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Populism)에 관하여

국민의 뜻이 최우선이라는 거짓말 뒤의 다수독재와 참주정

by 남재준

대의민주주의에 한계가 있다고 해서 직접민주주의가 곧바로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모든 정치체제는 정치(내지 정책)과정의 운용 방식과 연계되어 있다.


언뜻 보면 투입하는 자가 곧 산출도 맡아본다면 자기 일은 자기가 제일 잘 알 테니 합당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수의 복합인 상황에서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지에 대한 방향과 의지는 도출되기 어렵다.


또 개인마저도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거대한 사회는 어떠하겠는가?


현대 민주주의는 주권자는 인간이며 인간은 태생적으로 불완전하고 그러면서도 공존해야 한다는 원리를 품고 있다.


따라서 민심은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예를 들어, 결국 윤석열을 택한 것은 싫으나 좋으나 우리 자신이었다.


현대 민주정이 왕정이나 신정 등 다른 모든 정치체제와 차별화되는 점은 주권자가 여럿이고 무엇보다 '자성과 개선'이라는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이 가능한 한 자신의 의견을 평등하게 존중 받아야 한다.


민주주의 자체만으로는 사실 다수의 의지나 국민주권보다 어쩌면 훨씬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이 원칙을 담보하기 어렵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오기까지 명목상으로라도 사람들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 투쟁해 온 것은 민주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적 대의였다.


자유주의가 없다면 민주주의 자체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냉소적이고 경멸스럽게 보았던 바로 그 타락한 체제 - 다수의 독재나 참주정 등으로 흘러갈 수 있다.


다수의 독재가 포퓰리즘의 본질인데, 그 다수의 의지가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내부적으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참주정과 결합하게 되고 이로써 포퓰리즘은 언뜻 민중의 의지에 의한 정치처럼 보이지만 1인 지배를 훨씬 교묘하게 정당화하는 정치적 기제가 된다.


포퓰리즘(Populism, 대중주의, 인민주의 뭐라 부르건)에서 말하는 대중의 의지는 결국 하나이며, 이 과정에서 소수의견이나 다원성은 전혀 존중 받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인이 평등하고 계급을 상향식으로 조직화해서 전위정당이 이를 이끌고 가자는 민중민주주의(인민민주주의)가 얼마나 순진한 발상인지 우리는 이미 구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에서 명확히 확인했다.


대중의 의지란 결국 다수의 의지인데, 다수가 직접 모든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우므로 결국 이 경우에도 '대리인'이 등장하게 된다.


이 '대리인'은 '대표자'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왜냐하면 대의민주정의 대표자는 자유위임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만, 인민민주주의의 대리인은 (일단 명목상으로는) 단지 인민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대체 인민 내지 대중의 의견이 무엇이란 말인가?


다원화/복잡화된 현대사회에서 마치 민주주의의 최고 형태인 것처럼 '단지 주권자인 국민의 의지를 따르는 것일 뿐'이라는 그럴듯한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결국 그 대리인 역시 실질적으로는 대표자이면서도 이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기만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것을 가능하다고 하고, 실체적 진실이 아닌 것을 실체적 진실인 것처럼 선전하니까.


포퓰리즘은 피치자로서의 대중의 '분노'에서 시작한다.


물론 관료주의나, 시장의 냉혹함이나,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달라지지 않는 현실 등 대중의 문제의식은 매우 정확하고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 문제의식에 대한 대책을 제일 잘 내놓는다는 것은 아니다.


'대중(소위 국민)이 대책을 제일 잘 안다'는 식으로 말하는 정치인은 사실상 자기의 대책을 곧 국민의 의지인 것처럼 말한다.


더구나 이는 명목상 주권자의 의지인 '민의'이기 때문에 더욱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되고,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곧 '민의'에 거스르게 되는 것이다.


이를 명분으로 반대파나 소수파에 대한 '민주적인' 숙청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런 구조는 공산 체제에서부터 민주 체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그러나 비슷하게 발견된다.


주권과 통치권은 분리된다.


주권자는 국민이지만, 통치권까지 국민이 직접 행사하게 되지는 않는다.


몽테스키외의 말처럼, 국민은 통치권자를 알아보는 안목은 있어도 직접 국사를 처리할 역량까지 갖추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또 무정부 상태의 카오스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면 법과 정치, 행정 등을 합리적이고 질서 있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독립적 의지와 역량을 가진 대표자는 불가피하다.


다만, 민주정 자체의 이론적 가정으로도 또 역사적 현실로도 대의자는 결국 정치권력만이 아닌 사회적 위신이나 경제적 자원 등에 있어서도 주권자보다 실질적으로 우위에 있게 된다.


그래서 참여민주주의와 같이 국민이 좀 더 정치와 거버넌스 등에 참여하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대의민주제의 개혁 패러다임이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패러다임은 조금만 뒤틀어도 결국 포퓰리즘으로 직결될 위험성이 매우 높다.


오늘날 이러한 위험은 거대하게 범람하여 홍수처럼 전 지구를 덮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제는 참여와 담론 그 자체보다 참여와 담론의 '품질'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해졌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결국 숙의(Deliberation)가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이 품질관리에는 논의의 실익, 주장과 근거의 타당성, 논점 일탈 판단,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의 면대면 활성화 등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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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려는 시각의 근원 중 하나는 민중이나 연대 등에 대한 좌파적 긍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민중의 의사가 정말 말 그대로 여과 없이 대표되거나, 민중이 직접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은 다원화ㆍ복잡화된 현대사회에선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민중의 의지란 것이 다원사회ㆍ복합사회에서는 특히 민심이란 권위를 어느 특정 집단이 독점하면서 결국 다수의 독재라던가 하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민중이란 피치자로서의 불만을 품기 마련인데, 이것이 그들의 정치적 동력이 된다.


그런데 사회 운영에 있어서는 불만이나 피치자의 입장을 그대로 그것만 가지고 가서는 안 된다.


합리적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이상이 비합리적인 것을 넘어 바꾸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일은 역사에서 심심찮게 관찰된다.


민중이 실제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결정할 수는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러한 상황에서 관료주의ㆍ엘리트주의 등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


코미디언 리키 저베이스는 자신의 쇼에서 브렉시트를 두고 보통 사람들에게 묻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의 문제의식은 반드시 반영되어야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자기가 정확히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이들이며 일반의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거나 항상 정당하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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