정도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고 어떤 태도와 언행으로 대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당사자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젠더의 관점에서 볼 때 만약 여성들이 그동안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경우 그러한 권리에 대한 책임도 함께 부담한다고 본다.
학교 체육 수업이나 군인, 경찰 등의 차원에서 여성에 대한 대우는 권익과 책임의 차원에서 모두 형평적이어야 한다.
사소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꽤 무거워서 객관적/생물학적으로 더 근육이나 체구가 짐을 감당할 만한 특정 남성의 경우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로 하여금 짐의 운반 등을 맡도록 하는 것이 일리가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자기 짐이나 업무상 옮겨야 하는 짐 등은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 원칙일 것이다.
여성이 한편으로는 연약하다는 이미지에서 비롯되는 불평등을 타파하자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불평등이 자기에게 이익이 될 때만은 이용하도록 하겠다는 건 매우 부적절하다.
정신질환의 문제에 있어 언어의 문제는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우울증이 겪는 이들에게 ‘남들도 다 그래.’라고 말하는 것은, 내재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문제라기보다 매런의 표현처럼 정상화(Normalize)하거나 아니면 그런 이들을 별종으로 하등 취급하거나 하는 식으로 고통의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어떤 언어적 태도나 표현이 알게 모르게 퍼져 나가면서 사람들의 인식 등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Retard라는 표현은 그간 대개의 시간 동안에 정신질환을 사회적 낙인처럼 생각한 문화의 구체적인 요소가 된다.
‘마음의 감기’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그 말도 우울증이라는 공통의 질환명이 내포한 고통의 개별성을 다소 깎는 듯한 말일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을 근본적으로 규제하는 어떤 법도 없고 없어야 한다.
다만 말하기 전에 한 번쯤은 더 생각해 보라는 의미이다.
마초성을 강하게 내세우는 남성들에게도 실은 연약한 면이 있는데 사회화된 대로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감추는 것일 수 있고, 누구나 신체적 장애나 정신질환이 자기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공감과 배려의 정서를 넓히고, 자기 자신을 직면하면서 타인에 대한 이해도를 깊게 만들어 나가는 것 다시 말해 인본주의(Humanism)를 사회문화에 더 자리 잡고 증진하자는 취지와 핵심을 보다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