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공화주의 등에 대한 자유주의적 반격

자유주의를 위한 변론

by 남재준

포퓰리즘을 언뜻 유사해 보이는 개념들과 이상하게 뭉뚱그리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포퓰리즘의 '엘리트에 대한 도전'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그냥 포퓰리즘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포퓰리즘이어야만 엘리트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대중이라고 해서 특별히 정당성이 있게 되는 것도 아니다.


한 개인으로서, 또 생활자로서의 시각과 경험에는 분명 엄청난 정치사회적 가치가 있다.


비록 정치와 정책 그리고 행정이 아주 거대하고 추상적인 영역에 있기는 하더라도 결국에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정확히 그 이유 때문에 정치적 또는 정책결정이 '희망 회로' 등에 의해 함부로 이루어져서는 아니 되고 현실적으로 그 결정의 적용을 받게 되는 다양한 주체들의 입장에서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를 면밀히 따져야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생활자들이 직접 정책결정을 한다는 게 반드시 정당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생활자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소시민이라는 의미인데, 공적 결정은 소시민적이면 안 된다.


그런 식으로 가면, 예컨대 경제적으로 보자면 노동시간 규제 같은 건 변수라는 조건 하에서 움직이는 노동자로서의 생활자 개인의 입장에선 손해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공적인 차원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있다.


생활자로서의 개인의 사정을 알고 결정하는 것과 큰 틀에서 이론적/통계적 등의 차원으로 알고 결정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가끔은 이념이라는 전제가 개인에게 환상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세계관과 신념을 가지는 것과 그 신념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복잡한 맥락 속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는 다른 문제이다.


엘리트의 탁상 리더십도, 대중의 소시민적 합리성도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최근의 사악한 문제(Wicked problem)들은 가치 등이 연계되고 다차원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등 복잡하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대안 결정에 시간이 요구된다.


더구나 우리가 채택한 정치체제가 민주정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현대적 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공존과 병립시키는 한도에서 최대한으로 보장할 '여지가 있는' 유일한 정치체제이다.


그러나 여지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현된다는 보장은 없다.


민주주의라는 '체제'는 자유주의라는 '원리'를 지향하고 준수하며 작동해야만 유의미하게 된다.


포퓰리즘은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라고도 볼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관용, 대화, 소수의견 존중 등은 민주주의 그 자체에 내장된 것이라기 보다는 근대 이후 자유주의와 긴밀히 결합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고대 그리스 아테네 민주정 등도 당연히 민주정이다.


단순히 고대와 현대의 차이가 아니라, 그 차이의 내용이 정확히 자유주의라는 점이 중요하다.


고대 민주정에선 페이시스트라토스 등 참주들이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포퓰리즘을 선보이기도 했다.


강력한 대중과 그들이 힘을 모은 강력한 참주.


고대에는 그럴듯할 지 모르겠지만, 현대에 이와 비슷한 역학 구도를 재현한다는 건 고도로 위험한 발상이다.


공화주의라는 것도 모호하긴 하지만 구태여 따지자면 '왕정이 아닌 시민적 덕(Civic Virtue)을 가진 공민(公民)의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비지배 자유 등의 개념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긴밀한 접점을 보여주긴 하지만 구태여 양자를 분리하고 보면 공화정이라고 해서 개인의 자유를 반드시 존중하거나 보장하게 되리라는 법은 없다.


로마 공화정 등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냥 과두정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공동체적 가치를 앞세우는 한 개인의 자유는 언제든 침해된다.


민주주의는 최악이 아닌 것이지 최선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


막말로 적어도 민주정치체제 안에서 권력분립이 유지되는 한, 견제를 집중적으로 받아야 하는 건 선출되지 않았다는 점은 둘째 치고 태생적/본질적으로 수동적인 사법보다는 국민의 대의라는 위임/권위를 남용할 여지가 큰 입법이나 행정이다.


어떤 사람은 자유주의 헌정 질서가 '사법부의 현자들'에게만 국가를 맡겨 놓느냐는 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민이 더 정치에 참여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과정과 결과가 나타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자유주의가 딱히 국민을 정치에 참여하지 말라고 한 적도 없다.


오히려 자유주의는 자신의 권리 보장과 행사를 권장하는 입장에 있다.


결국 균형과 질(Quality)이 중요하다.


숙의(Deliberation)을 통해 정치사회적 담론의 품질 관리를 해야 하고, 정치적 리더십은 이러한 논의에서 의제나 대안을 제안하고 논점 일탈을 막는 등 주도하는 역할을 보여야 한다.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되 계속 스스로의 의견이나 행동 등을 복합적으로 성찰하고 반성하며 타인을 관용(Be tolerant)하는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


어느 일방이 무조건 치고 나가려고 하는 순간 어느 시점의 파탄이 예정된 것이다.


물론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성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완전성에 안주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향해 내달리는 건 더 말이 안 된다.


개인 간, 국민과 국가권력 간, 삼권 간 등 여러 차원에서의 균형이 중요하다.


또 엘리트의 정책결정이나 대중의 정치 참여 그 자체보다도 그러한 것들이 형성해 나가는 담론의 내용과 질이 중요하다.


생활자의 감수성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정책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며 어떤 면에선 그래서도 안 된다.


반대로 정책이 생활자적 현실 감각과 합리성을 결여하면 아예 정책을 시행하지 않느니만 못한 파탄적인 결과를 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The Golden Mean, Doctrine of the Mean)이라던가 공자의 과유불급(過猶不及)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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