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평전 8. 제갈량 諸葛亮 (2)

by 남재준

1. 와룡 臥龍이 일어서다


207년에 제갈량은 남양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고 있던 유비는 이전에 서서가 제갈량을 ‘와룡(臥龍)’이라며 추천한 것을 바탕으로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통해 제갈량을 맞아들였다.


그야말로 ‘주군이 인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인재가 주군을 선택’할 정도로 제갈량이 뛰어난 인재 중의 인재였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위략>에서는 유비와 제갈량의 만남을 약간 다르게 묘사한다.

여기에 따르면, 유비가 번성에 주둔할 적에 제갈량은 형주로부터 북향하여 유비를 만났다.


이는 조조가 하북을 넘어 형주를 넘보는 상황에서 유표가 이를 막을 힘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제갈량에 대해 잘 몰랐고 일개 유생으로만 생각해 다만 여러 사람과 더불어 손님으로 맞았다.


모임이 종료된 후 단둘이 남았는데 서로 말이 없다가, 유비가 소의 꼬리털을 가지고 장식품을 짜기 시작했다. (유비는 짐승의 털이나 새의 깃으로 장식품을 짜는 취미를 지녔다고 한다)


제갈량이 말하기를 ‘장군께서 원대한 뜻이 있다고 하더니만 털을 맺는 것이었습니까!’ 하니 유비가 짜던 것을 버리고는 ‘그게 무슨 말씀이오. 내 잠시 근심을 잊으려던 것뿐이오.’라고 하였다.


제갈량이 묻기를 ‘장군께서 헤아리기에 유표를 조조에 비하면 어떠합니까?’하니 유비가 답하기를 ‘미치지 못하오.’라고 하였다.


또 제갈량이 ‘장군 자신은 어떠합니까?’ 하니 유비가 재차 답하기를 ‘미치지 못하오.’라 하였다.


이에 제갈량이 말하기를 ‘지금 두 분이 모두 조조에 미치지 못하고, 장군의 군사는 수천 명을 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대로는 적을 맞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유비가 이에 대책을 묻자, 제갈량이 말하기를 ‘지금 형주에는 백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호적에 실린 자는 적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대로만 동원합니다. 유표에게 말하여 노는 인력을 모두 올려 쓴다면 군사들을 늘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유비가 이를 수용하니 군세가 커졌다.

이 일로 말미암아 유비가 제갈량의 영략을 알고 그를 높이 대우하였다.

이는 또한 「구주춘추」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배송지는 제갈량이 출사표에서 삼고초려를 언급했음을 들며, 제갈량이 유비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고 본다는 견해를 밝혔다.


제갈량은 형주에 있을 때 유표의 계실 때문에 위기에 처한 유표의 장자 유기에게 넌지시 구명할 계책을 내주기도 했다.


이때 제갈량은 유기의 누차에 걸친 간곡한 부탁에도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는데, 결국 유기가 생각해낸 계책이 자못 문학적이다.


유기는 제갈량을 데리고 후원을 산책하다 누각에 올라 연회를 베풀다 사람을 시켜 사다리를 치워 버리고는 ‘위로 하늘에 이르지 않고 아래로 땅에 닿지 않으니 이제 그대가 말하더라도 그대의 입에서 나와 제 귀로 들어갈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제갈량은 유기에게 형주를 탈출하라고 돌려 말했고, 유기는 이를 따랐다.


2. 효웅 梟雄을 저지하고 천하를 삼분하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제갈량은 손유 연합을 성사시키고 나아가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남하를 결정적으로 저지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208년 유표 사후에 형주를 이어받은 유종은 조조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항복해 버리니, 유비의 상황이 더욱 위태로워졌고 또한 강동의 손권도 위기감이 커졌다.


유비는 유기에게 의탁하는 상황이었으나 손권이 유기와 손을 잡기는 어려웠다.


이는 손권의 선친인 손견이 원술의 사주 하에 형주를 쳤을 때 유표의 부하 황조에게 손견이 목숨을 잃어 가문 간 원수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제갈량은 나서서 손권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의 대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제갈량 : 지금 장군과 유예주(예주목 유비. 그러나 실제로는 유비는 이미 예주를 잃어 형주로 도피한 상황이었다.)는 조조와 천하를 다투고 있습니다. 이제 조조는 형주까지 점령했으니, 그에 맞서는 영웅들은 용병할 곳이 없습니다. 장군께서는 자신의 역량을 헤아려 대처하셔야 할 것인데, 만약 조조에게 맞설 수 있겠거든 맞서고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면 조조를 섬기는 것이 옳습니다. 장군께서는 겉으로 복종할 것처럼 내세우나 속으로는 망설이십니다. 일이 급한 가운데 결단하지 못하니 화가 닥칠 것입니다.


손권 : 그대의 말대로라면 유예주야말로 어찌 조조를 섬기지 않는 것이오?


제갈량 : 유예주는 황실의 후예로서 뭇 선비들이 추앙하는 바가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듯 하는 분입니다.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하늘의 뜻일 뿐 어찌 남의 아래로 들어가겠습니까?


손권 : 나는 오(吳)를 지니고 10만 군사를 통제하는데 어찌 남의 밑으로 들어가겠소? 내 계책은 이미 정해졌소! 유예주가 아니면 조조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오. 그러나 그는 이제 막 패했으니 어찌해야 하겠소?


제갈량 : 지금 돌아온 병사와 관우의 수군을 합하면 1만이고, 유기가 거느린 군사도 1만입니다. 조조의 군대는 멀리서 와 피폐해졌고, 듣기로 유예주를 추격해 경기병으로 하루에 300여 리씩 왔다고 합니다. 북방 사람들은 수전에 익숙지 않고 조조에 귀부한 형주민은 단지 군세에 핍박당한 것이지 마음으로 복종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지금 장군께서 명하여 유예주와 힘을 합하여 조조와 싸우게 하면 그를 격파할 수 있습니다. 조조가 북쪽으로 돌아가면 유예주와 장군의 세력이 강해져 정족(鼎足, 솥발)의 형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손권이 제갈량을 알아주는 것을 보면, 제갈량이 왜 손권을 섬길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때 장소가 손권에게 제갈량을 추천했지만 제갈량은 머무르기를 거절했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손 장군은 가히 군주요. 그러나 그의 도량을 보면 나를 어질게 대할 수는 있어도 내 기량을 다하게 할 수는 없소.’


이는 원준(袁準)의 「원자 袁子」에 등장하는 말이다.


배송지는 원준이 대체로 제갈량의 사람됨을 심중하게 평가하면서도 이 지점에서는 어긋났다고 보았다.


제갈량과 유비의 관계는 이미 생사화복을 함께하는 정도였는데, 제갈량이 손권을 섬길 것을 고민했던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일화는 이상하다는 것이다.


제갈량이 주인을 고르는 마음을 품었을 리 없으며, 손권이 기량까지 다하게 할 수 있도록 했다 하더라도 그 거취를 뒤집었을 리는 없다고 하였다.


배송지의 이러한 견해는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제갈량이 주인을 고르는 마음을 품었다고 하더라도 유교적 의리를 다소 제하고 본다면 꼭 변론의 필요가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본다.


어쨌든 제갈량은 단호히 거절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또 제갈량은 단지 ‘쓰이는’ 인재가 아니라, ‘쓰일 곳을 찾아가는’ 인재였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제갈량은 인재요 사람이니, 응당 자신의 기량을 펼칠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기를 원할 수 있다.


이 지점은 미묘한 자신감이긴 하지만 반드시 자만이라거나 유비에 대한 마음을 가볍게 생각했다고까지 볼 필요는 없다.


3. 촉한의 대들보가 되다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참패하고 철군하니, 유비는 장강 이남을 장악하며 제갈량을 군사로 삼아 영릉-계량-장사 3군을 감독하고 통제하도록 하였다.


211년에 익주목 유장이 유비를 불러들여 장로를 공격하도록 하니, 제갈량은 관우와 더불어 형주를 지켰다.


유비가 유장을 공격할 때 제갈량은 장비, 조운 등과 함께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각 지역을 평정하고 유비에게 합류해 성도를 접수했다.


유비가 익주목이 된 후 밖으로 출병할 때마다 제갈량이 성도를 진수하며 군량과 병사를 대었다.


221년 유비가 촉한을 건국하고 제위에 오를 때 제갈량은 한을 재건한 세조 광무제 유수의 예를 들어 처음에 이를 수용하지 않은 유비를 설득했다.


유비가 제위에 오른 후 제갈량을 승상으로 임명했고 더불어 녹상서사를 겸하도록 하였다.


이릉대전에 참패한 후 223년 봄에 유비는 성도에 있던 제갈량을 불러 후사를 맡겼다.


유비가 이르기를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고, 그가 재능 있는 인물이 아니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도록 하시오.’ 하였다.


동진의 인물인 손성은 이러한 유비의 탁고를 비판했다.


그의 요지에 의하면 이렇게 말함으로써 유비는 제갈량의 마음을 더욱 굳게 하고 촉을 단합시키고자 했다는 것인데, 군주된 자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충성스럽고 현명한 탁고대신이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찬탈의 명분을 제공해주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비는 거짓된 말을 했으니 이는 고명을 남길 때는 착한 말을 해야 한다는 옛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유선이 어리석고 나약하며 제갈량이 매우 뛰어나 실제로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어도, 그렇지 않으면 의심과 틈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고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과한 비판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 죽을 때는 말이 선해진다(人之將死 其言也善) _ 「논어」 태백편]고 한다.


대개 사람은 인생의 끝자락에 가 닿으면 더는 권력이나 부 같은 일장춘몽에 매달리지 않고 오직 진솔하게 인간성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유비 역시도 선의를 가지고 말한 것이었으리라고 본다.


유비는 제갈량과 생사화복을 나누었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고, 그러니 죽기 직전까지 일부러 없는 말을 지어내 가면서까지 제갈량을 시험하거나 부채감을 남기려고 하진 않았을 것 같다.


모든 조직문화나 인간관계는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특성과 ‘행위의 문법’에 따라 ‘해석 매뉴얼’이 달라진다고 본다.


유비와 제갈량의 경우에는 이해 중심보다는 의리 중심으로 왔고, 서로에 대한 믿음이 돈독했다.

제갈량은 더 강대한 조조나 손권을 따를 수 있었음에도 끝내 유비를 따랐고, 인화력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유비에게는 막다른 길에 이른 자신을 구하고 세력을 반석 위에 올린 제갈량이 더없이 소중했을 것 같다.


또 유비는 의리와 감성이 풍부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예순이 넘었고 무엇보다 말년에 매우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보면서 크게 무너진 상황이었다.


달리 말하면 감정이 풍부한 사람의 내면에 크게 무너지고 지쳐 있는데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냥 마음에 있는 말이 나온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물론 엄밀히 말해 유비가 정말 말한 그대로 유선이 여의치 않으면 제갈량이 스스로 황위에 오르라는 뜻을 비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상황까지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언행의 적절성을 평가할 때는 그 행위자(들)의 고유한 특성, 상황적·사회문화적 맥락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유비의 입장에선 아무리 제갈량을 믿는다 해도, 근본적으로 16세의 준비되지 않은 후계자를 두고 삼국 중 제일 열세인 촉한이 과연 끝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복잡하고 불안한 상태의 죽기 직전에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그러니 유비의 말은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할만 한 말이었다고 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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