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평전 8. 제갈량 諸葛亮 (4)

by 남재준

1. 상대를 읽는 싸움 (제5차 북벌 (234년))


촉으로서는 사천 분지를 둘러싼 험준한 지형이 양날의 검이었다.


방어에는 유리했으나 공격에는 불리했고 언급했듯 제일 큰 문제는 보급이었다.


그러니 제갈량의 입장에서는 속전속결이 좋았고 마지막 전투에서는 거의 생이 다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조급해졌다.


하지만 이미 중원을 차지하고 앉은 사마의와 위의 입장에서는 그저 지키다가 적이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234년 봄에 제갈량은 다시 야곡으로 진군했다.

그의 생애 최후의 북벌이었다.


싸우지 않고 이기고 싸우기 전에 이겨놓는 것이 병법의 기본이니, 사마의는 지구전에 돌입하면서 대군의 위용을 보여 촉군에게 겁을 주려고 했다.


위수를 사이에 두고 남서(오장원)-북동(미)으로 제갈량의 촉군과 사마의의 위군은 대치했다.


미는 맨 처음 제갈량이 북벌을 개시할 때 타깃으로 위장했던 곳이었다.


이제 그 인근이 임종의 장이 될 참이었다.


험한 경로로 인한 고난도의 보급은 항상 제갈량의 근심거리였다.


이에 이번엔 아예 그곳에 둔전을 두고 자급자족하도록 하였는데, 위수 강변의 백성들과 촉군은 서로 편안하게 지냈다.


제갈량이 부리는 군대는 매우 정제되고 규율이 잘 잡혀 있다는 묘사가 1차 북벌 때에도 나온다.


사마의는 위의 대촉-대오 기본 전략대로 지구전으로 갔는데, 초조한 입장의 제갈량은 계속 도전장을 날렸다.


이에 사마의는 표를 올려 교전을 허락해 달라 청하였으나 조예는 오히려 신비로 하여금 부절(군사권 위임의 징표)을 지니고 가게 하여 응전을 확고히 제지했다.


강유가 제갈량에게 말하기를 ‘신비가 부절을 가지고 왔으니 그들은 아예 출전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제갈량이 답하기를 ‘사마의는 본래 싸울 뜻이 없었으나 구태여 조정에 표를 올려 응전의 허락을 구한 것은 다만 그의 군사들에게 굳셈을 보이려는 것뿐이네. 본래 장수가 군중에 있으면 군주의 명이 있어도 받지 않는 법일세. 만약 아군을 능히 제압할 수 있다면 뭐하러 천 리 길을 가서 출전을 청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부분에서 사마의의 의도에 관한 해석은 이전의 사마의 편에서 이미 언급했다)


2. 그리 살아서야 어찌 오래 살겠는가?


사마의가 ‘제갈량이 오래 살지 못하겠구나.’라고 말한 일화는 「위씨춘추」에 등장한다.

제갈량의 사자가 사마의를 찾아왔는데 사마의는 군무(軍務)는 묻지 않고 다만 제갈량의 평소 생활(침식)과 사무량을 물었다.


사자가 답하기를 ‘제갈 공께서는 일찍 일어나 늦게 잠자리에 드시고, 20대 이상의 벌은 (대소사를 가리지 않고) 모두 직접 챙기십니다. 먹는 음식은 몇 승조차 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마의가 답하기를 ‘제갈량이 곧 죽겠구나.’라고 하였다.


참고로 1승은 약 0.2L라고 하고 이는 200ml 종이컵 1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대강 2~3승이라고 하면 400ml~600ml 정도가 나오는데, 공깃밥 한 그릇이 대강 300ml라고 하므로 제갈량은 잘해야 하루에 한 공기 반 정도를 먹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일반적으로 현대인이 먹는 양의 절반밖에는 먹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도 제갈량은 국정의 대소사를 모두 챙기면서 전쟁 지휘까지 수행하며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고 하니 건강이 좋으면 이상할 것이다.


짠하면서 비극적이다.


제갈량은 촉한이라는 천구를 홀로 떠받치는 아틀라스 같은 존재였다.


그토록 염원한 북벌을 이루기는커녕 결국 제갈량 사후 불과 30여 년 만에 촉한이라는 국가 자체가 멸망했으니, 허망한 일이었다.


한편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여인의 물건을 보내 일부러 자극한 일은 「진양추 晉陽秋」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제갈량이 도전장을 보내며 사마의에게 건괵을 보냈는데 이는 여성용 두건이었다.


사마의는 끝내 격분하며 출전하려 했으나 조정에서 보낸 신비가 부절을 들고 군문 앞에 서서 버티기까지 하니 사마의는 출병을 포기했다.


이를 보고 들은 군사들의 사기가 높아졌으니 큰 책략의 심원함이 이와 같다고 하였다.


3. 백구과극 白駒過隙


제갈량은 234년 8월 28일(양력 10월 8일)에 대치 약 100일 만에 결국 군중에서 유명을 달리했는데, 그의 나이 53세였다.


유비를 따라 남양으로부터 출세(出世)한 후 27년 만이었다.


수많은 전투와 정사(政事) 그리고 대업을 뒤로 한 지난날들을 되짚어보며, 끝내 넘지 못한 위수를 바라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이루고자 한 대업은 한 천재가 짊어지기에는 버거운 일이었고, 그의 비극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위서」에서는 제갈량은 끝내 이길 수 없게 되자 근심과 분노로 피를 토하고 진영을 불사르고 달아나다가 계곡으로 들어섰을 때 객사했다고 기록했다.


「한진춘추」에서는 제갈량이 곽씨의 오(塢)에서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오(塢)란 기본적으로는 요새를 의미하는데, 이는 유수오와 같이 둑이나 보루와 같은 방벽 같은 형태부터 미오와 같이 성의 규모를 지닌 것도 있었다고 한다.


군대가 주둔하며 군량을 자급자족하여 둔전을 치고 또 그 마을 주민들과 거의 일체화되면 성과 같이 견고하게 큰 지역이라고 보기는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단기적으로 치는 진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대규모의 오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건축이 활성화되었는데, 이는 전란이 상시화된 시대이다 보니 모든 단위의 지역 공동체에 자경(自警) 역량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배송지는 「위서」의 기록을 부정했다.


당시 양군의 형세가 승부를 이미 가를 수 있을 만큼의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제갈량이 ‘피를 토했다’고 한 것은 결국 그가 스스로 패망한 것을 두고 「위서」에서 과장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무릇 공명의 지략으로 어찌 중달 때문에 피를 토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위서」에서 ‘계곡으로 들어간 뒤 죽었다.’라고 한 것은 촉인들이 계곡으로 들어간 후에야 상을 치르기 시작한 데서 비롯된 오해라고 보았다.


제갈량 사후 그의 위엄을 빌려 사마의가 추격해오지 못하도록 한 이야기는 「한진춘추」에 등장한다.

그런데 미묘한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직접 철군 작전을 양의에게 맡기지만 정사 「삼국지」의 촉서 제갈량전에는 그런 말이 없다.


다만 장완과 비의를 연이은 후계자로 지명하고 그 뒤에는 달리 말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장완은 성도에 있었기 때문에 제갈량 사후 자연히 비의, 강유, 양의 등이 철군을 지휘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이 기록에 따르면 제갈량의 위엄을 빌려 사마의를 겁주어 쫓아낸다는 전략은 제갈량이 미리 낸 것이 아니라 강유가 낸 것으로 보인다.


강유가 양의에게 ‘명하여’ 군기를 위군 쪽으로 돌리고 북을 울리도록 하자 사마의가 (아마도 놀라서) 후퇴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죽은 제갈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했다.’라고 백성들이 저희끼리 말했지만, 어떤 이가 고하여 이를 들은 사마의는 ‘나는 산 자를 헤아릴 수는 있으나 죽은 자를 헤아릴 수는 없다.’라는 말을 했다.

다시 정사로 돌아오면, 촉군 퇴각 후 사마의가 제갈량의 본진과 처소를 둘러보더니 ‘천하의 기재로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명확히 사마의가 제갈량의 재능을 고평가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4. 잊지 않겠습니다, 승상 : 무후사(武侯祠)의 건립


제갈량은 유언에서 자신을 한중 정군산에 매장하도록 당부했다.


그러면서 또한 산에 의지해 분묘를 만들고 무덤은 다만 관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면 족하며 평상복으로 염하고 다른 기물을 쓰지 말라고 하였다.


유선은 제갈량에게 충무후(忠武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일전에 제갈량은 표를 올려 아뢰기를 ‘성도에 뽕나무와 땅이 있으니 자제들이 입고 먹기에 넉넉합니다. 신이 밖에서 임무를 받들 때는 제 한 몸의 먹고 입는 것은 모두 관(官)에 의지하고 달리 생업을 통해 사적으로 보탠 바가 없습니다. 신의 사후 남은 재물이나 재산이 있어 폐하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사후에 보니 실제로 그러했다고 한다.


29년 뒤인 263년 봄에 면양(한중 내의 현)에 사당을 세웠다.


「양양기」에 따르면 제갈량이 죽은 직후에 이미 도처에서 사당 건립을 청했는데, 촉 조정에서는 등급이나 품계 등에 비례한 예도를 검토하여 불허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사시 절기에 맞추어 사사로이 제사를 지냈다.


누군가가 유선에게 성도에의 사당 건립을 청하였으나 유선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제갈량이 사후에까지 계속 중망을 얻는 것을 경계하거나 질투한 탓이었을지도?)


습륭, 상충 등이 함께 표를 올려 제갈량의 공덕이 커서 왕실이 무너지지 않은 것이 그에게 힘입은 것인데 백성들이 길거리에서, 이민족들은 들판에서 제를 올리도록 하니 적절치 않다고 하였다.


다만 민심에 따라 사당을 곳곳에 세우는 것을 허가하면 예도에 맞지 않고, 성도에 세우면 종묘에 가까우니 (황제가) 꺼리는 것이 아닌가 짐작하였다.


그러면서 면양은 제갈량의 묘와 가까우므로 그곳에 사당을 세워 제갈량의 친족에게 제를 올리게 하고 또한 다른 이들은 모두 그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자고 하였다.


이 의견은 수용되었다.


그렇게 세워진 사당이 바로 무후사(武侯祠)이다.

무후묘 武侯墓 또는 면현 무후사 勉县武侯祠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섬서)성 한중시 몐(면)현 소재.)


무후사 武侯祠 (중화인민공화국 쓰촨(사천)성 청두(성도)시 소재.)


2년 뒤인 265년 가을에 촉한 멸망전에서 위군 총사령관이었던 종회는 제갈량의 사당을 지나면서 경의를 표하고 예의를 지켜, 무후사에 제사를 지내고 군사들에게 명하여 제갈량의 묘 근처에서 말을 먹이거나 땔나무를 캐지 못하도록 하였다.


제갈량의 작위는 이전에 언급했듯 유일한 아들이었던 제갈첨(諸葛瞻)이 이어받았다.


5. 진수의 평가 : 백미(白眉)에 다다른 정략가, 장벽에 부딪힌 군략가


<제갈무후도>, 1695, 164.2x99.4cm, 국립중앙박물관, 덕수 4337 (사진 출처 : 이뮤지엄)

제갈량에 대한 전근대 사가(史家)들의 논쟁을 보면, 결국 ‘제갈량은 대업을 이루지 못했는데, 자신이나 국가의 역량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고 무리하게 일을 감행한 것이 아니냐?’하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진수는 삼국시대 직후인 서진시대의 역사가임에도 좀 더 균형적 평가를 내렸다.


그는 제갈량을 두고 모든 촉한 사람이 그에게 경외심을 지니고 또 그의 법이 엄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원망이 없었던 것은 그가 매우 공명정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으로 보았다.


이로 보아, 결국 다스림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제도만이 아니라 사람(리더십)이 바로 서야 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제도란 사람이 만드는 추상적 질서이기 때문에, 그것을 실현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고나 문화를 지녔느냐에 따라 같은 제도도 운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촉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엄중한 다스림과 공명(公明)한 다스림의 조화와 균형이 필요했다.

파촉 지역은 본래 유언-유장 부자가 대를 이어 다스려 왔으나 유비는 최종적으로 물리력을 통해 이곳을 취했다.


188년 이래 214년까지 무려 26년을 이어 온 통치가 유비가 제위에 오르기까지의 7년 만에 완전히 안정될 리는 만무했다.


더구나 남중 토벌에서 알 수 있듯이 그나마도 익주 남부는 제갈량 집권 후에야 비로소 안정되었고 그 또한 많은 희생을 요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결국 촉한을 안정시키고 끝내 힘을 성장시키고 비축하여 국가의 존망을 걸고 중원의 위에 도전하는 일까지 해냈다.


그러니 정치가, 행정가로서의 그의 역량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하겠고, 이 점은 촉한을 멸망시킨 실질적 주체인 사마씨 가문을 섬긴 진수 또한 전적으로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제갈량은 결과론적으로는 패자였고, 북벌에 실패했다.

또 최소한 군무(軍務)에서만큼은 제갈량을 격하하지 않으면 주로 대촉 방면 방어의 공으로 중망을 얻은 사마씨 가문의 위상을 높일 수 없기도 했다.


진수는 제갈량에 대한 평의 맨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두었다.

‘여러 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임기응변과 장략(將略)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만큼은 연의를 인용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로되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구나. 謀事在人,成事在天。_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제103회 상방곡에서 사마의가 곤경에 빠지고, 오장원에서 제갈량이 별을 보고 기도하다」]


그리고 이충호 작가가 그린 삼국지에서의 제갈량의 마지막 대사도 인용하고 싶다.


‘죄송합니다, 폐하... 최선을 다했으나, 제 손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제갈량 한 사람에게만 의지하기에는 촉이 위를 넘어서는 일은 요행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어쩌면 나라를 창업할 때부터 예정되었던 운명을 어떻게든 막아내기 위하여 출사표에서 언급했듯 자신의 몸을 던져 다할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다.


이러한 패자의 미학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비록 연의에 의하여 미화된 부분이 상당하더라도 결국 역사 못지 않게 문학에도 의존해야 하는 면이 있다.


사실 이 부분은 진수도 인정한 점이었다.


진수는 274년(촉 멸망 후 불과 9년이 흐른 시점이다)에 「제갈량집」을 지으며 소를 올렸는데 제갈량에 대한 평가에서 그가 말하기를,


[제갈량의 진의는 천하를 통일하려는 것이었고 자기 사후로는 위를 대적하며 중원을 향해 나아갈 자가 없다고 여겼기에 북벌을 멈추지 않고 지속했다. 하지만 제갈량의 재주는 군통수에는 능하더라도 지략은 부족하고 백성은 잘 다스렸으나(理民之幹) 병략(兵略)은 모자랐다. 그런데 그와 대적한 이 중에는 뛰어난 인재도 있었고 군의 규모가 위군에 미치지 못했으며 공격의 본질적 어려움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용병해도 이기지 못했다.]


*참고) 정사 「삼국지」 5권 제갈량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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