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나 지금이나 제3의 길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장외에만 머물러 있으며 언제 올 지 모르지만 단지 세상이 뒤집히기를 바라는 것 같은 종래의 좌파나, 결국 문제의 뇌관은 해결하지 못하면서 레토릭만 그럴듯하고 시스템의 안정성을 침식시키는 포퓰리즘 중 어떤 것도 아무것도 전달하지도 변화시키지도 못한다.
그들은 종래의 중도 세력에게 비판을 가했고, 현재의 중도 세력은 아무 비전도 없이 무기력하므로 그럴만하지만 과거의 세력들은 좀 다른 문제이다.
책임을 지면 성과와 실패가 같이 나타나는데, 비판자들의 경우 본인들이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가 없다.
그런데 책임을 진 사람들은 성과도 있는데 비판자들은 성과도 역시 없다.
열 발자국을 가자고 10년을 제자리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한 발자국이라도 1년 안에 가는 게 더 타당하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이런 사상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시한 '중도개혁주의'의 주요한 인식적 전제이다.)
어떤 제도를 런칭하는 것이 일단 런칭된 제도를 완벽하게 확충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
그러니까 제도의 런칭을 우선시하고 완벽성을 일정 부분 포기하는 것을 비난하는 식으로 런칭 자체를 좌초시키는 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현대세계의 경향을 보면 런칭과 확장이 아니라 모두가 서로를 좌초시키는 데에만 관심이 있고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소진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거나 심지어 악화된다.
이러한 흐름의 맥락에서 민주화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 등의 중심성에서 벗어나 생활자와 중산층 그리고 서민과의 공감대를 중시하며 집권에 성공한 20세기 말-21세기 초의 동아시아적 리버럴의 감수성은 되레 바로 지금 재소환이 요청된다고 본다.
90년대 말~2000년대에 세계적으로 중도진보 세력이 중도화로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제3의 길(Third Way)'이 화두로 떠올랐다.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 1938-)가 제안한 이 흐름의 정치적 실제에는 토니 블레어(영국, New Labour), 빌 클린턴(미국, New Democrat)을 필두로 일본 민주당(1998-2016), 김대중 & 노무현(한국) 등이 포함된다.
더 기초적으로는 이스라엘-미국 사회학자 아미타이 에치오니(Amitai Etzioni, 1929-2023)의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에 기초한다.
이 사상의 핵심에는 개인과 사회 어느 일방에 대한 강조가 아닌, 상호의존성에 대한 강조 그리고 이에 기초한 '권리와 책임의 균형'이 있다.
서구 사회처럼 개인 중시가 디폴트 값이면 좀 더 사회가, 반대로 동아시아 사회처럼 사회 중시가 디폴트 값이면 좀 더 개인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중용(中庸, Doctrine of the Mean, Mesotēs)이다.
이 사상 자체가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공동체주의의 원류가 되는 유가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사한 논리 구조를 담고 있기도 하다.
상황과 맥락 그리고 이에 따른 필요에 기초해 실천적 지향점(균형)이 어느 쪽이 되느냐는 계속 이동하게 된다.
제3의 길은 역사적 성격과 정치적 필요에 강하게 기초하고 있었다.
80년대를 압도적으로 풍미한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 등 신자유주의에 대한, 동아시아에서는 발전국가 보수주의에 대한 반격과 정권교체의 패러다임이었다.
또 탈냉전과 이념의 종언을 기초로, 베이비부머 세대의 호황/기술 발전/시장 중심주의/세계화/새천년에 대한 낙관이라는 점에 기초하고 있는 사상이었다.
핵심은 '중도진보의 국정 역량 향상과 국민정당으로의 확장'에 있다.
- 개인-사회의 이분에 반대하고 공동체적 상호의존성 강조
- 노동계급이나 사회운동 중심에서 생활자와 중산층 포섭과 확대 통한 광범위한 연합(Broad Coalition) 형성
-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의 의의 (무엇보다 경제체제는 시장경제가 최선이라는. 또 산업 차원에서 2차 산업에서 3차-4차 산업 중심으로의 전환.) 인정
- 문화적 중도주의 (포스트모더니즘도, 모더니즘도 아닌 '성찰적(Reflexive)' 근대성의 주장 - 여성주의, 환경주의 등 지지 BUT 급진적 방향으로는 나아가지 않고 20세기 패러다임에서 확장이라는 관점으로 접근.)
- '생산적' 복지(Workfare)와 지속가능한 복지국가로 재설계
- 지식 기반 사회경제와 이에 대응하는 교육혁신 및 ICT 기술에의 적극적 관심
- 노동시장 유연화
- 행정개혁과 정부혁신 (NPM+a(단순히 '작은(Small)' 정부 아닌 '똑똑한(Smart)' 정부로))
- 민관협력(Public-Private Partnership, PPP)
- 지방분권
- 뉴 거버넌스와 시민사회('제3섹터')에 대한 강조 (특히 유럽의 경우 이전부터의 사회적경제(연대경제, 협동조합 및 사회적 기업 등)에의 관심)
- 규제 완화 지속(특히 금융, 기술 등)
- 기업의 산업 운영 자율성 인정 BUT 경영 건전성 유지/감시
-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에 대한 지원 강화
- 공영에서 민영이 된 산업 운영 형태 유지
- 세계화에 대한 긍정
- 인권과 민주주의 중심 윤리적 국제사회 (주장에 따라 공세적 군사 개입의 정당화(특히 토니 블레어)까지)
- 자유무역과 시장 개방 및 통합 옹호
이상이 주요한 정책 이니셔티브의 대강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의 공공서비스 품질 향상이나 전자정부 등 많은 아이디어들은 제3의 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들은 신자유주의에의 항복이라는 거센 저항에 직면했고, 오늘날 밀레니엄 좌파들은 그러한 '기득권 진보'에 대한 경멸을 보내는 면이 있다.
실제로 그들은 비판 받을만한 점이 많다.
블레어의 퇴임 이후 독재 친화적 행보나 클린턴의 재임 중 수많은 성 관련 논란 등...
그런 방종함은 적절치 않지만, 상대적으로 동아시아에서 리버럴 정치가 수권 세력으로 부상하던 흐름은 서구의 그러한 흐름과는 전혀 별개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나는 제3의 길(Third Way)이라는 중도진보의 중도화 경향에 아직도 동감하는 입장이다.
다만 이를 2030년대로 가는 상황에 맞게 변용해야 한다고 본다.
문화적 이슈에 대한 집착과 끊임없는 해체와 저항 만을 본위로 하는 최근 좌파의 경향은 결국 복잡다기한 현대사회의 공공 운영과 사회경제 안정화를 저해한다.
반대로 내셔널리즘과 배외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 등을 합쳐 범람하는 우익-극우 세력의 이니셔티브는 파시즘 프레임까지 걸지 않아도 그 자체로 강렬한 저항을 받기에 충분할 만큼 이기적이고 어리석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론화와 숙의민주주의를 통해 파편화 되어가는 사회의 오프라인 상호작용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사회가 없으면 내가 어떻게 있겠느냐.'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사회가 필요하다.'라는 점을 자연스레 체감하기 위해서는 온라인과 익명성의 족쇄에서 탈출해야 한다.
또 ICT '기반' 사회경제가 아니라 ICT '중심' 사회경제가 되는 것은 곤란하고, 기술이 가져올 미래를 낙관하기 보다 그것이 가져올 문제들을 검토하고 대응책을 조기에 마련해야 한다.
요즘 같은 상황이라면 디지털 리터러시 보다는 디지털 디톡스가 더 맞을 수 있다.
단, 이는 기술의 감속이나 단순한 사용 규제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프라인 상호작용의 활성화와 고용 있는 성장으로의 전환 등 실질적인 대안 없는 규제 중심 대응은 적절하지 않다.
현실적으로 사회와 경제가 복잡화, 전문화, 자율화, 다양화 등이 이루어지면서 영웅적 정치인이나 정부가 기획이나 정책을 통해 일거에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해졌다.
그것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건 단기적 착시 현상일 뿐, 정책이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버리는 식의 트레이드 오프식의 효과를 낳는 특성이 이전보다 훨씬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적정하게 필요한 부분에 강하게 개입하고 기본적으로는 개입하지 않는 최적정부(Optimal Government)가 필요하다.
정책의 당사자들이 되는 행위자들의 인센티브 및 적응 구조와 정책결정의 시점과 정책과 현장의 조응 등에 따라 어떤 결과가 나타날 지를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강해졌다.
제3의 길의 최대 패착은 ICT 기술에 대한 낙관과 노동시장 유연화의 옹호가 겹치면서 고용 없는 성장 + 불안정노동의 확산으로 서민들을 더욱 사지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용 창출과 불안정 노동자 중심 노동권 보장 강화, 실업 보험 강화 등의 방향을 골자로 가계 경제를 지지하고 나아가 자산 형성을 도모할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복잡성과 네트워크의 세계에 살고 있는데, 이 정도는 갈수록 더 가공할만한 정도가 되어 간다.
그런데도 사람의 삶과 인간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공공과 시민사회가 과연 이에 대해 공세적으로 대응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이 경우, 결국 리더십이 중요할 것이라고 본다.
정확히는 모든 것을 만기친람하는 리더십이라기 보다, 논제를 명확히 하고 의제를 제안하며 전체적인 공동체와 네트워크가 적정히 안정화된 상태에서 유지/발전할 수 있도록 관리할 수 있는 리더십이.
그러려면 20세기의 성숙한 리더십을 21세기 중반으로 가는 상황의 현실과 접합하여 현대사회의 새로운 정렬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