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의 납득 불가 판결
전환치료(Conversion therapy)에 대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황당한 판결(Chiles v. Salazar, 607 U.S. ___ (2026), No. 24-539.)이 나왔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이 이슈는 고전적인 전환치료 – 전기충격요법, 약물요법 등 신체적 방법 + 적극적으로 말로써 성적 소수 정체성 및 지향성이 해악이라는 점을 주입하는 정신적 방법 – 이 아니라, 일종의 ‘연성(Soft)’ 전환치료로서 내담자의 선택에 따라 상담자가 이성애나 시스젠더로 될 수 있도록 소극적으로 말하는 행위에 대한 주법의 규제가 미국 수정헌법 제1조에 근거한 (상담사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일단 아직 구체적으로 보지 않고 판결요지를 훑어봤는데, 전문가 그것도 심리상담사가 내담자에게 하는 말을 표현의 자유라는 차원에서 다루는 것을 수용하고 나아가 주법 해당 규정이 위헌이라고 본 법정의견이 이해가 안 간다.
재판 경과를 보니 1심과 2심에서는 다퉈볼 법적 근거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해당 규정은 전문적 행위를 규제할 때 불가피하게 반사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규제하게 되는 것이어서 단지 완화된 심사 즉 자의금지(합리성) 심사만 하게 된다고 언급했다.
연방대법원에서는 전문적 행위라고 해서 직접적 표현의 자유의 보호 대상이 아닌 것이 아니고, 이 사안의 경우에는 엄격한 심사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리버럴 성향의 두 대법관인 케이건, 소토마이어는 보충의견에서 관점(Viewpoint)에 대한 차별적 규제는 엄격한 심사(Strict Scrutiny)가 필요하지만 관점 중립(Viewpoint-Neutral)이지만 내용(Content)에 대한 차별적 규제는 합리성(자의금지) 심사(Rational Basis Review)가 필요하다는 법리를 폈다.
전문가의 그 분야에 관한 표현 등에 대해서는 특히 의료 등의 경우는 엄격한 심사보다는 자의금지 심사가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적어도 해당 사안의 콜로라도 주법 규정은 Viewpoint-Neutral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논의의 여지는 없다고 했다.
그 판단(전환치료 문제가 ‘관점’의 문제라는)도 문제지만, 홀로 반대의견을 낸 케탄지 브라운 잭슨 대법관은 큰 의미도 없고 애초에 그런 사안은 그렇게 많지도 않을 거라고 일축해 버렸는데, 나도 정확히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유치하고 무지한 법리를 마치 대단한 권리의 수호인 것처럼 서술하고, 여기에 어설픈 중도적 입장으로 찬성한 엘레나 케이건ㆍ소니아 소토마이어도 어이가 없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케탄지 브라운 잭슨 대법관을 지명했을 때 어떨까 싶었는데, 대단한 일을 했다.
그녀 혼자 낸 소수의견을 보니 형식적이고 억지스러운 법리를 논파하고 사안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 법정의견을 직격했다.
비슷한 이념을 가지고 비슷한 개념과 논리를 쓰는데도 미국의 사법은 뭐랄까.. 가끔 너무 과해서 억지스러워 보일 정도로 자유지상주의적이고, 법리가 약간 정치적ㆍ수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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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와 전문가의 행위에 대한 법적 규제 등의 법적 문제는 제하고, 성적 정체성ㆍ지향성과 전환치료의 문제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전환치료는 말 그대로 성적 정체성ㆍ지향성을 '전환(Convert)'하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예컨대 트렌스젠더의 경우가 아니라, 반대로 트랜스젠더의 정체성을 느끼거나 그럴 여지가 있는 사람을 '정상적인' 본래의 성으로 돌려 놓는다는 의미이다.
동성애의 경우에도 '정상적인' 본래의 이성애로 돌려 놓는 것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전환치료는 아니지만(교회의 힘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결과로서 '탈동성애'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는 성소수자의 정체성ㆍ지향성에 대한 두 가지 전제를 근거로 한다.
1. 성적 정체성ㆍ성적 지향성은 오직 생물적으로 결정된다.
2. 성소수자의 성적 정체성ㆍ지향성은 후천적이고 '노력하면 올바르게 돌아갈 수 있다.'
당연히 성인과 미성년자까지 대상으로 이루어진 전환치료는 서구에서 큰 논란이 되어왔다.
이는 최근 계속 가열되는 트랜스젠더 인권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구체적 이슈 중 하나이기도 하다.
2018년 테레사 메이 내각 시절에 NHS에 전환치료가 계속되고 있고 당연히 예산이 투입되고 있다는 점이 논란이 되었다.
메이 총리는 전환치료를 폐지하겠다고 공언했으나, 보리스 존슨으로 총리가 교체된 후 영국 보수당 내각은 트랜스젠더 대상 전환치료는 남겨두겠다고 말을 뒤집는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이 치료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깊은 정신적 상흔과 트라우마를 남긴다.
이 치료의 경험자들은 ‘생존자(Survivor)’라고 부르며 한 생존자는 이 치료 경험이 자신을 자살 생각으로까지 내몰았다고 고백했다.
심리상담사가 행하는 상담은 고도로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정신적 어려움이 있는 사람이면 당연히 의사나 상담사의 영향을 받기 쉽다.
가스라이팅 등 부적절한 상황을 일으켜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상담이 언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상담사가 ‘안내자’나 ‘경청자’ 등의 역할보다 ‘멘토’나 ‘지도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영역에서는 종국엔 자기 주도적으로 문제를 극복해야 하지 의존적이어서는 안 되고 의존을 하게 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공적 차원에서는 이 지점을 엄격하게 다루는 것이 맞다.
성적 정체성으로서의 젠더(Gender)는 사회문화적 성과 생물학적 성(Sex)은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사회문화적 성은 사회화 즉 학습을 통해 지니게 되는데 그 규범이 있기 때문에 남성(Male)은 남성(Man)이, 여성(Female)은 여성(Woman)이 된다.
그런데 역시 살아가면서 여러 영향으로(정확히 한 요인을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젠더=섹스 즉 시스젠더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 경우 혼란을 느끼면서 상담사를 찾아갈 수 있다.
이 사안에서 상담사는 어떤 신체적 조치 – 흔히 고전적 전환치료인 전기충격이라던가, 약 복용 등 –를 하지 않았고, 정신적으로도 특별히 어느 정체성이나 지향성이 더 낫다는 식의 유도성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단, 만약 내담자가 온전히 시스젠더이고 싶다고 하면 조심스럽게(?) 그러한 방향으로 상담을 진행했는데, 정확히 이 지점이 문제가 되었다.
오늘날 세계의 심리학계, 의학계 등은 성적 소수 정체성 및 지향성은 (겉으로 그렇게 보인다 해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소수 정체성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해악이 된다는 점에 합의하고 있다.
젠더는 본래 후천적인 개념인데,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 사탕을 고르듯 쉽게 ‘선택’하고 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대학이나 진로를 결정하는 문제와도 고통이 겹치는 부분이 약간 있어도 차원이 다르다.
외적으로는 젠더 중 본래 자신의 섹스와 일치하지 않는 젠더의 일반적 외형을 취하고, 공적으로도 성별 정정을 신청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런데 본질적으로는 내적인 사투 끝에 결국 그렇게 하기로 받아들인 것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택’과 성적 정체성 전환이라던가 성적 소수 지향성 수용 등의 문제는 연장선상에서 볼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종류든 당사자 자신이 이를 감당하고 결론을 내리는 과정을 통제, 저지, 방해하는 등의 시도는 모두 극도로 위험하며, 고도의 공적 규제가 불가피하다.
디폴트값에 가까워 보였던 코어 정체성 중 하나가 주류나 다수와 다르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내적 혼란과 고통 및 재편이 일어나는데 이 위태로운 과정에 대해 개입함으로써 극단적으로는 개인의 정신을 붕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택의 문제로 볼 수 없다는 점은 동성애로 대표되는 성적 지향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다수와 주류문화, 사회규범 등의 힘은 강력하기 때문에, 거기에 압도된 성소수자들은 실존주의적으로 말하면 ‘자기기만’을 한다.
소위 Denial을 말한다.
성적 정체성이나 지향성에 혼란을 느껴 고통스러워하고 본인이 원하며, 적극적인 전환 유도 등이 없다고 해서 말하자면 ‘연성 전환치료’를 허용할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볼 때, 상담사의 의도(e.g. 실제 시스젠더나 이성애가 자연적이고 정상적이라는 생각을 가졌다던가)는 중요하지 않고, 만약 연성 전환치료를 허용하면 단기적으로는 좋아질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결국 본인에게는 물론이고 어쩌면 더 많은 사람에게 해악이 될 것이다.
예컨대 다시 온전한 Man이 됐다고 생각한 자가 혼인에 이르렀고 자식까지 두었는데도 끝내 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는 자신도 힘들었겠으나 무엇보다 배우자와 자식에 못할 일을 한 것이다.
힘들어도, 아니 힘들기 때문에 결국 자기 앞에 놓인 진실을 마주하고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으면 경우에 따라 주변인들이 대가를 치른다.
물론 고민하고 탐색하는 것이 덜 힘들도록 도울 수는 있다.
콜로라도의 해당 주법에서도 ‘개인의 감내, 사회적 지지, 그리고 정체성 탐색과 발전에 대한 수용, 지지, 그리고 이해의 촉진’을 언급한다.
그렇지만 최소한 어떤 방식으로건 디나이얼인 사람이 억지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을 그대로 맞춰주려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