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블레어의 가자 평화 기구 참여와 '진보 베이비부머 마키아벨리주의'
평화주의자는 이상주의자라는 생각이 있지만, 실은 그들이 가장 현실주의자들이다(국제관계론에서의 현실주의가 아니다). 그들의 반전주의는 비인간성의 극치에 대한 경험과 전쟁이 가져오는 깊은 실존적 고통 그리고 트라우마에서 비롯된다. 규범 기반 국제 질서는 이러한 인류 절멸의 위기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문명적 다짐이다.
토니 벤(1925-2014, 영국 노동당 하원의원)은 1998년 이라크 공습 비판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벤은 2차대전 때 공군에서 복무했다)
“전쟁이 우리 아이들에게 컴퓨터 게임이고 흥미로운 뉴스 기삿거리가 되는 이 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바보들인가?”
정확하게 말하면, ‘미숙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토니 블레어가 도널드 트럼프가 만든 소위 ‘가자 평화 기구’라는 것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한 마지막 정마저 떨어졌다.
그는 내게 최초로 진지하게 정치이념이라는 차원의 영향을 준 이였다. 물론 그때에도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런데 (어떤 ‘국정 경험에 기반한 고도의 숙고의 판단’이라는 게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트럼프의 위협적인 팽창주의와 힘의 논리와 포퓰리즘에 아예 반사적 지원사격을 해 버렸다.
블레어가 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코소보, 시에라리온 등 군사적 개입을 선호했는지 그리고 총리 사임 후에도 독재자들에게 경제정책 자문을 하면서 돈을 받는 등의 논란을 가져왔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철학을 알 필요가 있다.
그는 이라크전의 경우에도 대량살상무기 문제는 직접적 명분일 뿐, 근본적으로는 세계적 공동체라는 전제에서 선진국은 군사적 개입까지 동원해서라도 인도주의적 위기를 해소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대량살상무기 정보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다고 해도 자신의 결정이 틀린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하지만 비인도주의적인 수단으로 인도주의적 목표를 달성할 수는 없으며, 달성한다 해도 오래 가지 못한다.
토니 블레어나 빌 클린턴은 전형적인 서구 선진국 중산층 출신의 베이비부머 마키아벨리주의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 윗세대(전쟁/냉전 세대)나 아랫세대(불황/불평등 세대)보다 훨씬, 어쩌면 세계사에서 인류 문명이 최고점을 찍은 시대를 만끽한 이들이었으며 낙관적이고 실용적으로 보이고 싶어 했다. 그들은 문제해결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 없고 그것을 실용이라고 말한다.
문제해결은 중요하지만, 그것을 ‘올바르게’ 또 ‘더 큰 문제들을 놓치지 않고’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그 해결이라는 결과는 불가능하며 가능해도 오래 갈 수 없다. 정반대의 정치이념을 지녔지만 윗세대인 마거릿 대처(1925-2013, 영국)와 토니 벤은 공통적으로 후세대에 ‘원칙’이라는 게 없다는 점, 그들의 공허한 허영과 과시를 지적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86세대의 일부에게서도 그런 게 짙게 보인다고 본다.)
토니 블레어나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비슷한 세대의 서구 선진국의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개발도상국은 우선 발전이 먼저이고 민주주의는 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모델이 성공한 경우가 거의 없고, 그나마 성공한 경우인 한국조차 과연 그 결과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평가해야 하느냐에 의문 부호가 달린다.
무엇보다 그런 주장을 하는 본인들은 안락한 서구 사회에서 중산층 배경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정작 본국의 서민 노동 가계의 삶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이 점은 변호사 출신 아버지를 둔 변호사 출신인 토니 블레어가 노동계급인 정치인 동료의 이야기를 듣고 놀란 데에서도 방증된다. 말하자면 '강남좌파'인 셈이다.).
세계문제를 무슨 나라 육성 게임 정도로 생각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나르시시즘적인 면모도 은근히 보인다. 이 ‘Statesman syndrome’은 결국 줏대 없고 결과도 없는 결과주의로 귀결되었다. 어떻게 보면 토니 블레어는 나의 사회민주주의(정확히는 '제3의 길 Third Way')에 대한 마지막 호의와 첫 적의를 동시에 들게 한 동인이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독자적 가자 평화 기구 구성과 세계 주요 인사들의 여기에 대한 참여는 다자주의, 국제연합, 그리고 규범 기반 국제 질서를 훼손하는 행위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제법과 다자주의적 합의에 의해 해결되어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 실용을 빙자해 힘이나 이익만으로 해결하려 드는 경우 잠시 소강상태가 지속되다가 또다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블레어는 이미 자기 임기 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조지 W. 부시 치하 미국의 패권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지만, 결국 엉뚱하게도 힘의 논리가 아니라 국제연합과 국제사회를 탓하게 되었다. 비효율성의 논리이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과 이후 중동의 정세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레짐 체인지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지역에서의 여러 주체와 맥락, 구조와 문화 등의 복합적인 양상, 체계 등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하늘에서 내려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이식할 수 있다는 발상은 이미 실패했음이 드러났다.
게다가 그런 상태에서 결국 비용 청구를 감당하지 못하고 물러나면 더 큰 카오스가 닥치고 그게 종국에는 이민과 난민의 증가 등으로 인해 서구에게 피해로 돌아온다. 그래 놓고서 뻔뻔스럽게도 서구는 자기들의 문을 걸어 잠근다.
토니 블레어는 군 경력이 없다. 군 경력이 있어야만 군통수권자가 되거나 외교안보정책을 결정하는 지위에 있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전쟁의 참상에 대한 트라우마라던가 군이라는 조직의 ‘특수 논리’의 엄혹함을 당사자로서 겪어보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지만 전쟁의 참상을 극도로 경계하는 건 오히려 좋은 것이다(물론 너무 멀리 가서 무턱대고 쌍방 군축이 아닌 자국의 일방 군축을 주장하는 건 불가하다). 하지만 전쟁을 겪어보지 않고 전쟁을 '어쩔 수 없는 수단' 정도로 생각하는 위선이 현대사회에서 제일 위험한 심리 중 하나다.
단지 ‘시찰’만으로 '알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라는 말을 함부로 하는 건 안 된다. 그는 대총리질의 때마다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목숨을 잃거나 한 군인들을 추모하는 언급을 했는데, 아마도 ‘숭고한 희생’으로 덮으면서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죄책감을 자기의 신념 강화로 덮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런 비슷한 서사로.
두말할 나위 없이 이는 매우 그로테스크하다.
*정책적으로 보면, 예를 들어 '적극적인 국가의 산업기획'은 개발독재에서도 사회민주주의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국가 개입은 참으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영국의 신노동당 내각 시절에는 테러와의 전쟁의 일환으로서 ID카드제도 도입이 시도되었다.
사회민주주의도 모든 이념과 마찬가지로 주류화/집권하면 이런 식으로 감시국가라던가 하는 것까지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상당하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설령 원칙이나 명분일 뿐이라 해도 내가 중시하는 개인의 자유를 못 박지 않는 정치인이나 정당에 대해서는 일단 거리를 두고 의심을 하게 되었다. 그 잘난 '공동체주의'가 냉혹한 정치와 정책의 세계에서 어떻게 변질되는지를 봤기 때문에. 적어도 자기가 주장한 바에 대한 준수 여부를 따지는 게 처음부터 주장하지 않았지만 그냥 '내장되어 있다'는 정도로 모호하게 전제된 경우보다 확실하게 타격점이 되니까.
더구나 오늘날 포퓰리즘과 힘의 논리, 내셔널리즘, 기술중심주의 등이 범람하는 양상을 보면... 원칙을 분명히 세우고 이를 고수하는 것이 훨씬 중요해졌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