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에 대한 딜레마와 정치
2. 중장기 기획 없는 거대양당의 재정포퓰리즘
최병천 교수의 말대로 통상 확장재정이 필요한 상황은 경제위기가 왔을 때와 경기순환상 하강기일 때인데, 현재 상황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해당하므로 재정을 좀 더 확대해야 한다는 말 자체는 옳다.
그러나 공공정책의 관점에서 볼 때, 지금 중요한 것은 단기 경기 안정화보다도 공공지출의 재원 및 중장기 재정 전략 마련, 전략적 지출 계획(어디에 어떻게 쓸 것이고 어떤 효과들과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는가 등), 필요한 구조개혁 등이다.
이미 작년 연말에 추경이 한 번 편성되었고 올해 말까지 GDP 대비 국채 비율은 48%까지 증가할 가능성이 상당하다.
한국은행의 4월 경제상황평가를 보면, 단기 현안 중 제일 중요한 것은 미국의 관세 압박과 경기 회복 기대 심리의 부진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일단은 국채 부담이 증가하는 한이 있더라도 추경으로 일시적으로라도 경제를 떠받치고 관세 문제부터 서둘러 해결해 수출과 국제수지에 물꼬를 트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다만 추경안의 구성은 소비와 고용을 진작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물가상승률이 1~2% 수준으로 낮은 상황인데 이는 국제유가 하락과 소비 심리 부진 등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소비 심리와 노동시장의 저활성화 문제 등을 자극할 수 있는 추경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장기적 기획과 방향성도 중요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2022년 대선 때 대한민국 ‘대전환’을 말했고, 이를 케인지안적 ‘국가 주도’로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국가 주도 ‘빅 푸시’는 전후 인프라의 낙후와 민간의 여력이 바닥인 상황에서 대외 차관 등을 바탕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대공황이나 전쟁 직후에 있지 않고 실물경제, 노동시장, 금융시장, 국제무역, 외환시장 등은 그때그때의 위기와 뉴노멀이 된 불확실성 하에 있기는 하더라도 복잡하고 볼륨이 높으며 민간이 주도하고 있다.
이렇듯 거대하고 복잡한 경제구조 속에서 재정정책의 파급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또한 순기능과 역기능이 함께 올 수도 있다.
더구나 재정 여력에도 한계가 있는 만큼 목적과 전략이 분명한 중장기적 시야를 고려한 재정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최병천 교수는 ‘확장재정정책을 남용하면 다음 세대에 전가되는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초고령화 속도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편에 속한다. 초고령화는 즉시 급진적 증세로 이어지고, 다음 세대에 부담이 너무 많이 가게 되어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오히려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분명히 핵심을 짚었다.
문재인 정부 때에도 핀셋 증세를 단행했지만, 결국 전면적인 증세 등을 수반하는 재정 구조 개편은 불가피하다.
그러지 않고 계속 국채를 동원하는 경우 결국 미래 세대는 필수적으로 긴축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
정확히는 긴축 중에서도 증세와 지출 감축이라는 최악의 결과가 불가피할 수 있는 것이다.
유럽은 이미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국가들이 상당한데, 이는 정치적 이유 등으로 현재의 손해를 무조건 회피하고자 한 결과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한 패착에 빠지지 않으려면 미리 대비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의 ‘대전환’ 기획은 본질적으로 중장기성을 띠지만 그에 수반되는 재정 전략과 구조개혁이라는 2개의 대단히 중요한 축이 제외되어 있다.
만일 어떠한 내용이든 수요-공급 양 측면에서의 대대적인 지출을 통한 빅 푸시와 더불어 그러한 2개의 축들까지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비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베노믹스의 ‘3개의 화살’은 우선 대대적으로 재정지출을 확대하고 증세 없이 국채를 증가시키면서 이를 중앙은행이 흡수토록 하면서 동시에 마이너스 내지 제로 금리라는 확장재정-확장통화를 총동원해 디플레이션을 탈출하고 구조개혁을 통해 중장기적으로 경제 자체를 안정적 성장 궤도로 올려놓음으로써 국채 등의 문제도 세수 증가 등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대기획이었다.
하지만 야당인 민주당계 정당은 이러한 구상이 너무 도박적이며 또한 그 재정지출이라는 것도 복지보다 산업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게다가 민주당계 정당은 이미 2009-2012 집권 때 아베노믹스와는 다른 방향으로 재정포퓰리즘 문제에 부딪혔었다.
민주당은 ‘국민 생활이 제일’을 외치며 대대적인 복지국가 확대와 소비세 인하를 매니페스토로 내걸었다.
문제는 민주당에게는 이재명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견고한 재정 전략이 없었다는 점이고 이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지출심사(Spending review), 영기준예산제도(Zero-based budget) 등을 활용했으나 그럼에도 결국 간 내각부터는 소비세 인상을 둘러싸고 내분이 시작되었다.
민주당 내 재정보수주의자들 중에는 공공사업(특히 토건사업)들을 축소하고 보건이나 복지 및 교육 등만을 중심으로 재정을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는 아직도 SOC 기반 경기부양을 지지하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태도와는 사뭇 다른 모습들이다.
실은 일본에서는 이미 고령화 등에 따른 복지-재정 수요 팽창에 대한 염려가 90년대부터도 있었고, 전후 최초의 비자민-비공산 내각의 총리였던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1994년 ‘국민복지세’ 구상을 상의 없이 언급했다가 짧은 임기를 마치고 사임하기도 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박근혜 정부 때 일본 민주당처럼 지출심사제도를 통해 ‘증세 없는 복지’를 실현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제도를 통해 확보한 재원은 수조 원에 그쳤다.
결국 증세와 사회보험료 부담 증가 등을 어느 시점에는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점점 가고 있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경기가 상시적으로 저조한 상황 속에서 국민 누구도 이것은 원하지 않고 심지어 정치인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런 언급을 하기를 꺼려 한다.
최근 몇 년 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은 격렬하게 맞부딪혔지만 정작 이번 대선 공약을 보면 아예 양당의 경선 예비후보들부터 너나할 것 없이 대대적인 AI 산업 진흥 지원 공약을 냈고 본선에서 이재명 후보는 대규모 예산 지출이 필요하고 김문수 후보는 상당한 조세지출이 필요한 공약들을 잔뜩 냈다.
그러고선 정작 재원 마련 방안에는 지출조정분, 향후 세수증가전망분 (민주당) 심지어는 추가적 재원 소요 없음 (국민의힘)이라고까지 말했다.
국민의힘도 차마 더 강경한 지출 축소 공약을 내지는 못한 것이고 거기에 윤석열 정부 때부터의 딜레마가 있었으나 반대로 이준석 후보는 더 깔끔한 (덜 내고 덜 받는다) 방향을 제시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민주당과 유사한 감성적 레토릭과 복지정책 위주의 정책 이니셔티브를 내세웠으나 과거 금융투자소득세제에 반대하고 상속세 등 다른 세제 관련해서도 감세 기조를 분명히 했는데 이렇게 되면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그도 재정 전략 부재의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국민에게 ‘쓴소리’도 ‘결단의 목소리’도 내지 못하면서 서로 치고받으면서 약점만 노리고 권력쟁탈전과 무의미한 싸움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정작 공약 및 정책의 질과 내적 정합성은 떨어지고 이는 이미 상당한 국민의 정치혐오를 더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으며 그러면 결국 극우 정당의 부상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