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속 인상 깊었던 재상들

역사에서 배우다

by 남재준

중국은 일찍부터 고도화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발전시켰으며, 향거리선제와 구품중정제 등을 거쳐 과거제 등을 바탕으로 관-학 일치를 이루었다.


많은 재상들이 수천 년의 중국사 속에서 활약했으나 당연히 그 중에서는 천수를 누린 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이들 중 천수를 누린 이들은 후세에 처세술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다음은 내가 인상깊게 여겨 온 중국사 속 재상들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하고보니 대개 신권이 아닌 강력한 황권을 중시하거나 환관이 득세하는 등의 문제가 많았던 당, 명청대에는 특기할만한 재상이 많지 않은 듯 하다.


1. 소하 蕭何 [찬후] _ ?-B.C.193 / 전한(서한) / 일찍이 유방을 종군해 군수 보급을 담당하였다. 유방이 먼저 진의 수도인 함양에 입관했을 때 도서와 율령을 입수해 전국의 호구와 요충지 등을 모두 알았다. 유방이 한왕이 된 후 승상이 되었고 한신을 천거하였다. 유방(고제)이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가 된 후에 논공행상 때 제1위가 되었으며 고제와 여후가 진희, 한신, 경포 등을 제거하는 것을 거들었으며 상국에 봉해졌다. 진의 법률을 정리해 <구장률>을 편찬하였다.


2. 진평 陳平 [곡역후] _ ?-B.C.178 / 전한(서한) / 항우를 따랐으나 유방에게로 옮겨 갔다. 계략에 뛰어나 항우와 범증이 서로 멀어지도록 반간계를 썼다. 한의 통일 이후로 소하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었던 조참 사후 좌승상이 되었다. 고황후 여씨 사후 주발과 더불어 여씨들을 주살한 뒤 고제의 아들인 유항(문제)을 옹립했다.


3. 곽광 霍光 [박육후] _ ?-B.C.68 / 전한(서한) / 장군 곽거병의 이복동생으로서 무제 때 출사하여 총애를 받았다. 무제의 유조를 받들어 김일제, 상홍양 등과 소제를 보필했으며 대사마-대장군으로서 군권을 장악했다. 상관걸, 상홍양과 정쟁을 벌였으며 결국 그들을 제거했다. 소제 사후 유하를 옹립하였으나 결국 폐위하고 유순(선제)을 옹립했다. 20여 년 동안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큰 허물이 없었다는 평을 받았다. 다만 곽광 사후 곽씨 일족은 선제에 의해 숙청당했다.


4. 가후 賈詡 [위수향후] _ 147-223 / 위(조위) / 장수 등 여러 군벌의 책략가로 활약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조조를 도와 관도대전, 마초-한수와의 전투 등에서 계책을 내었다. 조조의 후사 문제에 있어서도 원소가 장자를 후계로 세우지 않아 자멸하였음을 언급하며 조비를 세자로 세우는 것을 지지했다. 문제(조비)가 위를 건국한 후 가후를 태위로 봉했다.


5. 진군 陳群 [영음후] _ ?-237 / 위(조위) / 유비를 섬겼다가 조조에게로 옮겨 갔다. 위 건국 후 문제를 보좌하며 구품중정제의 실시를 건의하고 스스로 중정관이 되어 인재를 등용하였다. 문제의 고명대신 중 하나로서 조진, 사마의 등과 더불어 명제(조예)를 보좌하였으며 후에 명제가 과도하게 궁실을 건축할 때 민생을 우선해야 한다는 취지의 간언을 올렸다.


6. 고옹 顧雍 [예릉후] _ 168-243 / 오(손오/동오) / 손권 치하에서 회계 등을 다스리는 등 행정을 맡아보았다. 말수가 적으며 행동이 때와 상황에 맞았다고 한다. 사감 없이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고 직언을 삼가지 않았다.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취할만한 것이 있으면 대제(손권)에게 보고하여 시행토록 하고 공은 대제에게 돌렸다. 승상에 봉해졌다.


7. 고유 高柔 [안국후] _ 174-263 / 위(조위) / 처음에 원소를 섬기던 친척의 권유로 원소를 섬기게 되었다. 종국에는 조조를 섬기게 되었는데, 탈영병의 가족을 엄형으로 다스리는 것에 반대했고 조조가 측근을 감찰관으로 두는 것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위 건국 후 문제가 고발을 활성화하자 무고의 증가를 지적했고 결국 이것이 현실화되었다. 법을 잘 다루며 백성에게 관대했다. 고평릉의 변 때 조상을 제거하는 것을 거들었다. 삼공(사도, 태위, 사공)을 모두 지냈다.


8. 사마의 司馬懿 [무양후/서진 고조 선제] _ 179-251 / 위(조위) / 명문가인 사마씨 일족으로서 조조를 섬기면서 둔전제 실시를 건의했다. 문제 사후에는 고명대신으로서 조진, 진군 등과 더불어 명제(조예)를 보좌했다. 제갈량의 북벌을 방어하였으며 맹달의 난, 공손연의 난을 토벌했다. 명제 사후 고명대신으로서 조상과 함께 애제(조방)의 고명대신이 되었으나 조상에게 배제당했다. 고평릉의 변을 주도해 조상을 주살하고 위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를 통해 후에 손자(서진 세조 무제 사마염)에 의해 건국될 서진의 기초를 만들었다는 평을 받는다.


9. 제갈량 諸葛亮 [무후] _ 181-234 / 촉한 / 호족 출신이기는 했으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해 은거하면서 와룡선생이라 불리었다. 유비의 삼고초려로 초빙되었다. 적벽대전에서 유비-손권 연합을 성사시켜 조조를 크게 이기도록 했다. 촉한 건국 후 소열제(유비)가 그를 승상으로 봉하였다. 고명대신으로서 후주(유선)를 대신해 촉한의 대권을 쥐고 운남 개발과 이민족 토벌 및 북벌 등에 힘썼다.


10. 장완 蔣琬 [안양정후] _ ?-246 / 촉한 / 처음에는 대개 제갈량을 종군하여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북벌 때에는 주로 군수 보급을 담당하였다. 제갈량 사후 그의 유지에 따라 정권과 군권을 장악해 국정을 주도하였다. 대체로 사감을 배제하고 공정하게 정무를 펼쳐 좋은 평판을 들었다.


11. 왕도 王導 [시흥군공] _ 276-339 / 동진 / 낭야왕 사마예를 보좌하였다. 서진이 멸망한 후 남북의 사족을 연합시켜 사마예(원제)를 옹립하고 그를 보좌해 승상이 되었다. 사촌형 왕돈이 병권을 장악하고 그는 정권을 장악하여 ‘왕씨와 사마씨가 공유하는 천하’라는 말이 나왔다. 명제, 성제까지 모두 보좌하였고 소준의 난이 진압될 때까지도 자리를 지켰다.


12. 범중엄 范仲淹 _ 989-1052 / 북송 / 인종조에 간관으로 출사했다. 곽황후의 폐위 문제를 두고 찬성파인 여이간과 대립하여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구양수, 한기 등과 더불어 군자의 붕당을 자처하며 경력당의를 일으켰다. 경종(이원호)의 지도 하에 서하가 흥하자 서하를 방위하는 책임을 맡았고 그 공으로 참지정사로서 내정개혁(경력신정)을 주도했으나 온전히 관철시키지 못했다.


13. 왕안석 王安石 _ 1021-1086 / 북송 / 어려서부터 문재를 인정받았고 유가사상만이 아니라 그 외 제자백가사상, 문학, 의학 등 많은 학문을 두루 섭렵했다. 인종조에 출사하여 지방관으로서 치수와 재정에 이름을 알렸다. 신종조에 동중서문하평장사 즉 재상이 되어 신법을 주도했다. 그러나 대지주, 상인, 보수파 등의 반대에 부딪혀 온전히 효과를 보지 못했다. 유학의 실용적 해석과 응용, 법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4. 사미원 史彌遠 _ 1164-1233 / 남송 / 효종조에 출사하였다. 영종조에 권신 한탁주가 주도한 개희북벌에 반대했다. 양황후의 총애를 얻고 한탁주를 살해하여 금과의 화의를 모색했다. 그 후 우승상에 봉해지고 영종 사후 이종을 옹립한 뒤 태사에 봉해졌다. 약 26년 간 권신으로서 안정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15. 서계 徐階 _ 1503-1583 / 명 / 가정제 때 출사하였다. 권신 엄숭이 그를 꺼렸으니 황제의 뜻에 맞추어 적절히 업무를 수행해 어찌하지 못했다. 결국 후에 내각대학사로서 권신 엄숭을 실각시켰다. 가정제, 융경제 치하에서 인심을 수습하고 선정을 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낙연에 대한 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