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육이나 학습 등의 문제에서는 보수적인 편이다. 자기 생각이 풍부한 교수나 교사도 좋지만, 기본적인 교수 역량 즉 강의 역량이 좋은 교사나 교수를 제일 존경했다. 대학에서 뚜렷하게 기억나는 말 중에 한 역사학 교수님이 ‘요즘엔 생각을 묻거나 토론 중심으로 수업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런 것도 기초적인 지식이 갖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라는 취지의 말이 있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토론’ 중심 강의나 ‘지능’ 중심 적성시험 같은 것들은 모두 문제가 뚜렷하다.
인문사회 분야에서는 특히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기 어렵다. 아무리 ‘무식’하고 ‘기계적’이어도, 결국엔 베이스가 되는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꾹꾹 눌러 담아 놓아야 그것들이 자양분이 되어 자기의 생각이 형성되고 지능도 향상되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예컨대 대학입시에서는, 일부 특목고에서 주제나 발표 중심으로 공부한 학생보다는 일반고에서 제대로 전공 연관 과목들의 지식을 잘 이해한 학생이 낫다고 생각한다. 내 경험상, 특히 중등교육 수준에서는 기본적인 지식의 체계와 스트럭처와 뼈대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 파생되는 이런저런 주제 같은 것을 접하는 것보다 먼저이다. 뿌리부터 시작해 줄기로 가야지 줄기를 하나씩 세어 가는 것을 우선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들을 묶는 큰 몸통이 우선이다.
문제는 주입식이라고 비난받는 지식 중심 교육의 문제는 실제로는 교수학습보다는 평가에 있다는 점이다. 내신이나 대입 등으로 인해 그간 특히 인문사회 분야에서는 각 교과와 과목의 특성에 맞추지 못하는 평가방식이 채택되어왔다. 일례로 역사과에서는 OX 퀴즈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에 지나지 않는 문제 출제 방식을 유지해 왔다. 변별력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내는 치사한 세부 지식이라던가 순서 등을 맞추는 문제는 실은 어떤 면에서 본래 역사과에서 요구하는 것보다 저차원적 사고력만 요한다. 기본적으로 역사과에서는 개별적/단편적 지식의 암기 전에 우선 인과적 흐름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역량이 요구된다. 개별적/단편적 지식은 그러한 인과적 흐름의 맥락 안에서 어떤 의의를 가지는지를 이해해야 하는 식으로 돌아간다. 예컨대 조선의 왕 순서를 모두 알 필요는 전혀 없다. 중요한 건 그 왕들이 전체적인 조선이라는 국가,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외교와 국방 등의 시간적 흐름 속에서 어떤 역할과 의의를 지녔느냐는 점이다.
지식이나 기술 본위가 제일 중요하고, 그다음이 역량(Competency) 그리고 제일 마지막이 지능이라고 봐야 맞다. 지식은 객관적이지만 지능은 주관적이다. 지능이라는 건 대단히 여러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은 결국 그 지식을 볼 때 자동적으로 거기에 요구되는 지능도 함께 측정하게 된다. 그러니까 지능을 본위로 지식으로 나아가는(e.g. 법학적성에서 로스쿨로) 것은 황당한 얘기고, 실은 지식을 본위로 하면서 그 과정에서 지능이 발달하게 되는 것이 순리이다. 역량이라는 건 구체적인 능력이나 행동을 말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래도 지능보다는 낫다. 엄밀히 말하면 보통 지능은 역량을 통해 측정된다. 마치 수리력이라는 지능을 보기 위한 지표의 하나로서 기초적 계산력이라는 역량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역량을 지능을 본위로 사용하는 것과 지식을 본위로 사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사실상 추상적 개념(지능)을 조작적 정의(역량)라는 실제 선발이나 교육 등의 맥락에서는 비합리적 폭력이 될 수 있는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후자는 직무나 학업 수행의 내용 그 자체(지식/기술)를 구체적인 능력(역량)으로 쪼개어 평가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혹자는 AI 시대에는 단편적 지식보다는 지능이 더 중요하다고도 한다. 그런데 지능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인공지능이 사회에서 얼마나 쓰일 수 있느냐는 결국 인공지능이 내놓은 산출물을 어느 정도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때의 판단기준은 결국 인간의 생물학적 기제를 거쳤느냐 아니면 AI의 기계적 기제를 거쳤느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특별함이라는 가치 그리고 이것의 전제에 있는 생물학적 기제에 대한 고평가(?) 같은 것을 걷어내고 보면 실상 인간‘만’ 할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많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이 창의력과 같은 지능을 발휘하려면, 그 기초가 되는 재료로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식은 정직하게 책을 읽고, 손으로 도해 같은 것을 그리며 정리하고, 자기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타인과 대화하고, 실험을 진행하고, 무언가를 고안하고 개발하고 하는 등의 다양한 행동을 통해 습득된다. 아무리 고차원적이어보이는 사고도 아주 기초적이고 단순한 행동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행동이 없이 고차원적 사고만을 보겠다는 건, 결국 포괄성이나 객관성 같은 것이 충분하지 않은 지능을 임의로 평가하겠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수학의 기초 연산부터 미적분에 이르는 것들을 굳이 직접 하지 않고 그냥 컴퓨터에 맡기고도 갑자기 위대한 수학자가 나올 리 없는 이치와 같다. 결국 기술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