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여러 직업인들을 모시고 진로특강을 했는데, 나는 가정법원 판사님의 강의에 들어갔다(그때만 해도 딱히 법학에 대해 큰 관심은 없던 시기였다). 내용은 크게 기억나지 않지만, 가족 사건 '같은 거나' 하고 있다는 투로 말했던 것 같은 기억이 있다. 중학생들 앞이라 일부러 좀 농담조로 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보다도 철이 없었을 때는 결국 개인의 사건으로 귀속되어 이해되는 법학의 대개의 영역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작은(私) 영역보다는 큰(公) 영역이 더 와 닿는 다소 치기도 어렸던 시기였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확실히 우리 일상에 직결되고 만약 사건으로 비화되면 가장 큰 스트레스를 주는 사법(私法)의 문제들이야말로 단연 제일 중요하다.
가족법 특히 이혼은 더욱 그러하다. 평소에 가족문제를 법원에까지 가져갈 일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그런 건 사소하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당사자들에게는 그 일만이 온 세계이다.
혼인은 참 기묘한 제도이다. 흔히 우리는 혼인은 로맨틱한 관계를 제도적으로 묶는(Binding)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가족법은 사적 자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법을 다소 2차적인 영역으로 보는 민법 중에서도 가장 개인 간 긴밀한 유대감이나 관습 등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형식적인 법률관계보다 실질적인 인간관계가 더 중요한 것이다. 흔히 (특히 채권법에서) 법률관계와 구별되는 개념으로서 제시되는 호의관계(호의동승처럼 대가 없이 이익을 주고 받는 관계)보다도 가족이 기초하는 인간적 유대감은 훨씬 심원하고 자율적인 것이다.
그러니 이론적으로는 그러한 유대감이 없어진 상황에서 혼인을 유지하는 건 단지 제도적 껍데기를 억지로 유지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도출될 수 있다. 이것이 파탄주의의 기초 논리가 된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형성하는 관계가 실체가 되고 이를 법률관계로서 안정화/제도화하는 점도 있지만 반대로 그 법률관계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신의를 지키도록 하는 면도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신의칙과 같은 일반 원칙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가변적이고 나약하기 그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 강고하게 스스로를 강제하지 않으면 항상 충실할 수만은 없다. 도덕윤리나 삶의 기둥을 신앙에 두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로맨틱한 관계도 처음 그대로 영원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자녀나 체면 등 여러 가지를 위해서 혼인이라는 제도를 고리로 유지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 이는 쇼윈도에 불과하고 당사자들에게는 고통만을 안겨줄 뿐이기는 하다. 유책 당사자가 아닌 배우자의 입장에서 복수를 위해 일부러 이혼을 하지 않는 경우라 해도, 결국 그 배우자에게도 지난 혼인생활의 시간이라던가 그간 묵히고 삭이고 견뎌온 감정이라던가 하는 것 즉 매몰비용에 지나지 않는다. 유책배우자가 아닌 배우자에게 제일 좋은 건 어쩌면 지금이라도 과거를 끊고 자신을 위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그 선택은 어디까지나 상대 배우자 자신의 숙고 등을 거친 자율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지 않고 혼인관계의 실체가 없어졌다는 이유 만으로 유책배우자라도 혼인을 해소해 달라고 청구한 것을 인용한다면 일견 법적 처리는 완벽할지 몰라도 결국 개인의 의사는 존중되지 않는 것이다. 좀 우습게도 유책주의를 유지하면서도 줄줄이 길게 예외 상황 같은 것을 계속 내놓는 것이 판례의 입장인 것 같다. 어쩔 수 없기도 하다. 예외를 두는 것과 원칙을 바꾸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얘기다. 법학에서 가장 중요한 논리 구조(?) 중 하나라고도 본다.
이미 간통죄가 폐지된 상황에서, 나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유책배우자에게 도입되어야 한다고 본다. 정확히는 '징벌적 위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혼인의 전통적 권위라던가 하는 것을 인정해서가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물리적 공간과 생활 리듬 그리고 성적 관계 등에 이르기까지 인생 전체를 함께 하기로 한 심원한 개인 간 유대에 기초한 신의를 깼다는 것은 용납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뜬금없지만,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장면 중 하나는 여왕의 당부로 존 메이저 총리가 찰스와 다이애나 각각과 면담하며 조정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혼 절차에 메이저가 개입했는지 여부는 모른다. 개입했어도 법적 절차와는 기본적으로 거리가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메이저는 변호사 자격을 가지기는커녕 대학조차 간 적이 없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학력보다는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을 얼마나 잘 자기 인생의 성숙을 위한 양분으로 사용하느냐 하는 지혜의 기질이 중요하다. 실제의 메이저는 드라마 속 메이저보다도 훨씬 현명한 면이 있었다. 사람 사이의 깊은 감정과 관계, '공기'를 잘 읽는 능력이 상당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장면을 보면서 변호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품은 적이 있다. 실은 가까이서 이미 심리적으로는 파경인데도 끝내 계속 가는 사람들을 본 바가 있어서 그런 게 더 크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혼을 하지 않으면 그래도 감정이 요만큼이라도 남은 것이 아니냐 하지만 경멸과 피로를 넘어 소진까지 와도 버티는 사람들은 많고 거기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어쩌면 가족이란 그 제도나 구조 내지 규범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좋아 보이는 가족이라도 묻고, 넘어가고, 싸우며 계속 앞으로 헤쳐 나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렇게 모두가 참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깨는 사람이 용서되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