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평전 9. 장완 蔣琬

by 남재준

1. 공명이 보증한 문재 文才


장완의 이름은 약관의 나이 때부터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 대한 더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유비를 따라 입촉(入蜀)하였다고 되어 있으므로 아마도 최소한 200년대부터는 유비를 섬겼을 것으로 보인다.


장완은 영릉군 출신인데, 영릉은 형주 남부에 위치한다.


영릉, 장사, 계양의 3군을 두고 유비와 손권은 쟁탈전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적벽대전 직후에 유비가 확보했던 것을 10여 년 뒤인 219년에 손권이 기습적으로 점령했다.


장완의 생년은 알려져 있지 않은데, 200년대에 유비가 형주에서 활동할 때 섬기기 시작한 것이라면 이때 이미 최소 20대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00년대에 20대였다면 대강 180년대 초 즈음에 태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갈량이 181년생이고 사마의가 179년생이니 장완은 그보다 약간 아래인 연배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처음에는 주로 문서 담당 보좌관 같은 자리에 있었던 것 같고, 유비가 촉을 수중에 넣은 뒤로는 익주 촉군 내 광도현의 현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이 자리가 성에 차지 않았던지, 업무를 소홀히 한 것도 모자라 유비가 순시할 때 만취한 상태로 맞아 노여움을 샀다.


유비가 그를 벌하려고 하였는데, 제갈량이 이를 만류하며 말하기를 ‘장완은 국가의 그릇(社稷之器)이지, 백 리의 토지를 다스릴 인재가 아닙니다. 그의 정무 처리는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외양을 장식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지 않습니다. 원컨대 주공께서는 다시 살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을 보아 장완을 불벌하는 대신 삭직만 했다.


이 일화는 한직에 가서 근무태만에 심지어 주군이 순시할 때에도 만취해 있을 정도로 근무시간 중 음주가 잦았다는 점에서 뇌양현령 시절 방통의 일화와 거의 비슷한데다 사직지기(社稷之器)라는 말이 나온다는 점에서 일치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방통과는 미묘한, 아니 실은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방통은 제갈량이 아닌 오의 노숙이 백리지재가 아니라고 언급하며 더 큰 일을 맡기라고 당부했다.

장완은 제갈량이 사직지기라고 평가한 인물이었다.


물론 당연히 이를 제갈량이 방통은 인정하지 않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다만 장완은 제갈량의 기질이나 성향을 상당히 공유한다는 점이 중요해 보인다.


방통은 유비에게 촉을 취할 것을 간언하는 등 상대적으로 과감한 경향을 지녔다.


반면에 제갈량은 1차 북벌을 준비할 때 남중 정벌을 통해 후방을 안정시키고 촉오 동맹을 복구하며 부국강병책 우선 등으로 몇 년간 내실을 다져 도전했고 1차의 실패 후 2차까지 휴식기를 두는 등 신중한 성향이었다.


제갈량의 장완에 대한 평가 중 사직지기라는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사직지기인가 하는 부분이 중요하다.


그의 다스림이 ‘민생 안정과 내실 중시’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민생이 안정되고 민심이 통합되지 않으면 대외 확장은 둘째 문제고 우선 국가 유지가 녹록지 않다.

더구나 촉은 오보다도 불리한 상황에서 통일을 추진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민심을 잘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제일 좋은 통치는 격양가(擊壤歌)의 마지막 구인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帝力于我何有哉)’라는 말이 백성들에게서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임금의 존재감과 권위가 큰 것 즉 위(爲)가 있다는 것은 아직 질서가 온전하지 않다는 의미인데, 반대로 백성이 임금을 모른다는 것은 무위지치(無爲之治)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고복격양(鼓腹擊壤)의 태평성대인 것이다.


백성이 평안하면 위정자의 존재를 모르게 되니, 이것이 다스림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다.


그러하다면 위정자가 할 일도 없게 된다.


제갈량은 그의 정무 처리 방향에 대해 평가했는데, 단지 유비 곁의 보좌인 경우 백성을 다스리는 부분에서의 면모는 알기 어려우므로 광도현령으로서의 장완에 대한 평가일 가능성이 있다.


장완이 작은 현을 잘 다스려 백성을 평안하게 하였으나 자신이 더 크게 쓰이지 못하는 현실을 한탄하며 술에 의지했을 수도 있다.


관직을 박탈당한 후 장완은 한밤중에 소 한 마리가 문 앞에서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는 꿈을 꾸고는 불안해서 해몽가 조직을 찾아가 물었다.


조직이 말하기를 ‘대저 피를 보는 것은 일이 분명해졌다는 뜻입니다. 소의 뿔과 귀는 公 자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당신의 지위는 반드시 공(公)에 이를 것입니다. 아주 길한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장완은 십방현령으로 임명되고, 219년에 유비가 한중왕으로 즉위했을 때 장완을 상서랑에 임명했다.


상서랑은 황제의 비서실 즉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인 상서대(尙書臺)의 중급 관료이기 때문에, 유비는 장완을 지근거리에 둔 셈이었다.


유비가 익주목이 되고 그 지역의 인사권을 행사하게 된 것은 214년의 일인데, 219년에 상서랑에 임명되었다면 약 5년 사이에 광도현령, 십방현령 등 지방관을 거쳐 상서랑이라는 중앙정부 요직으로 발령받은 셈이 된다.


이때는 전란의 시대이었던 데다 촉은 삼국 중 인재가 가장 절실한 국가였고 여기에 유비의 인재를 보는 안목을 더하여 생각해 보면 내부에서 빠르게 승진한 것은 장완의 역량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2. 촉한의 소하


223년에 제갈량이 대권을 잡으면서 부(府)를 열었는데, 이때 장완은 또 한 번 크게 약진하여 승상부에서 인사 업무를 주관하는 동조연에 임명된다.


워낙 중책이어서 부담스러웠는지 처음에 장완은 이를 간곡히 사양했다.


제갈량이 장완에게 이르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가까이 있는 자를 배반하고, 도덕을 버리고, 백성을 파멸시키는 것을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동정하지 않습니다. 또한 가깝건 멀건 사람들에게 그 사퇴하려는 뜻을 이해시키지도 못합니다. 이에 그대는 자신의 공업과 덕행을 나타내어 이 선발의 타당함과 중요함을 밝혀야만 합니다.’라고 하였다.


임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 나의 체면과 위엄을 구기는 일일 뿐 아니라, 나를 배반하고 백성을 파멸시키는 부도덕한 일이나 다름없다는 말로 생각된다.


이런 극언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제갈량이 장완을 중요한 인재로 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제갈량은 장완을 다시 참군으로 승진시켜 상황 분석이나 전략 제안 등 군사 보좌를 맡도록 하였다.

227년에 제갈량이 한중으로 나아갈 때 장완은 성도의 승상부에 남아 일을 총괄하면서 북벌군의 보급을 담당했다.


이는 유방-소하의 역할 분담과 거의 일치한다.


후방 안정과 보급은 군의 생명줄과 같으니 제갈량보다 가시적이지 않았을 뿐 소하와 마찬가지로 장완은 촉한의 대들보가 된 셈이었다.


제갈량은 늘 ‘장완은 그 뜻을 충성과 고아함에 두고 있으니, 나와 함께 제왕의 대업을 도와줄 사람이다.’라고 하였고, 유선에게 은밀히 표를 올려 아뢰기를 ‘신에게 만일 불행이 있게 된다면, 훗일은 응당 장완에게 맡기십시오.’라고 하였다고 한다.


3. 와룡이 떠난 자리를 지켜 내다


234년 10월에 제갈량이 사망하니, 그의 유지대로 장완이 대권을 이어받아 상서령+익주자사+대장군+녹상서사 등으로 연이어 임명되어 겸임하고 안양정후로 봉해졌다.


20여 년 전 조직의 해몽이 그대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제갈량 한 사람에게 크게 의지한 상황이었으므로 촉한의 조야가 매우 불안해했다.


장완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고 차분하게 업무를 수행하니, 이로부터 사람들이 장완을 점점 신뢰하고 그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집권 4년 차였던 238년에 유선은 장완에게 조서를 내려 한중에 주둔해 북벌을 도모하라고 명하였고, 다음 해인 239년에 대사마로 승진하며 군권을 강화한다.


제갈량은 장안 방면 즉 관중 지역을 발판으로 낙양을 향해 나아가는 대전략을 수립했다.

이는 관중을 발판 삼아 초한쟁패에서 승리를 거둔 한 고제 유방의 전략과 큰 틀에서 비슷하다.

북서쪽으로 나아간 뒤 동진하는 식의 전략이었는데, 위수 유역에서 기산/진창/가정 등에서 일진일퇴를 반복하다 끝나고 말았다.


관중 분지로 들어가기 위한 험한 지형은 점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보급을 담당하던 장완은 그 요인을 크게 보았는지 북벌의 대전략을 바꾸어 동쪽으로 내려가면서 한수와 면수 유역의 위흥(서성)과 상용을 취하고 이를 기반으로 장안으로 올라가고자 했다.


그런데 강을 따라가는 경우 승리하지 못했을 때 퇴로가 매우 곤란하므로 촉 조정에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게다가 운이 없게도 장완의 지병이 연속적으로 도지면서 일이 지체된다.


비의와 강유 등을 보내 전략을 재고하라는 취지의 황명이 내려가니, 한중의 장완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소를 올렸다.


- 신이 명을 받아 한중에 주둔한 지 벌써 6년 차인데 신이 아둔한데다 열병까지 겹치니 일을 진행할 수 없어 통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는 9주를 차지하고 세력을 뻗어나가니 제거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 촉오 동맹을 통해 동시 출병을 하는 경우, 빠르게 일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위의 힘을 빼놓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승리가 계속 연이어지기는 어렵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 서량(양주)의 강족은 우리에게 매우 호의적이며 이전에는 아군과 협공하여 위군을 격퇴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곳을 취하는 것을 우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강유를 양주자사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전방에게 대치하게 하고 신이 후방에서 뒷받침하겠습니다.


이러한 작전을 수립한 후 성도의 길목이자 사방으로 통하여 후방 지원에 유리한 부현에 주둔하였는데 장완의 병은 더욱 심해졌다.


결국 246년에 사망하고, 비의가 뒤를 이어받는다.


장완의 두 아들 장빈, 장현도 촉한의 신료로서 활동했다.


장남인 장빈은 종회 측의 군대에 의하여 한성에서 포위되어 있을 때 장완의 묘에 참배하고 싶으니 산소의 위치를 알려달라는 종회의 서신에 대해 종회의 인(仁)을 예찬하며 장완의 묘가 부현에 있다고 답신한다.


특히 전시에 포위까지 당한 상황에서도

[세상 일을 떠나 의뢰하거나 교류할 경우는 거절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한 부분이 나름 감동을 준다.

동생인 장현은 등애에게 유선이 항복한 후 이 사실을 강유에게 알리러 갔다.


이 형제는 비극적이게도 264년 종회의 난에 연루되어 살해된다.


4. 묵묵하게 걸어 나가 신뢰를 얻고 내실을 취하다


장완은 매우 신중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아랫사람도 그러하였다.


동조연으로서 장완의 부에서 인사 업무를 맡아보던 양희는 무뚝뚝한 성격이었는지 장완과 대화할 때조차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에 누군가가 양희를 참소하기를 ‘공께서 양희로부터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장완이 답하기를 ‘사람이 마음이 각기 다름은 얼굴이 각기 다름과 같습니다. 앞에서는 순종하면서 뒤에서는 악행하는 것은 옛사람들이 경계했던 일입니다. 양희가 묵묵히 있었던 것은 내 생각에 찬성하면 그의 본심이 아닌데 반대하면 내 과오를 들추어내는 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양희의 좋은 태도입니다.’라 하였다.


이는 개인적으로 장완에 대해 가장 고평가하고 싶은 점 중 하나이다.


말하지 않아도 어떤 뜻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우선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제일 좋은 건 이심전심인데, 특히 가족이나 친구 또는 동료 등의 경우에는 이만큼 탁월한 것이 없다.


하지만 상하관계에서는 이런 것이 있기 어렵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제일 바람직한 리더와 참모의 관계는 과시하거나 서로 자기를 드러내려고 애쓰기보다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이심전심에 이르러 내실을 취하는 것에 있다고 본다.


장완과 양희는 이러한 ‘침묵의 미학’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본래도 찾아보기 힘든 관계 양상이지만 현대사회로 오면서는 특히나 그런 듯하다.


양희와 반대로 양민이라는 사람은 장완을 비난하며 ‘장완은 일하는 것이 모호하여 진실로 이전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누군가가 장완에게 전했는데 담당자가 양민을 다스려야 한다고 청하였지만 장완은 ‘나는 확실히 이전 사람만 못하므로 추궁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담당자가 양민에 대해서가 아닌 장완의 모호한 일 처리를 추궁하려 드니 장완이 이르기를 ‘진실로 내가 이전 사람만 못하다면 이 일은 당연히 처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일이 응당 처리되지 못하면 일을 모호하게 하는 것입니다. 달리 심문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였다.


뒤에 양민이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는데 사람들은 양민이 이전에 장완을 비난한 일까지 거론하며 장완이 양민을 주살할 것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했다.

하지만 장완은 사감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가히 공명(孔明)의 공명(公明)함과 같았다.

양민과 같은 이들이 미우나 고우나 촉에는 사람과 안정이 필요했다.


제갈량 사후 이미 조야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데, 촉은 안 그래도 삼국 중엔 비교적 약소국에 가까웠다.


인재, 지형, 자원이 촉한을 지탱하는 3개의 축인데 집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양민을 죽이는 등 정치적 목적의 본보기 숙청을 한다면 앞일은 안 봐도 뻔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완은 20여 년 전 제갈량이 소열제 유비에게 했던 말 그대로 ‘백성을 안정시키고 내실을 취하고자 하는 '사직지기'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진수는 장완이 단정하고 중후하며 위엄이 있다고 하며 그가 비의와 더불어 제갈량이 이루어 놓은 규범을 이어받아 그대로 따르니 내외로 우환이 없고 평안했다고 하면서도, 소국의 분수를 지키지 않았다고 평했다.

배송지는 진수의 부정적 평가에 대해 동의하지 않고 장완이 공을 탐하지 않고 과하고 부적절하게 나서거나 행동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잃은 바가 없다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진수의 평은 구체적이지 않아서 대체 어떤 점이 소국을 다스리는 도리나 조용히 지키는 이치를 몰랐다는 것인지 독자로서는 알 수 없게 한다고 하였다.


아무래도 진수는 서진의 역사가였고 동시대 인물이었기에 사마씨 가문이 멸망시켜 그 공으로써 찬탈의 기반을 만든 촉의 재상을 두고 호평만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제갈량에 대해 그랬듯, 어떻게든 부정적 평가를 붙여놓은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구태여 무엇이 문제였다는 점을 서술하지 않은 것이나 그 열전에서도 장완에 대한 부정적 묘사가 전무한 것을 보면 진수 개인적으로는 장완을 고평가했을 것으로 본다.


이는 진수가 촉한 출신이라는 점도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진수가 233년생이고 장완이 246년에 사망했으므로 장완은 진수가 대강 13세 때 사망한 것이다.


비록 장완의 집권기를 성인으로서 제대로 체험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장완의 집권기에서 오래지 않아 관직 생활을 하는 등 촉한에서 활동했으므로 좀 더 생생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렇게 진수의 편찬 환경을 감안해 보정하면, 진수와 배송지가 장완을 평가하는 방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본다.


*참고) 정사 「삼국지」 촉서 14권 장완비의강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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