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의 입장에서 본 민주당 이념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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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에 민주당 내각 시절 중의원 의장이었던 요코미치 다카히로(横路孝弘, 1941-2023)는 자신의 정치 여정을 담은 <민주리버럴의 깃발 아래 民主リベラルの旗の下で>라는 책을 냈다.
55년 체제에서 사회당의 마지막 기수로서 그는 민주당으로의 전환의 일부를 맡았다.
이후로는 민주당 내 좌파 블록(신정국간담회)의 수장을 맡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민주주의에서 자유주의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나는 본다.
나는 몇 년 전부터 당권ㆍ대권 주자로 이인영 의원을 계속 지지해 왔다.
이 논쟁에서도 기본적으로는 이인영 의원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좀 더 쉬운 해법도 있다고 본다.
보수ㆍ중도ㆍ진보라는 삼분법으로 나누어 보면서 우리 정치의 현실적 지형(민주vs보수 양강 구도)ㆍ역사적 정체성을 둘러싼 환경 때문에 논쟁이 더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다.
차세대인 내 입장에선, 민주당의 정체성을 '민주리버럴'로 정의하고 싶다.
이는 이미 일본에서 90년대 말부터 사회당에서 민주당으로 비자민 제1당의 자리가 넘어가면서부터 나온 말이다.
독재와 국가주의ㆍ집단주의에 반대하고, 국가보다 국민이 주인이 되면서 동시에 전통이나 집단보다 개인과 인간존엄성을 우선한다는 이념적 의미를 지닌다.
보다 보편적으로는 사회자유주의(Social Liberalism)로 불리며, 서구 언론에서는 이미 이전부터 민주당을 북미적 맥락에서의 Liberal opposition 또는 Liberal president(문재인)ㆍgovernment로 불러왔다.
리버럴은 중도~진보를 아우르는 표현이며, 개인의 개성과 자유로운 선택을 중시하는 청년 세대의 대체적인 감수성에도 잘 맞는다.
또한 나아가서는 생활자로서의 개인을 empower하기 위한 사회적ㆍ경제적 조건을 보장하기 위한 보건ㆍ복지ㆍ교육 등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조하는 의미도 있다.
보수를 말하지 않더라도 경제혁신과 시장경제, 중소벤처기업ㆍ소상공인, 기업의 자유와 창의 등을 존중한다는 의미도 충분히 살릴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계속 민주당의 '균형외교'에 의구심을 보내던 서구 특히 미국에 대해 최소한 민주당 자체의 이념적 지표는 분명히 이러하다 라는 것을 못 박을 수 있다.
민주당이 자유주의를 자처하기 꺼려하는 이유는 아마도 진보적ㆍ사회주의적 순수성에 대한 규범적 압박과 자유라는 표현ㆍ개념을 주로 보수 정당이 즐겨 써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도 보수정당이 자유라는 말을 오래 써 왔으며(당장 자유민주당을 보라), 실은 한자로 自由主義와 가타카나로 쓴 リベラル을 각각 쓰면서 후자는 특히 진보 세력을 지칭할 때 많이 쓴다.
우리나라도 더 서구화되면서 민주당계 정당과 진보정당을 구분하게 되었고, 청년세대 중에는 민주당을 공격하는 의미에서 '리버럴 정당'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엄밀히 말해 우리나라와 일본의 민주당계 정당은 모두 온건보수부터 진보를 아우르는 빅 텐트 리버럴 정당이라 정의하는 것이 제일 정확하다. (최근 우리나라 더불어민주당은 반은 대중주의 정당이 되었지만.)
평균값을 따져보면 대강 자유주의 좌파 정도가 나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차세대의 입장에서 두 가지 이유로 '자유주의민주당'을 옹호하고 싶다.
첫째는 시대적 패러다임의 변화이다.
민주주의는 달성되었으니 민주당의 존재 이유를 새로이 정의할 필요가 있다.
사회문화적 진보는 개인의 자율과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신자유주의의 뉴노멀화로 인해 각자도생의 사회라는 양면으로 귀결되었다.
전자는 살리면서도 후자는 공존ㆍ포용ㆍ관용의 원리를 바탕으로 복지와 숙의를 비롯한 구조개혁을 통해 유기적 사회통합과 집단학습이 가능하도록 사회변동을 유발하는 촉매를 작동시켜 바꿔야 한다.
경기순환의 진폭을 완화하듯 사회안정화라는 개념이 단기 차원에서, 장기 차원에서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중요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병존에서 공존으로', '고립된 개인도 개인 없는 집단도 아닌 상호연결된 개인들의 네트워크'가 된다.
민주주의 다음의 시대적 패러다임으로서 내가 보는 자유주의는 이러하다.
둘째는 아시아적 자유주의이다.
서구는 아예 문화적으로 개인 중심으로 시작해 현재까지도 그들을 통합해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그러나 동양은 본래 공동체와 예의범절, 상호의존성과 조화 등을 강조하므로 이러한 문화적 토대 위에 자유주의가 원리로 자리잡으면 매우 성공적이리라고 본다.
개인의 이기심이 아니라 인간존엄성을 본위로 자유주의를 다시 본다면 아시아적 가치는 자유주의와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조화되는 것이다.
스스로 자제할 줄 아는 문화에 자유를 부여했을 때 비로소 방종ㆍ무질서가 아닌 자율ㆍ자치가 이루어진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 대만 등과도 가치ㆍ문제ㆍ정책 등을 더 활발하게 공유할 수 있을 것이고 동아시아 이니셔티브는 아시아ㆍ태평양으로 확대될 수 있다.
종국에는 이시바 총리의 아시아판 NATO나 하토야마 전 총리의 동아시아 공동체(동아시아판 EU)도 불가능한 구상이 아니게 될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일찍이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제창했는데, 팽창하는 신냉전 질서 속 강소국인 우리나라가 스스로 유덕한국으로서 중견국외교를 펼치고 동아시아 지역을 화약고에서 완충지대로 나아가 통합된 제3선진세계(유럽, 북미에 이은)로 전환해나가야 한다.
이상의 이유로 나는 차세대 비전으로서의 자유주의, 민주리버럴을 제안하고 싶다.
[경제란 무엇인가? 통일과 평화를 경제와 연관 지어 생각하다가 문득 여기까지 생각이 흘러왔다. 나는 사실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공존을 위해 사민주의를 검토하다가 이를 버린지도 10년이 지나가고 있다. 모순을 몰라서가 아니라 사회주의가 답이 아닌 것처럼 내친김에 실현 가능한 경제체제가 사민주의는 아닌 것 같아서다.
사민주의는 이미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타협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이동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10년 전 보았던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질서 자유주의) 체제나 흔히 북유럽 사회협약 모델에 대해 관심이 깊어지고 있다. 단지 복지국가, 복지사회 시스템의 문제로 국한되고 있는, 즉 정치사회적 이념으로서 사민주의가 아닌 사회경제적 이념으로서의 대안을 찾고 있는 것이다.
성장 분배 조화경제, 사회통합 동반성장, 인적자원사회투자, 선순환식 복지성장 등을 가능하게 할 사회통합적 시장경제는 이런 문제의식의 발로이다. 독일보다도 더 오른쪽일 수도 있지만 양극화가 심화되어 호전적 약육강식적 경제구조를 개혁할 수 있는 대안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따뜻한 시장경제의 연장선에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는 평등을 내걸었지만 소수가 특권을 향유하고, 대다수는 소외시키고 방치한 결과 멸망하고 말았다. 아주 많은 민주주의의 절차와 과정이 배제된 채 다수독재라는, 사실은 위임받지 않은 위임의 미명 하에 자행된 비판과 감시 기능의 부재가 초래한 결과였다.
나는 이런 생각들 때문에 그동안 민주주의로 일관했고 지금도 다시 민주주의로 돌아와 있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모든 걸 다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내 생활도 사람들의 요구도 좀 더 새로운 것을 다른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문득 자유주의가 생각의 눈에 들어와 박힌다. 솔직히 자유주의를 너무 멀리 놓아둔 것 같다. 확 안아 들이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었다. 뭔가 개인주의와 연결되고 자본주의 시장질서로 귀결되는 듯한 그 느낌이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하게 했다.
그러나 솔직히 내 자신의 모습도 이중적이다. 공동체를 매우 지향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생활의 절대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한다. 굉장히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우리 사회에 양산되었고 이들을 모두 공동체의 이상으로 한순간에 동원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들은 개개인의 자유가, 공동체의 자유가 억압받는다고 생각하면 다양한 행위로 저항할 것이다. 어떠한 독선적 권위도 용납하지 않는 사회적 디엔에이 같은 것이 내재하고 있다. 그게 사회적 정의로서, 정의로운 행동으로 지금의 촛불은 아닐까? _ <산티아고 일기-사람의 길> (이인영,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