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nbow - Rainbow eyes

음악, 상념

by 남킹

https://youtu.be/dnF7VCrWktw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나의 이름과 전공, 기숙사 호실을 소개하고, <존 업다이크>를 좋아하는데, 우연히 <오픈 데이> 때 당신의 방에서 그의 소설을 발견하여 기뻤다는 것과 혹시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게 되면, 내게 알려주면 고맙겠다고 적었다.


나는 편지 겉봉에 연애편지가 절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영미 소설 애호가>라고 적었다. 그리고 편지를 여자 기숙사 관리실 한편에 있는 편지함에 그냥 넣어 두기만 하면 될 일이었지만, 나는 마치 외부에서 온 편지처럼 위장하기 위하여, 애써 우표를 붙이고, 교내 우체국 대신 근처 마을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다.


일주일 뒤, 나는 쪽지가 든 편지를 받았다. ‘죄송해요. <존 업다이크> 팬이 가까이에 있는 줄은 전혀 몰랐네요. 우선 한 권 반납했어요. 나머지도 곧 반납할게요. 좋은 시간 되시길.’ 그녀의 필체는 의외로 투박하고 내용은 건조하였다. 하지만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다.


나는 틈만 나면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다시 편지를 썼다. 자신은 책을 아주 천천히 읽는 사람이기에 조급하게 반납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과 혹시 원문이 있으면 빌려주실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주일 뒤 나는 낡은 영어책 한 권을 받았다. 펼쳐보니, 그녀의 책이 확실해 보였다. 곳곳에 투박한 글씨체의 한글 주석이 달려 있었다. 그 날 이후, 나는 틈만 나면, 그녀의 책과 한글 번역본을 펼쳐 놓고 한 줄씩 읽어 나갔다. 물론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록 가물에 콩 나듯이 답장을 받았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적어도 그해 겨울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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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아버지가 부도를 맞았다. 어렵다는 것은 익히 알았지만,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빚쟁이가 들이닥쳤고, 우리 가족은 도망치듯 지하 단칸방으로 몸만 옮겼다. 나는 가족과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을 실천했다. 휴학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2월. 눈발이 세차게 날리던 날,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대전 훈련소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나는 떠나기 전, 그녀에게 빌린 책을 돌려주며, 간단하게 군에 간다고만 적은 쪽지를 넣어 두었다. 그녀에게 쓸 말은 끝도 없이 많았지만, 가슴엔 절망만 넘쳐 흘렀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편지는 결국 한 글자도 써 내려 가지 못하고 가슴에만 오롯이 남겼다.


나는 신부님에게도 감사의 편지를 남겼다. 신부님 말씀 덕에 일요일이 무척 행복했다고 적었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백성사도 보았다. 나는 절망스러운 가난과 짝사랑의 고통을 토로하고, 곧 닥쳐올 군 생활의 암담함을 털어놓았다.


나는 지금도 그 시절이 불현듯 느껴진다.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모든 게 꼬여가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나 자신조차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했던 찰나와도 같은 날들 말이다. 하지만 결국, 지나고 나면 그 고통조차 그리움으로만 덩그러니 남았다.


https://youtu.be/a1xuNpcM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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