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법학 공부와 법적 사고가 내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고 10년지기 절친에게 말했다.
이는 다음을 의미한다.
어제 독서모임에서 칸트의 행복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칸트의 행복의 자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주제가 나왔다.
그런데 내가 보기로는 칸트는 의무 본위의 철학자이므로, 도덕적 의무를 오직 의무 준수 의지 그 이유 만으로 이행*하는 사람은 행복하게 된다는 것인데 '자격'이라는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와 연계해서,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와 신앙에 대해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면이 있게 되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로마서 1:17)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어쩌다 보니 예전에 에큐메니안 신문인가 에서 봤던 것 같다. 주위를 보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가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문제들에 대해 신앙에 기초한 자신의 가치와 의지를 가지고 이겨내는 것 같았다.
종교건 철학이건 신념이건 뭐건 간에, 믿음이 있는 자는 그것으로 인생을 견뎌내거나 나아가서는 주도하며 살아가는 면이 있다. 물론 과유불급이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면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적 이성이나 합리의 차원은 실존적 문제라던가 하는 것과 연계되어 있는 신앙의 차원과는 또 다른 것이기도 하다.
또 행복할 자격(적극적)이 있는 것은 아니나 결격(소극적)은 있다고 보았다.
예컨대 연쇄살인자는 행복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고 나아가 개인적으로 칸트주의적 견지에서 사형제에 찬성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선택의 자유가 행복의 조건에서 중요한데 영유아의 경우 선택의 자유가 제한되므로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말이 나왔다.
이에 대해 나는 영유아와 성인은 근본적으로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선상에 놓고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또한 행복의 여부나 시비 등 가치 판단을 할 때 일괄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고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경우에 따라 가중치도 두어 가며 +/- 수지를 종합적으로 따져봤을 때 행불행 여부를 판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선택의 자유 특히 영유아기에 기초적 사회화 과정에서 부과 받는 여러 가지 제약들은 다소 불가피한 측면이 있고 그렇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는 것은 이상하기 때문이다.
또 영유아와 성인의 중간인 청소년의 경우에도, 예컨대 통금과 같은 것은 가정마다 다른데 필수적인 것이라고 보기도 애매한 측면이 있어서 이 선택의 자유 제한은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얘기가 나왔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그것이 불행으로 기우는 가중 요소가 될 수는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통금이 있다고 불행한지 여부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렇듯 여러 가지 차원과 요소를 복합적으로 고려하는 등의 사고는 비록 법적 사고가 이것으로 주로 정의되는 것은 아니나 중요 법적 역량의 하나가 아닌가 하고 절친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법적 사고라는 게 보통은 소송의 본안판단으로 나아가기 전에 적법요건을 따지는 것과 같이 구조적, 연역적 사고라고 보는 게 더 맞지 않느냐, 적확하게 말하자면 내 사고방식은 법적 사고라기 보다는 '재준(나)적 사고' 또는 '보통 신중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사고방식'이라고 봐야 되지 않을까 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나는, 물론 구체적 요소들을 세부적으로 따지는 것이 법적 사고의 핵심적 정의는 아닐 것이고 또 모든 법적 판단에서 이 사고방식이 적용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네가 말한 구조적 사고라는 건 어떤 경우엔 해당하지만 다른 경우에선 사실관계의 면밀한 재구성과 해석(특히 사실심에서)과 이를 어떻게 법적 개념과 그것의 체계 및 판례 등 법리와 연결하고 적용할 것인지를 판단하게 되므로 이러한 '사실판단', '포섭'의 단계 등은 모두 내가 말한 것과 같은 구체적이고 체계적 사고를 요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또한 법적 토론이나 논변은 일반적 토론이나 논변과 다르게 법에 대한 공통의 이해를 전제하고 거기에 속하는 개념과 문법 등을 사용해야 하는데 사법(司法) 본위 주류 법학 자체가 개인별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신중하고 세밀하게 사고할 것을 자동으로 요하는 측면이 있다고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