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넬 조스팽을 기억하며

시대 변화에 유연한 진보적 수권정당을 건설하다

by 남재준

Lionel Jospin, Who Helped Set France on Socialist Path, Dies at 88 - The New York Times


해외 뉴스를 본 지 오래다 보니, 리오넬 조스팽(Lionel Jospin, 1937-2026)이 며칠 전인 3월 22일에 사망했다는 소식조차 모르고 있었다.


조스팽은 토니 블레어, 빌 클린턴, 빔 코크 등과 더불어 90년대 말~2000년대 초에 부활한 중도좌파* 정치를 프랑스에서 대표한 인물이다.


*중도개혁주의 (한국), 민주중도 (일본), '노동자'에서 '생활자' 중심으로의 이동 (일본), 제3의 길 Third Way (영미), 신민주당 New Democrats (미국), 신노동당 New Labour (영국) 등. 일본, 한국, 대만에서도 각각 진보적 리버럴 정치의 새 길이 열렸다. 일본에선 사회당 중심 좌파 야당에서 민주당이라는 리버럴 야당으로, 한국에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집권, 대만에서도 천수이볜 민진당 정부의 집권 등 전환이 이루어졌다.


물론 그는 정통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며 블레어의 ‘제3의 길’ 담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2003년 이라크 전쟁 때도 동거정부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함께 반대했다.


그러나 그의 정책들을 들여다보면 후기근대 중도좌파의 정치적 경향 - 진보의 중도화 - 을 알 수 있게 된다.


조스팽은 80년대의 산업구조 재편과 스태그플레이션 대응 등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좀 더 중도적인 제2의 좌파(Deuxième gauche)를 주장한 미셸 로카르*와 정책적으로 비슷한 성향을 지녔다.


*1930-2016, 프랑스 총리 1988-1991. 미테랑 정부 치하에서 총리를 지냈다. 1988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며 사회당 내각을 주도했고 성과를 냈지만, 미테랑의 리더십을 넘어서기 힘들었고 비주류로 남았다.

로카르는 젊은 시절 사회주의 운동을 열정적으로 했지만, 현실정치에 들어서 중장년이 된 80년대에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저작을 프랑스로 들여오는 것을 촉진하기도 했다. 그가 주창한 ‘제2의 좌파’는 종래 마르크스주의나 공산주의 등과 명확히 거리를 두고 좀 더 온건하며 시대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진보적 수권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흐름은 영국의 휴 게이츠켈(1906-1963, 영국, 노동당 대표 1955-1963), 앤서니 크로슬란드(1918-1977, 영국, <사회주의의 미래 The Future of Socialism>(1956) 저술자) 등 이미 유럽 전역에 있었다. 그러나 90년대까지는 비주류나 소수파 주류로 남아야 했고 90년대에 토니 블레어 등이 부상하면서 본격적으로 중도에서 좌우를 밀쳐내고 주류로 자리 잡았다가 2000년대에 퇴조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이러한 흐름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로카르와 조스팽은 같은 흐름 – 사회당 온건파 내지 우파 - 속에 있었고 로카르의 지지자들은 조스팽에 대한 지지로 넘어갔다. 공산당이나 좌파당 등 좀 더 강렬하고 뚜렷한 좌파 세력들은 ‘사회주의를 참칭’하면서 ‘신자유주의에의 항복’을 정당화한 주류 중도좌파에 크게 불쾌해 하고 분노했다.


조스팽은 블레어가 유럽 중도좌파 중 유달리 신자유주의에 친화적이었던 데 대한 불쾌감이 있었던 듯하다.


이는 사실 전체적으로 영국의 앵글로색슨식 시장경제보다 대륙식 사회적 시장경제에 가까웠던 프랑스 측의 시각인 것도 같다.


그럼에도 정책적으로 볼 때, 그는 자신이 ‘넘버 2’ 각료로 있었던 프랑수아 미테랑 시절의 정책들을 그대로 따라가지만은 않았다.


그가 총리로서 주도한 1997-2002 ‘다원적(연립)* 좌파’ 정부(이원정부제인 상황에서 대통령이 우파의 자크 시라크여서 ‘동거정부’라 했다)에서는 이전의 우파 정부들보다 훨씬 많은 공기업의 민영화를 단행했다.


*다원적 좌파(Gauche Plurielle)인 이유는, 사회당이 제1당으로 주도하고 공산당, 녹색당, 좌파급진당, 시민운동 등이 동참한 범진보(범좌파) 연합이었기 때문이다.


조스팽 정부는 실업문제 해소에 진력했다.


주 39시간에서 노동시간을 더 낮추어 주 35시간제를 도입하여 워크 셰어링을 도모하면서,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을 재정으로 보태주었다. (이런 식으로 노동권 보장을 확대하면서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완화해주는 방식은 우리나라 문재인 정부에서 최저임금의 급격 인상 때 택한 방법과 유사하다.)


조스팽의 재임 시기에 프랑스의 실업률은 12%에서 9% 정도로 하락했다.


사회적 배제에 대한 포괄적 사회 보호를 규정한 입법이 이루어지고, 건강보험 보장성이 저소득층에 더 확대되며, 수도료/전기료/통신료 등에 대한 빈곤층 지원, 공실 활용을 통한 주거급여 강화, 직업훈련 및 노동장려금 강화, 최저임금 인상 등 대대적인 사회보장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또 종래의 사회보장 기여금(e.g. 건강보험료, 고용보험료 등)에서 누진세인 사회복지세로 이동하면서 결과적으로 상층이 더 부담하고 하층이 덜 부담하면서 구매력을 올리는(가처분소득의 증가) 식으로 바꾸었다.


저소득층을 위한 소득세 최저한세의 인하, 부유세와 자본소득세의 강화 등이 이루어졌다.


미테랑 정부에서 교육부장관을 지낼 때는 대학, 교사/교수 등에 대한 지원 확대를 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내정에서 많은 성과를 이루었지만, 그는 선거 운이 좋지 못했다.


그가 전국적으로 주목 받은 선거는 1995년과 2002년 대선, 그리고 1997년 총선이었다.


1995년 대선에서 시라크에게 아깝게 석패했고, 2002년 대선에서는 아예 시라크와 극우였던 장-마리 르 펜에게 1차 투표에서 밀려 3위로 결선까지 가보지도 못하는 데 이르렀다.


조스팽 본인은 이를 회고하며 두 번이나 미테랑을 선출해 14년이라는 세월을 사회당 정부 아래서 보냈기 때문에, 프랑스 국민들이 벌써 사회당 대통령을 재선출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런 부분도 있었고, 나아가서는 그 시대 모든 선진국의 중도좌파 정치인들이 겪던 어려움을 그도 겪었다.


중도파는 좌우 양극을 가운데에서 밀쳐내며 집권하지만, 쇠퇴할 때는 좌우 양극에서 서로 다른 이유로 공격 받으며 위축*된다.


*예를 들어,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으로부터 서로 다른 이유로 견제를 받았다. 집권 세력으로서는 억울하고 뼈 아픈 일이긴 했어도, 민주정치체제의 건전한 운영을 위해서는 다양한 세력의 병존이 필요하다. 그러한 다원성이 '자유'민주주의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된다.


거대한 우파는 본래 중도좌파를 배척하는 입장이었고, 조스팽이 젊은 시절 트로츠키주의 활동을 했던 사회운동가였던 점도 잊지 않았다.


반면에 조스팽의 좌파 연립에 참여했던 소수의 좌파들은 충분히 진보적이고 급진적이지 못하며 어떤 면에서는 사회주의적이지도 않은 조스팽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결과적으로 조스팽은 내정에 능통하고 미테랑 이후의 사회당을 풍미했지만, 결국 국민들은 그를 대통령으로는 선택하지 않았다.


나아가 사회당의 운명에도 암운이 드리워졌다.


제3의 길이나 중도화 경향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항복으로 여겨져 쇠퇴하면서, 유럽 전역에서 사회민주주의 중도좌파 수권정당들에 대한 불만들이 터져 나온 흐름에 프랑스 사회당도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조스팽과 비슷한 성향이자 그의 후배였던 프랑수아 올랑드가 2012년 대선에서 당선되었지만, 재선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당 자체가 정치적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블레어나 조스팽을 비롯해 90년대의 많은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은 흥미로운 길을 걸었다.


그들은 대체로 젊은 시절에는 카를 마르크스나 레온 트로츠키 등의 좌익-극좌 성향 인물들에게 동조하고 학생운동을 했다.


그러나 이후 완숙한 국가적 중진 정치인이 된 후에는 좀 더 행정역량이나 집행 가능성 등 ‘문제의식은 옳지만, 공중으로부터의 신뢰나 운영 능력이 약함’이라는 진보정당의 고질적 문제를 뜯어고쳤다.


이들의 흐름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항복으로 해석될 수도 있긴 하지만, 사실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80년대의 산업구조 재편으로 인한 2차 산업 중심에서 3차 산업 중심으로의 전환, 또 60~70년대 좌파적 흐름이나 학생운동에 대한 유럽 사회의 피로감 등이 신자유주의적 재편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었고 진보적 중도좌파 정당들이 재집권을 원한다면 어떻든 이 흐름을 수용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는 항상 한 발을 확실히 내딛는 것이 불확실하게 열 발을 내디뎠다가 결국 열한 발을 뒷걸음칠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해 온 사람이다.


근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회는 발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체나 심지어 퇴보가 없지 않고 무엇보다 천천히 변화한다.


진보적 리버럴이건, 사회민주주의건, 민주사회주의건, 급진좌파건, 신좌파건 간에 모든 종류의 진보 세력은 이를 고치고 변화에 가속도를 올리기를 원한다는 점이 본질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경제는 복잡성과 다양성이 커지고 민간의 자율성에 대한 요구도 커진다.


전체적으로 기획과 국가 주도나 공동체 중심을 원하는 좌파의 경향은 시대에 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체적 현실을 생각하지 않고 가속 페달을 밟으면 되레 백래시가 그만큼 더 커질 수 있다.


원래 역사가 그렇게 빨리 진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뭐가 되었건 한 발을 진전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와 그것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리오넬 조스팽은 ‘진보를 개혁해 진보’시키는 데 크게 일조하고 또한 프랑스정치와 중도진보 정치의 흐름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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