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正朝)에 대한 낭만화를 넘어

by 남재준

https://youtu.be/yDHEaB7JCeo?si=r6EpF5YDmWOWC_Oe


나는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는데, 정조에 대한 다소 식상하고 자의적인 이해와 해석에 바탕을 두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정조를 ‘비운의 개혁군주’로 보는 서사를 전제로 여기에 노무현-문재인을 갖다 붙이는 식의 이상한 (민주당 측의) 자의적 사관. 과거 인물의 낭만화는 역사의 현대적 의의라는 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인물의 어디까지가 명이고 어디까지가 암인지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사람의 인생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진실은 항상 복잡미묘하다.


기본적으로 정조를 이해하는 틀로서 종래에 제기되어 온 일부의 견해는 잘못된 측면이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말과 달리, 세종과 마찬가지로 정조는 안정적인 왕권 기반 위에서 즉위했다. 조부 영조는 52년간 집권하고 붕당을 아예 전체적으로 눌러버리고 신축환국과 임인옥사(삼수의 옥) 등에 대한 자신과 노론의 신원을 이루어냈다. 사도세자를 죽이고도 그 아들을 끝까지 보호해 결국 용상에까지 앉혔다는 것 자체도 영조의 강력한 왕권을 방증한다고 본다.


또 정조가 즉위했을 때는 이미 한참 전에 노론 일당전제화가 완료된 상황이었다. 붕당정치 자체를 탓한 영조는 완론탕평(강경 배척 + 온건 통합)을 주도해 노론 완론을 중심으로 소론 완론을 더하여 탕평파를 만들었다. 이는 실질적으로는 인격적으로 완벽하다고 하기 애매한 군주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게 했다. 말년에는 풍산 홍씨나 경주 김씨 등 세도정치의 프로토타입이 되는 세력들을 띄우기도 했다. 풍산 홍씨는 기본적으로 정조의 외가였지만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가담했고 아우 홍인한은 정조의 대리청정을 막아섰으므로 숙청되었다.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는 정조의 즉위까지는 협력했지만 정조가 척신정치를 배척하면서 뒤통수를 맞았다. 정작 정조는 말년에 차기 국구로 김조순을 내세우면서 척신정치의 부활을 가져올 여지가 있는 선택을 한다.


왕은 탕평이나 민생 못지 않게 추숭을 원했다. 영조가 신원을 원한 것처럼. 하지만 점진적으로 어떻게든 논리와 명분과 정치적 구도를 만들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고, 죽기 직전의 오회연교에서 밝힌 ‘대의리’조차 굉장히 우회적일 수밖에 없었다. 영조가 제시한 '임오화변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모년의 대의리는 벽파가 강력하게 내세우는 바가 되었다. 정조는 이를 어떻게든 완화하고 점진적으로 추숭의 새 의리를 모두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한참 전에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세력이 되어 있던 남인까지 끌어왔다. 소론과 남인 상당수는 이미 이인좌의 난(무신란, 1728)이나 나주괘서 사건(1755) 등으로 자멸했다. 역당(逆黨)이 된 상황에서 영남남인과 분리해 근기남인은 채제공과 이가환 등을 통해 정조조에 재기를 도모했다.


정조는 미묘하게 중도적이었다. 남인들 중엔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이가환이나 정약용처럼 서학에까지 깨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조는 문체반정 등 유교 이념을 되살리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세력들을 법가적으로 막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조는 강한 왕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영조의 대의리를 넘어서지 못했다. 맨 처음 순조의 후견인이 된 정순왕후는 벽파를 여당으로 하여 정조가 모년의 대의리를 인정해야 했던 부분을 강하게 내세웠고, 철렴 후 집권한 김조순과 그와 지분을 나눈 세도 가문들은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노론=벽파, 소론=시파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정조가 순조의 후견인으로 지목한 김조순 그리고 김상헌-김창집-김수항 등을 잇는 안동 김씨 가문은 이때 노론 시파에 속했다. 정조는 스스로 벽파라고 언급하기도 했다(심환지에게 한 이 말은, 실은 벽파에게 '나도 그 의리를 왜 모르겠느냐. 하지만...'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 깐 포석이었을 것 같다). 또 노론=사도세자 반대파, 소론=사도세자 찬성파 같은 것도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 영조조의 왕권은 이미 강력했고 세자의 문제는 영조와 세자의 문제였을 뿐, 전체적으로 볼 때는 신하들이 이를 두고 감히 다투거나 할 이해도 힘도 없었다.


역사는 명과 암을 함께 보아야지, 이런 유의 책들은 일방적으로 정조를 ‘개혁 군주’라는 찬사 속에서만 이해하려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정조도 어디까지나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국가의 모범적 군주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정조도 한 인간으로서, 사도세자 추숭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면도 있었다. 기실 정조 말년에 완공된 수원화성도 선위와 추숭을 염두에 둔 기획인 면도 상당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미 건강이 악화되고 노화가 가속화되며, 채제공이나 이가환 등 자신의 의중을 온전히 도울 수 있는 신료들이 끝내 구조적 배척을 이겨내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김조순에게 순조의 후견인을 맡기고 추숭에 집중하려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정조는 끝내 조선 후기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해내지는 못했다. 정조의 의지를 이어받은 김조순은 무난하고 처세도 뛰어난 능신이긴 했지만, 결국 정조의 염원을 실현하지 않았고 조선을 가문이 주도하는 국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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