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평전 8. 제갈량 諸葛亮 (3)

by 남재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사전 예고도 없이 또 다시 연재가 늦어지고 불시에 갑자기 게시하게 된 점 독자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1. 촉의 대권을 잡고 대의를 바로 잡다


223년에 제갈량은 무향후(武鄕侯)라는 작호를 받고, 익주목을 겸했다. 이로써 그는 촉한의 대권을 쥔 최종결정권자가 되었다.

제갈량은 우선 오의 손권에게 사신을 보내 촉오 동맹을 복구했다.


또 익주 남부(남중)의 반란을 바로 토벌하지 않았다.


상중이므로 군사를 일으킬 수 없다는 이유였다.


「제갈량집」에서는 같은 해에 위의 화흠, 왕랑, 진군 등이 각각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촉한이 스스로 복종하고 위의 번국이 되기를 권하였고, 제갈량은 당연히 이를 무시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만 스스로 글을 지었는데, 내용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1. 항우는 부덕하여 중원을 차지하고 제왕의 위세를 지녔지만 결국 참혹하게 죽었으니 후대의 경계가 되었다. 현재 위(魏)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지 않고 오히려 항우의 전철을 밟고 있다.

2. 이러한 화(禍)는 필연적인 것인데, 장년에 이른 늙은이들이 비록 본인들은 화를 면하더라도 자손들에게 내리게 될 것을 깨우쳐야 함에도 도리어 거짓된 말을 받들며 내게 서신을 보내왔다.

3. 세조(후한 세조 광무제 유수. 한을 재건해 후한(동한)을 창건했다.)께서 곤양대전에서 불과 수천을 가지고 왕망의 40만을 꺾었으니, 도(道)에 의거해 토적(討賊)하는 일은 무리의 다소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병서에서 ‘만 명이 죽음을 각오하면 천하를 횡행할 수 있다.’라고 했고, 황제 헌원씨는 수만으로 사방을 제압하고 해내를 평정했다. 하물며 우리는 수십만 군사를 가지고 정도(正道)에 의거해 죄인들을 치려 하는데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4. 맹덕(조조의 자)은 사술로 수십만 군사를 이끌고 양평의 장합을 구원하려다 겨우 홀로 도주했고, 결국 한중을 잃고는 회군하다 도착하지도 못하고 죽었다. 자환(조비의 자)은 음란하여 맹덕을 이어 찬탈했다. (이것이 (단지 사실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뜻.)

5. 몇몇 늙은이가 소진과 장의를 운운하며 헛소리를 하는 데 글재주와 붓과 묵을 번거롭게 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연의 제93회에서 ‘무향후가 왕랑을 꾸짖어 죽이다.’ 부분이 여기서 모티프를 얻은 것인 듯 하다.


이를 보면 제갈량은 자신만만하고 호기롭게 나서 세 치 혀를 놀리는 왕랑을 논파했고 크게 분기가 찬 늙은 왕랑은 낙마하여 죽는다.


그러나 이는 소설이라는 연의의 특성상 독자들에게 통쾌함을 안겨주기 위하여 만들어 낸 측면이 커 보인다.


고심하는 공명(제갈량). 이충호 작가의 묘사. (저작권 문제 시 삭제합니다.)


실제의 제갈량은 훨씬 더 차분하고 성숙하며 비장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군자는 다투지 않는다 君子無所爭 _ 「논어」 팔일편]


제갈량의 입장에서 보면 정확히 이 말을 실천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다른 한편으로 ‘늙은 소인(小人)들이 조씨 찬탈을 떠받들며 응당 다가올 업보도 모르고 함부로 떠드니, 내가 그들을 대상으로 답신을 쓰기 위해 문장력과 필묵을 쓸 가치도 없다.’라는 생각이 제갈량이 썼다는 정론(正論)에 드러나 있다.


또 위와 촉의 극명하게 다른 천하관도 분명히 드러난다.


위에서는 일관되게 중원을 차지한 자신들을 곧 ‘중국(中國)’으로 칭하고, 촉과 오는 그저 복속시켜야 할 지방 정권 정도로 취급한다.


본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과 이를 왕조 순환에 적용한 전국시대의 인물 추연의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에 따라서, 불(火)의 왕조였던 한(漢)에서 흙(土)의 왕조인 위(魏)로 넘어간 선양은 화생토(火生土)라 하여 마치 연소 후 재가 남듯 불에서 자연히 흙이 나온 이치와 같다는 것이 위 측의 논리였다.


위를 정식으로 건국하고 황위에 오른 조비가 최초의 연호를 황초(黃初)로 정한 것도, 흙의 황색과의 연계성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촉의 관점에서 보면, 그 ‘선양’의 실체는 바로 ‘찬탈’이었기에 천명에 순응하기는커녕 정반대로 천명에 역행하는 것이며 오히려 하늘이 부당하게 꺼져가는 한의 화(火)기를 되살리기 위해 유비를 세운 것으로 보았다.


이는 마치 후한(동한) 세조 광무제 유수가 왕망의 찬탈로 인해 일시적으로 무너진 한을 재건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위는 후한 13주 중 9주를 차지한 강대국이었고 촉은 익주 1주만을 차지하고 명분, 인재, 지형에 의지하는 국가였으나 유선과 멸망에 기여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유비와 제갈량을 필두로 군신이 모두 꿋꿋하게 대의로 밀고 나가는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2. 남중 정벌(225)과 전후 처리의 지혜


제갈량은 225년 봄에 군사를 일으켜 남정(南征)을 떠나 그해 가을에 승리하고 귀환했다.


이 남중(南中, 익주 남부의 광범위하고 습한 험지)에서 싸운 대상이 바로 맹획(孟獲)이었는데, 칠종칠금(七縱七擒) 후 맹획이 마음으로 복종하게 되었다.


이는 연의에도 나와 익히 알려져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사실 그 후의 조치이다.

평정을 마친 제갈량은 그 지역의 각 군에 관리를 두면서 모두 현지인들을 임용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왜 남중 바깥사람을 쓰지 않느냐 물었다.


제갈량이 내세운 이유는

1. 남중 바깥사람을 임명하면 군(軍)을 남겨야 하는데 양식이 부족하다.

2. 하지만 군을 남겨두지 않으면 정복된 민족들이 이제 막 아버지와 형제를 잃었으니 필히 변이 생길 것이다.

3. 기본적으로 현지인들은 전쟁 과정에서 우리 군사를 많이 죽였으니, 만약 우리 사람으로 임명한다면 서로 불신하여 충돌할 수 있다.


현지인을 임명하고 군을 남기지 않으면 군량 운송의 필요가 없어 비용을 줄일 수 있고, 또 그들은 남중 바깥사람을 임명했을 때보다는 덜 엄하게 다스릴 것이므로 갈등의 소지도 덜하다는 것이 제갈량의 요지였다.

뒤에 진수, 원준 등이 모두 인정하듯 이 사례를 통해 제갈량의 정치/행정 안목이 매우 탁월함을 알 수 있다.


제갈량에게 군재(軍才)는 부족했다는 것이 진수의 견해인 듯하지만, 사실 제갈량은 물러가고 나아감이 신중하여 한 번에 크게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한 번 처리하기로 다짐한 일은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후환이 없게 처리하는 방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본국 기준 이민족들의 땅은 특히나 무력으로 제압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후 처리의 기능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단순한 땅따먹기가 아닌 ‘지배’의 문제이고 지배는 정당성을 얻어야 하지만, 물리적 지배는 단지 일시적 최소요건일 뿐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해서는 오랜 ‘점유’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어서 어떤 전략을 세울 것인가는 정복자 입장의 큰 고민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의 말대로 어차피 전쟁으로 인하여 서로 극심하게 피를 흘린 뒤에 지배하는 상황인 만큼, 언뜻 앞뒤가 안 맞아 보이더라도 당사자들에게 뒤를 맡기는 것이 곧 정복자가 스스로 손을 내미는 것으로써 막 정복당한 이들의 수용 여지를 넓힐 수 있다.


남중 지역에서는 군수물자가 풍부하게 생산되어 촉한의 부가 증가했고, 제갈량은 이러한 바탕 위에서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북벌을 위한 포석이었다.

3. 제갈량의 제1차 북벌(227)과 와룡의 자책

227년에 마침내 제갈량은 북벌을 시작하여 한중에 주둔했다.


이때 올린 출사표의 내용 요소는 다음과 같다.


- 선제 유비와의 삼고초려 그리고 이후 20년간 대를 이어 섬겨 온 의리

- 한실 부흥의 대의

- 북벌을 위한 조건으로서의 남중 평정 언급

- 북벌 성과가 없다면 자신을 치죄하라는 비장한 각오

- 유비의 유지를 따르고 충신들을 가까이 두라는 유선에의 당부


출사표를 올리고 출병한 제갈량은 우선 한중(군)의 면양(현)에 자리를 잡았다.


대강 1년간 현지 적응과 훈련을 거친 후 228년 봄에 제갈량은 일종의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략을 펼쳤다.


제갈량의 본대는 야곡도를 통해 한중 북동쪽의 위수(渭水) 유역에 있는 미(縣)를 치는 척하면서 북서쪽의 기산 방면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조운은 야곡도의 미세하게 서쪽에 있으며 진창으로 연결되는 기곡도로 진군하도록 했다.

위에서 한 번 오판하도록 하여 시간을 벌고, 다시 서진할 위군을 조운이 막게 되었다.


장안 서쪽의 미(현)는 장안과 비교적 서로 가까웠으므로, 위에서는 조진을 급파해 막도록 했다.

제갈량이 진군하자 농우삼군 즉 남안군, 천수군, 안정군이 항복했다.


조운은 버티다가 결국 퇴각했는데, 군이 많았음에도 농우삼군을 단번에 제압하려던 제갈량 측 군대보다는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략 魏略」에서는 농우삼군의 항복 경위를 약간 더 자세히 설명한다.


유비가 죽은 데다가 유비 사후 5년간 촉에서 군사를 일으킬 기미가 없으니 위에서는 방심했다.


제갈량의 북벌이 시작되자 위-촉 국경 지대의 농우삼군 민심은 매우 불안해했고 결국에는 항복하고 말았다.


조예는 장안에 머무르며 장합에게 가서 제갈량을 막도록 했는데, 양군은 가정(천수/광위 內)에서 충돌했다.


가정의 길목을 막으라는 지시를 어기고 산을 점해 스스로 포위를 자초한 마속의 과실로 인해 장합에게 참패했으므로 제갈량은 한중으로 철군하고 마속을 사형에 처했다.

이 일은 제갈량의 대표적인 실책이라 할 것이다.


사람을 보는 통찰력이 있는 유비가 임종 때 이르기를 ‘마속은 말만 요란하고 실제 능력이 실속에 비해 못하니 크게 쓸 사람이 아니오.’라고 언급했음에도 제갈량은 마속을 택했다.


마속은 이미 남중 정벌 때 성공한 계책을 낸 적이 있었고, 백미(白眉)라는 평을 들었고 특히 뛰어났던 마량과 그 오형제 중 막내였다.


그래서 신임한 것이 하나였을 것이고, 또한 제갈량으로서는 후계자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마속을 믿고 그로 하여금 공을 세우게 하여 후일을 안배하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4. 제갈량의 제2차 북벌(228)과 소국이 대국을 대하는 정책


결과적으로 1차 북벌에서 뚜렷한 소득이 없이 귀환한 제갈량은 벼슬을 낮추어 달라 스스로 상주했으나 유선은 실질적인 업무는 동일하게 보도록 했다.


형식적인 강등이었으나 제갈량의 자책은 상당했던 것 같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재출병을 권하는 사람에게 제갈량은 ‘기산과 기곡에서 아군이 적군보다 수가 많았으나 결국 패배했으니, 이는 수가 아닌 나 때문이오. 마땅히 군을 쉬게 하고 나는 반성하며 앞날을 도모해야 할 것이오. 그러니 나의 허물을 기탄없이 질책해주시오.’라고 하였다.

이 지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전에 언급했듯, 제갈량의 조카이자 제갈근의 아들이며 후일 오의 권신이 되는 제갈각 역시 호기롭게 출사표인 양 강경하게 북벌을 역설하는 글을 돌리고는 출병했다 참패했으나 그는 남의 탓으로 책임을 전가했다.


사실 이 경우는 제갈량에 비하면 실례일 것이다.(가히 虎叔犬姪(호숙견질)이라 할 만하다)


왜냐하면 제갈량은 국력이 매우 수세인 촉한을 어깨에 지고 있었고, 한중으로 나아가는 것 자체가 만만한 일이 아니었으며 제갈각은 오만함에 차서 거의 총동원으로 국력을 모조리 동원했음에도 참패했으니까.


제갈량의 경우를 본 후 자신과 동생의 작위를 깎은 후일 위의 집정 사마사를 대조해보면 제갈각이 실패하고 사마사는 성공한 까닭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제갈량은 패한 와중에도 공을 세운 이들을 가려내고, 자책하는 글을 유시하고, 다시 군사훈련에 집중하도록 명하였다.


같은 해인 228년에 석정 전투에서 오가 위를 대파했다.


이때 위에서 대군이 동원되었음에도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이었으므로 제갈량은 기회를 잡고자 했다.

이에 그는 후출사표를 올렸는데,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1. 선제께서는 우리나라와 적(위)은 양립할 수 없고, 군주의 대업은 한 구석 땅에서 안거할 수 없다 하시며 신에게 적을 토벌하라 당부하셨다. 그러나 선제께서는 또한 신의 재주가 적의 강건함에 미치지 못할 것도 아셨다. 그러나 적을 토벌치 않으면 왕업 또한 멸망한다. 앉아서 망하느니 먼저 적을 치는 것이 옳으므로 선제께서 의심 없이 신에게 북벌을 부탁하신 것이다.

2. 신은 이미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남정을 마쳐 후방을 안정화하였다. 그러함에도 논자들은 북벌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한다. 적은 우리와의 싸움 후 얼마 되지 않아 오와의 전선에 힘을 쏟고 있다. 병법에서는 적이 수고로운 틈을 타라 하였으니 지금 바로 진격해야 한다.

3. 북벌을 지금 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一) 폐하는 고제(유방)에 미치지 못하고 신들 또한 장량, 진평보다 못하다. 그럼에도 ‘장기적 계책으로 승리하자.’라고 함은 앉아서 천하를 얻겠다는 것이다. (고대의 영웅들도 쉽게 천하를 얻지 못했는데 그들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가 안주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二) 유요와 왕랑은 성인(聖人)을 말하며 끝내 적을 치지 않았는데, 결국 그들은 손책을 강하게 하여 강동 전체를 넘겨주었다. (안주하며 적들을 강하게 하는 것은 자멸하는 길이다)

(三) 조조는 지략이 뛰어나고 용병술이 손자, 오자를 방불케 하였고 선제 또한 그의 유능함을 칭찬하셨다. 그러나 그라고 해서 실패가 없지 않았다. 남양, 오소, 기련, 여양, 북한, 동관에서 그는 실패했고 배신을 당하고 일을 맡긴 자가 대실패를 했다. 그런 연후에야 간신히 불완전하게 중원을 차지했다. 하물며 우리 역시 시련 없이 천하를 얻을 수는 없다.

(四). 신이 한중에 주둔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장수와 병사, 무기 등을 많이 확보했다. 이들은 수십 년간의 경험이 축적된 정예군이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면 이들 상당수를 잃을 것이다. 그때 가서 무슨 수로 적을 도모하는가?

(五). 대업은 결코 멈출 수 없으니 이를 전제하면 결국 나아가거나 머무르거나 백성과 군사의 고생은 같다. 우리는 지금 고작 한 주의 땅으로 적과 오래 대치하려고 하는데 이는 불가하다.

- 세상사는 단정할 수 없다. 선제께서 형주에서 패퇴했을 때 조조는 천하가 평정된 줄 알고 기뻐하였으나 이후 선제께서 손권과 손을 잡고, 익주와 한중을 취하셨다. 조조의 오판으로 대업이 이루어질 뻔한 것이다. 하지만 오가 동맹을 깨고 관우를 패사시키고 이릉대전에서 참패하니 결국 조비가 칭제하였다. 세상일은 이처럼 짐작하기 어려우나, 다만 신은 심신을 대업에 바치고 죽은 뒤에야 그칠 뿐(鞠躬盡瘁 死而後已) 성패와 이둔(利鈍, 쉬움과 어려움)이란 본래부터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제갈량의 북벌은 옹호하지만 김상헌의 척화론에는 반대하는 입장인데, 후술하겠지만 여기에는 ‘비슷해 보인다고 해서 같은 것은 아니다.’라는 논리가 적용된다.


촉한은 하다못해 위를 상대할 생각까지는 할 수 있었다.


이는 촉한이 비록 소국이라 하더라도 그 장수와 군대가 제갈량의 말처럼 전란의 시대에 실전 경험이 풍부하고 단련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애초에 촉에 자리를 잡은 것도 한편으로 방어에 유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천 분지의 비옥함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제갈량은 기본적으로 군략가와 행정가로서 상당히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북벌 실행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인조조의 조선은 왜란이 종결된 지 40여 년이 흐른 상황이었고, 전후 복구에도 많은 힘을 소진하고 있었다.


더구나 일본을 상대하는 것과 후금을 상대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고, 조선이 전력을 다해도 후금을 상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인조와 신하들은 척화 이전에 우물쭈물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고, 김상헌의 주장은 구체적인 대책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지원하면 명군이 기세를 되살려 의연히 떨쳐 일어날 것이다.’라는 취지의 다소 황당한 소설적 내용을 아뢰고 있었다.


1636년에 인열왕후 한씨의 조문 명목으로 사신을 보낸 후금은 내몽골을 정복하고 칸호를 획득한 태종 숭덕제 애신각라 황태극에게 황제의 존호를 올리는 데 동참하도록 권했고, 이로 인해 조선이 크게 술렁였는데, 최명길은 수차 소를 올려 왕과 신하들이 구체적인 기조와 대책을 수립해 대응하지 않는 것을 답답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최근에 대각에서 사람들이 모두 척화를 말하지만, 홀로 간원의 한 차자가 언론이 아주 바르고 방략도 채용할 만하여, 대중을 따라 부화하는 자에 견줄 바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진실로 묘당이 전적으로 화친을 끊는 데 있다면 회계(回啓, 임금의 물음에 신하들이 논하여 답함)하는 사(辭. 말이나 글)가 한결 같이 왜 몽롱하고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끝내 한마디 말이나 한 가지 계책도 시행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것은 원래 일정한 계책도 없이 특히 천취(이리저리 둘러대는 것. 가의의 <치안책>에서 비롯)의 계책을 하자는 것뿐입니다.

능히 간원의 논을 써서 전수의 계책을 결단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신의 언론을 써서 화를 지연시키는 꾀도 쓰지 못하다가, 하루아침에 적기가 멀리서부터 몰려온다면, 체신은 강도로 들어가 지키자 하고 수신은 물러가 정방산성에 처하자는 데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청북(청천강 북쪽)의 열읍은 버려서 장차 적에게 주게 되면, 안주성 하나만으로는 형세로 보건대 결코 홀로 안전하지 못하게 되어, 생령은 어와 육이 되고 종사는 파천할 것이니, 이 처지에 이르러서 그 허물을 누가 책임질 것입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대가가 진주하시는 문제는 감히 가볍게 의론할 수 없을 것이지만, 체신과 수신은 모두 관부(본부)를 평안도에 설치하고 병사도 또한 마땅히 의주에 들어가 거처하며 여러 장수들에게 전진은 있어도 퇴각은 없으리라고 약속하여야만 바야흐로 전수의 상도에 부합할 것이라고 봅니다.


또 서찰을 심양으로 보내어 군신의 대의를 갖추어 진언하고, 이어서 추신사를 들여보내지 않은 이유를 말하며, 한편으로 오랑캐의 정세를 탐사하고 또 한편으로는 저쪽의 대답을 관찰해야 합니다. 만약에 저쪽이 달리 다른 마음이 없다면 그로써 형제의 예를 쓸 것이며, 곧 호씨(송나라 호안국)의 논한 바에 의거하여, 앞서의 약속을 지키고 안으로 정사를 닦아서 후일의 계획을 도모하여, 석진(오대의 후진)의 전철로 돌아가고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용만을 고수하여 성을 등지고 한 번 싸워 평안할지 위태로울지를 국경에서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비록 계산이 완전히 온전하지는 않다고 하여도, 손을 묶어두고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버려두고 꾀하지 않으면서 한갓 머뭇거리기만 한다면, 싸우자고 말하려고 하여도 의심과 두려운 생각이 없지 않고, 기미(형제의 맹약으로 묶어 놓음)를 말하려고 하여도 또 비방하는 의론이 올까 두려워서, 저쪽으로도 이쪽으로도 제 때에 미치지 못하고 진격과 퇴각이 모두 거점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강물이 장차 얼어붙을 것이므로 화가 눈앞에 절박합니다. 이른바

“너희들 의론이 정해질 때는 나는 이미 강을 건넜을 것이다.”(북송 정강 원년에 금의 군사가 침입할 때 조정의 의론이 분분했는데 금 사람이 송 사신에게 이런 말을 하여 허문만 있고 실효가 없음을 조롱함. <송대사기강의>에 나옴)

라고 하는 것에 불행하게도 가깝게 될 것이기에, 신은 마음속으로 통탄합니다. 이제 비록 늦었다고는 하여도 오히려 도모할 만합니다. _ 「지천집 遲川集」]


최명길의 말처럼, 무릇 국가의 대계를 정하는 자들은 일이 복잡할수록 기조와 입장을 명확히 하고 이에 따라 대책을 세워서 국민과 자원이 체계적으로 따라올 수 있도록 할 책무가 있다.


무(無)의사결정은 그 자체로 해악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제갈량은 근본적으로 정세 파악을 명확히 하고 있었다.


문화가 다르고 공존한 역사가 없어 쉽게 복속시킬 수 없다고 하면 독립국의 유지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근본적으로 중국은 하나였다.


하나였던 것은 나뉘어도 다시 하나가 되는 법인데 그 하나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했다.


비록 촉의 대의명분이 위에 앞선다 해도 물리력이 약하니 촉이 어떻게든 북진을 하지 않고 앉아서 계속 기다리기만 하면 결국 위가 촉을 병탄하게 될 것은 자명했다.


그러니 어떻든 적극적으로 북벌을 도모해야 함은 분명했는데, 동시에 촉이 위에 비해 자원이 부족하므로 자원을 축적하고 군사력을 기르고 전략을 빈틈없이 세워야 했고 남은 일은 하늘에 맡길 따름이었다(盡人事待天命).


게다가 제갈량은 이때 이미 40대에 이른 상황에서 일국을 짊어지고 건강의 악화를 느끼는데 후계는 보이지 않고 신하들은 나약하고 노장들은 죽는데 소장들은 아직 안심하고 맡기기 어려우니 근심이 깊고 마음이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갈량의 선택은 북벌 전략이건 촉오 동맹이건 남중 정벌이건 그 상황에서의 최선을 택한 것이고, 그럼에도 안타깝게도 역사의 흐름은 제갈량이라는 인재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 한 사람의 힘으로는 거스를 수 없는 것이었다.


후출사표를 올린 후 출정한 제갈량은 이번엔 진창을 공격하였으나 결국 실패했고, 다음 해인 229년에 다시 무도군과 음평군을 공략하려고 시도하여 성공했다.


이 공으로 제갈량은 승상에 재임명된다.


5. 손권의 칭제(稱帝)와 제갈량의 외교 감각


그해에 손권이 칭제하여 오가 정식으로 건국되고, 촉에 사신을 보내 이를 알렸다.


촉의 신료들은 오와의 교류는 실익이 없고 그들에게는 명분도 없으니 동맹을 파기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제갈량은 오의 건국을 인정하기로 결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손권이 칭제할 마음을 품은 지 이미 오래고 우리도 이를 알고 있었으나, 우리로서는 협공이 긴요하였기 때문에 묵인하였소. 이제 와 오와의 동맹을 깬다면 결국 오를 멸하고 난 후에야 중원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 오는 강건하니 단기에 도모하기 어렵소. 우리와 오가 다투는 것은 결국 위만 좋은 일이 되니 상책이 아니오.

지금 그대들은 손권으로서는 지금의 나누어진 형세가 유리하니 우리와 협력할 이유가 없고, 이제 바라던 대로 칭제하였으니 북진할 생각이 없을 것이라 하오. 옳은 말인 듯 보이나 실은 그렇지 않소.

어째서 그렇겠소? 손권이 장강을 넘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만으로는 적을 상대하기 어렵기 때문이오. 이는 위가 한수를 넘어 남진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소. 다시 말해 역량에 여유가 있는데도 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오.

우리가 북벌하면 그들로서는 중원을 분할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상책이 되니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오. 그들이 우리와 화목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로서는 북진하면서 동쪽을 근심할 필요가 없고, 위는 황하 이남의 군사를 모두 서쪽에 둘 수 없으니 우리에게 이점이 되오.

그러니 손권의 칭제는 우리가 드러내놓고 따질 일이 아니오.’


이리하여 촉은 최종적으로 오의 건국을 축하하는 사절을 파견하고 촉오 동맹을 유지한다.


개인적으로는 촉서 제갈량전을 통틀어 이 부분이 제갈량이라는 인물의 최고를 보여준다고 평가하고 싶다.


그 이유는 이 결정이 제갈량이 비록 ‘명분’으로부터 대업을 시작하였으나 명분만으로 대업을 이루려고 할 만큼 맹목적이거나 순진하지 않았음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제갈량은 현실을 모르는 호전자가 아니었다.


당시 촉한 조정 일반의 의견은 유비가 촉한을 건국할 때 기반한 명분을 그 자체 논리만으로 밀고 가는 경우의 결론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촉한은 아직 끝나지 않은 한의 혈통과 대의를 이어 ‘유일하게 정통성을 지닌’ 국가이다.


이러한 촉한정통론에 따르면, 익히 알려져 있듯 촉한은 비록 지방에 있으나 임시일 뿐 정통 왕조이고 조위는 중원을 억지로 단지 물리력을 통해 점하고 찬탈한 반국가단체이다.


이 견지에서, 같은 지방 정권이라 하더라도 동오 역시 단지 지방의 일부를 점한 반국가단체일 뿐이다.


그래도 위를 상대하기에는 혼자만으로는 힘이 모자라므로 적벽대전 때부터 제갈량의 주도로 촉오 동맹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오가 독립 정권으로서 위를 섬기는 척하며 내적으로는 손권이 오왕(吳王)을 칭하더라도 거기까지는 이를 악물고 참아줄 수 있어도 칭제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한 하늘에 두 태양은 있을 수 없다는 문제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러한 조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리를 택했다.


그의 촉오 동맹 연장 논리는 감탄스러울 만큼 빈틈이 없다.


개인적으로는 처음 삼국지에 관심을 가졌을 때 제갈량이 오와의 동맹을 유지하긴 했어도, 손권은 정작 위와 촉이 접전을 벌이는 동안 자신들은 딱히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고 그냥 어부지리를 얻으려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걸 간파하지 못한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연의의 영향이라던가 제갈량의 임팩트 때문에 가려진 것일 뿐, 위와 오 역시 계속해서 유수구 등에서 접전을 벌였다.


또 위에서 제갈량이 편 논리를 통해 알 수 있듯, 그는 이미 오가 ‘촉이 위를 멸하는 데 성공하면 촉과 천하를 양분하고,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힘을 유지하고 강화할 수 있다.’라고 생각할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틀에서 촉 혼자는커녕 촉과 오가 힘을 합치더라도 위를 상대하는 것이 버거운 일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대의를 위해서는 손권의 칭제를 인정하고 촉오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촉의 최선이라는 합리적 결론을 내린 것이다.


6. 제갈량에 대한 평가의 역사적 맥락


제갈량은 그 개인의 역량이 높게 평가되었더라도 결과적으로는 ‘멸망한 지방 정권의 재상’ 정도로 취급될 수밖에 없는 면이 있었다.


이는 비록 찬탈이기는 했더라도 천하통일을 이룬 진(晉)이 위의 선양을 받았으므로, 그 선양이 정당화되려면 다시 위가 한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것이 정당화되어야 했고 만약 이러한 논리를 따르게 되면 촉한은 단지 지방 정권에 불과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의 재능이 워낙 뛰어나 파촉 지역의 민심이 모두 제갈량 한 사람에게 의지했고, 촉한이 멸망한 후에도 오랜 기간 그 명성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후속 정권으로서는 한편으로는 제갈량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격하해야 했다.


일례로, 배송지 주석에 인용된 「제갈충무기」에 나오는 동진의 권신 환온(桓溫, 312-373)의 촉 정벌 때의 일화가 있다.


이때 제갈량 생전에 촉의 소사(小史, 사관을 도와 역사와 행정 등 각종 기록을 담당하는 하급 관리)였던 사람이 살아 있어 나이가 100여 세가 되었다고 한다.


환온은 자신이 제갈량에 비할 만하다고 생각하여 속으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불러 묻기를 ‘제갈 승상은 지금의 누구와 더불어 비교할 만한가?’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답하기를 ‘제갈 공께서 계실 때는 남다름을 깨닫지 못하였는데, 공께서 돌아가신 후부터는 그분에 비견할 만한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환온의 오만함과 제갈량의 사후에도 지속되는 위엄과 명망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젊은 시절의 제갈량도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견했는데 세인(世人)들은 이를 비웃었고, 제갈량 사후 촉이 멸망하자 그때는 또 자기 역량과 분수를 모르고 설쳐서 망한 것이라고 비웃었다.


그런데 비록 환온의 권신이라는 점에 기초한 오만함과 제갈량의 젊은 시절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이 맥락에 차이가 있더라도 비슷한 것으로 보고 비판할 수 있을까?


그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자부심을 정당화하고 다른 사람의 자부심을 부당화하는 것은 일반화의 논리에 의해서는 하기 어렵다.


비슷해 보이는 양상을 가치 차원에서 동일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유사성의 정도가 동일선상에 이르렀음을 인정할 수 있는 최소한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그러한지 여부는 결국 개별적인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놓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즉 이 경우 그 사람의 객관적인 기량, 이를 입증할 수 있는 행보들, 전체적인 인생의 궤적, 개인적 성품 등을 놓고 복합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환으로서 '자식 농사'를 참고할 수도 있다.


환온의 아들 환현(桓玄, 369-404)은 선친의 권력을 이어받았으나 제위 찬탈을 실행하지는 못한 아버지와 달리 무리하게 강행했다가 결국 유유에게 패사(敗死)했다.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이 끝까지 촉한과 명운을 함께한 것과는 사뭇 다른 결말이다.


두 사람 모두 패사했으나 한 사람은 충신으로 다른 한 사람은 역적으로 남았으니까.


이는 꼭 유가적 충 忠이념에 기초했다기보다도, 두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똑같이 패사했다면 이름 없는 역적으로 남는 것보다는 이름 있는 충신으로 남는 게 나을 것이라는 견지에서 하는 말이다.


결국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제갈량과 환온이 비록 똑같이 자부심을 드러내 보였다고 하더라도 그 자부심을 드러낸 점부터 환온은 제갈량에 비견될 수 없는 그릇이다.


특히 1차 북벌에서 성공하진 못했지만 완벽하게 대패한 것도 아닌 후 자책감을 심하게 보였던 제갈량과는 사뭇 다르다.


한편, 환온이 자신을 제갈량에 비견할 만하다 본 사실 자체의 배후 맥락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환온이 자신을 제갈량에 비할 만하다 본 것은 일차적으로는 제갈량이 일국을 지고 갈 만큼 뛰어난 기재를 지닌 사람임을 인정한 것이고, 더 중요하게는 이때쯤에는 ‘제갈량은 패자(敗者)’라는 점이 최소한 더는 기재를 지녔다는 점보다 앞서게 되지는 않았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제갈량이 패자라는 점이 더 부각되었다면 그것이 설령 프로파간다라 하더라도 자신을 높이기 위해 제갈량의 명성을 끌어다 쓰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환온이라는 인물 개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제갈량은 그럴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환온은 서주를 기반으로 동진의 군사력이 되는 북부와 서부의 양대 군단 중 전자를 통제했고 이를 기반으로 서진하여 촉을 정벌하는데 성공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이때 촉에는 저족의 이웅(李雄, 274-334, 성한 태종 무제)이 건국한 성한(成(306~338 국호), 漢(338-347 국호))이 오호십육국의 하나로서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국가를 멸하고 정복한 것인데, 환온은 결국 제위 찬탈의 마음을 품었으므로 어떤 면에서는 동진의 정통성이 깎이는 것도 아주 나쁘지만은 않았을 수도 있다.


물론 당연히 기본적으로는 동진의 선양을 받아 즉위하는 것이 바람직하긴 하지만, 찬탈자의 입장에서는 동진의 정통성이 강해도 곤란했다.


동진의 정통성이 약해지면 누구나 천자를 칭할 수 있겠지만, 세력 판도로 볼 때 동진은 북중국의 강국 전진(前秦, 351-394)으로부터 크게 압박당하는 처지여서 군웅할거를 하는 경우 한족 왕조 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었고 애초에 군사력을 북부 군단과 서부 군단에 크게 의지하는 처지였다.


제갈량에 대한 평가의 미묘한 흐름은 진말송초에 이르기까지 더 강화되어 제갈량에 대해 매우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기리는 입장이었던 배송지의 주석 저술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배송지는 동진 말에서 유송 초의 인물로서 이 시기는 사마씨의 진이 환온 때보다 더욱 가시적으로 망조가 들 때였다.


유유(劉裕, 363-422, 유송 고조 무제)는 환현을 주살하고 집권하여 장안을 함락시켜 북벌을 일시적으로라도 성공시키면서 이를 기반으로 건국에 성공하여 송을 개창했다. (유유에 대해서는 뒤에 주연으로서 다룰 예정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동진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하긴 했지만 찬탈이었기 때문에 환온과 마찬가지 입장에서 동진이 떠받들어지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조씨, 사마씨와 달리 유유는 실제로 아예 전 왕조를 멸족시켰다.)


법적으로는 동진이 이어 나간 서진(西晉) 그리고 서진이 선양 받은 조위의 정통성을 인정해야 동진으로부터 선양 받은 왕조의 정통성이 지켜진다.


그런데 정치적으로는 유유는 동진 왕조로부터 찬탈해 유송을 건국한 것이므로, 기왕이면 동진의 정통성이 인정되지 않으면 찬탈의 부당성이 약화되는 면이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정치적 배후 흐름 속에 조위 정확히는 서진의 개창자들이 멸망시킨 촉한의 실질적 지배자 제갈량의 역사적 위상과 평가는 미묘한 위치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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