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의 인조를 보며 든 생각
김갑수 배우는 천의 얼굴을 가졌다.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배역은 드라마 <추노>에서 맡은 조선 인조 이종이었다. 용골대를 상대할 때를 보면 허약한 듯 보이지만 능구렁이가 속에 있다. 어떻게 보면 후손인 고종 이희의 성공한 케이스랄까.. 실은 그는 왕으로서 좌의정 이경식(김응수 배우)보다 한 수 위, 한 발자국 뒤에 있고 봉림대군 이호의 승계를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해 손자들을 비정하게 죽여 없애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 어쨌든 우리나라의 외교 역시 이와 같이 공세적이지 않으면서도 만만하지 않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극중 인조가 보여주는 외교는 소현세자 이왕과 민회빈 강씨의 3남 경안군 이석견을 내주지 않기 위한 비열한 수긴 했지만..)
어떤 사람이 내게 한국이 제국이었던 적이 없어 다문화에 취약한 게 아니냐는 말을 했다. 그런데 통상 다민족 국가라는 의미에서의 제국이 되려면 대국이었거나 대국이다. 그러나 나는 대국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대국의 국민은 국가의 위상과 규모 때문에 외부 전란이나 내부 재편에 수시로 휘말린다. 소국은 외세에 시달리는 면이 있지만 체제 구축만 잘하면 장구하게 가고 내부 재편으로 인한 불안정 걱정은 덜하다. 또 현대적으로 보면 소국이어야 자유민주주의와 인권보장이 용이하다고도 본다. (당연히 소국이라는 조건만 가지고는 안 된다. 소국이어서 독재하기 쉽거나 대국이어서 온전히 독재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으니.)
가끔은 역사를 보다 보면 우리나라가 새삼 자랑스러워지는 순간이 있다. 1542년(명 가정 21년, 조선 중종 37년)에 명에서 임인궁변이 일어났는데, 명 세종 가정제 주후총이 도교의 단약을 만들기 위해 궁녀들의 월경혈을 얻고자 그들을 학대하고 살해하는 일을 빈번히 저지르다가 궁녀들이 황제를 교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전해 들은 조선의 중종은 필히 배후가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후손인 우리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중국을 천조로서 지성으로 섬기긴 했지만, 명색이 대국인 중국 황제가 고작 환관이나 궁녀들 또는 후궁에게 놀아나거나 살해(동진 효무제)당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은 황당한 일이다.
물론 당시 우리도 폐조 연산군이 바로 전대 왕이긴 했으나 결국 중종반정으로 폐위했다. 중종 재위 중 상당 기간 동안 명에 이를 숨기고 사기를 쳤지만, 어쨌든 중종은 불안하게나마 장기 재위하면서 왕권을 지켜냈고 중종 뿐만 아니라 조선의 국왕 중 내관이나 궁녀에게 놀아난 왕은 없다. 반면에 명은 선덕제 이후로는 제대로 된 황제가 거의 하나도 없으니, 어떻게 보면 500년 이상을 간 우리 조선왕조보다 못하다.
물론 이것은 영토의 크기라던가 시대적 맥락 등을 여러 가지를 고려하지 않은 후세인의 단편적 감상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