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연꽃

by 남킹


늦가을 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어느 해진 저녁, <니콜라스>는 느닷없이, 마치 카프카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부조리한 운명의 부름을 받았다. 군에 징집된 것이다. 그의 나이 갓 스물을 넘겼고, 결혼한 지 채 몇 달도 되지 않은, 삶의 모든 것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던 때였다. 그는 대대로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었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자신이 태어난 작은 마을, 그 소우주(microcosm)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었으며, 글자를 읽거나 쓸 줄도 몰랐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드넓은 하늘과 발밑의 땅, 사랑하는 아내와 집에서 키우는 몇 마리 가축, 그리고 옥수수와 밀 농사뿐이었다.

그 해는 유난히 가뭄이 심했다. 사실, 해가 갈수록 강수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농작물은 타들어 가고, 가축들이 마실 물조차 부족했으며, 심지어 사람들이 마실 우물마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연히 척박한 농촌을 등지고 도시로 떠나는 주민들이 늘어났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에서 대규모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면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외지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마을의 젊은이들 대부분이 농사를 포기하고 그곳 광산으로 떠났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묵묵히 고향 땅에 남아 메마른 밭을 갈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감 속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그는 어느 날 밤,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아내에게 불쑥 이런 말을 하였다.

“여보, 아무래도 머지않아 저놈의 다이아몬드 때문에 큰 전쟁이 날 것 같소. 그러면 나도 군대에 끌려가게 될 게야….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아주 아주 멀고 외딴곳으로 가게 될 거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조용한 곳으로 말이야….”

그의 아내는 남편의 말을 그저 헛된 꿈 이야기려니 하고 귀담아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결혼 초부터 종종 아내에게 자신이 꾼 기이한 꿈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대부분 아득한 과거의 일이나 알 수 없는 먼 미래에 관한 것들이었다. 자신의 신상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그저 남들보다 상상력이 조금 풍부한 사람일 뿐이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말대로 다이아몬드 광산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인접한 두 부족 간의 격렬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전쟁이 터진 것이다.

니콜라스는 보병으로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갔다. 다이아몬드 광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힐마리아> 언덕에는 이미 여러 개의 진지가 구축되어 있었고, 각 진지는 미로처럼 복잡한 참호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무거운 군수 물자를 참호 속으로 나르는 고된 일을 맡았다. 전투는 상상 이상으로 치열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포탄이 비 오듯 쏟아졌고, 쉴 새 없이 총격전이 벌어졌다. 매일 수많은 젊은 군인들이 이름 모를 언덕 위에서 죽어 나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좀처럼 전세는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팽팽한 대치 상태가 한 달 넘게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참호 속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동료들에게 니콜라스가 또다시 꿈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이상하네… 내일이면 저 시끄럽던 적들이 갑자기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것 같은데… 하지만 그게 더 무서운 일이지… 뭔가 더 큰 재앙이 다가올 것만 같아….”

이 말을 전해 들은 동료들은 하나같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미친놈 취급을 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매일 밤 그들은 사방에서 기습적으로 공격해오는 적들과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적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니콜라스의 예언은 놀랍게도 정확히 들어맞았다. 밤새 아무런 교전도 없었고, 아침이 되자 언덕 주변에 개미처럼 들끓던 수많은 적들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평범한 농사꾼 니콜라스의 예언 능력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사건이었다.

그는 적들이 더 이상 승산 없는 소모적인 포위 격멸이나 거점 점령 방식의 작전을 포기하고, 병력을 분산시켜 예측 불가능한 게릴라전으로 전술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꿈을 통해 미리 알아챈 것이었다. 이 놀라운 이야기는 곧바로 최전선을 지휘하던 대대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대대장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니콜라스를 일단 자신의 막사로 불러 곁에 두고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이후 니콜라스는 여러 차례 작전 회의에 불려가 자신이 꾼 꿈과 거기서 비롯된 예언을 말했고, 그의 예언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현실로 드러났다. 덕분에 그의 부대는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고 차츰차츰 승기를 잡아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마지막 예언대로, 적들은 먼저 휴전을 제안해 왔다.

이 기쁘고도 놀라운 소식은 삽시간에 나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전쟁 영웅의 탄생이 아니라, 바로 평범한 농부 니콜라스의 신비로운 예언 능력이었다. 그는 군이 하사하는 최고 훈장과 평생 먹고 살 걱정 없는 좋은 보직 제안까지 모두 정중히 거절하고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예언 능력을 듣고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매일 구름처럼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니콜라스와 그의 가족은 결국 평생 살아온 정든 고향을 등지고 야반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와 그의 가족에 관한 소식은 세상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누군가, 운명의 이끌림처럼, <가우타 로터스>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만남은 가우타가 북쪽 문명의 땅, <과학의 도시>에 있는 명문 대학의 컴퓨터 공학부에 합격하여 고향을 떠나기 직전에 이루어졌다. 낯선 소녀가 그를 찾아왔다. 그녀의 이름은 <나탈리아>였다.

“하지만… 제가 당신 아버님이 찾으시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시나요?” 가우타의 순수한 호기심은 이내 떨떠름한 회의감으로 바뀌었다. 그의 앞에 선 소녀는 비록 남루한 차림이었지만, 그 눈빛만은 비범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탈리아는 잠시 머뭇거리며 주저하는 듯하다가, 이내 가우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 역시 아직 완전한 확신을 하지는 못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번 겪으셨던 그 생생한 환영들이 정말 미래의 모습을 본 것인지, 아니면 단지 오랜 전쟁과 가난으로 인한 정신 이상에서 비롯된 망상이었는지… 사실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들 대다수는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엉뚱하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것들이었죠?” 가우타는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남극의 두꺼운 얼음 밑에 온갖 종류의 음식이 가득한 거대한 냉장고가 숨겨져 있다거나, 뜨거운 사막 모래 밑에 집채만 한 낙타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무시무시한 지렁이가 살고 있다는 둥… 그런 이야기들이었죠.”

“사막의 지렁이라….” 가우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건 아마 고대 SF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일 겁니다. 아버님께서 책을 무척 좋아하셨나 보군요.”

“아닙니다. 제 아버지는 글자를 전혀 모르십니다. 평생 농사만 지으셨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대신 아버지께서 들려주시는 환영 이야기를 받아 적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저의 평범하고 밋밋한 시골 생활을 기록하던 제 일기장에, 아버지의 신기한 구술 내용이 마치 양념처럼 조금씩 첨가되었던 셈입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냥 재미 삼아서 적었습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늘 흥미롭고 신기했거든요. 그것이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언이라고 확신하게 되셨나요?”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보셨던 그 환영들이 어쩌면 정말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무슨 계기가 있었나요?”

“네, 몇 년 전, 북쪽 문명의 땅, 경제의 도시에 하늘 높이 솟아 있던 300층짜리 쌍둥이 빌딩이 끔찍한 테러 공격으로 무너져 내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죠. 그런데 TV 화면 속에서 불타며 무너져 내리는 그 빌딩의 모습이 저에게는 이상하게도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마치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먼지 쌓인 옛날 일기장들을 급히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가 아주 어렸을 때 기록해 두었던 놀라운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품속에서 낡고 두꺼운 공책 한 권을 꺼내더니, 미리 표시해 둔 페이지를 펼쳐 떨리는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욕망으로 가득 찬 거대한 도시에, 오만하게 하늘을 찌르던 두 개의 거대한 쌍둥이 탑이 화염에 휩싸여 무너져 내렸다. 탑이 무너지자 오만과 반목의 기운이 검은 연기처럼 온 세상으로 널리 퍼져나갔고, 마침내 피할 수 없는 대전쟁의 끔찍한 전조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전에 없던 깊은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게 되었다. 증오가 낳은 참혹함의 단면을 세상 모두가 공포에 질려 지켜보았다.’”

“저는 그때부터 아버지의 모든 말씀을 예사롭게 듣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하신 모든 말씀을 따로 공책에 옮겨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기록들이 마침내 일곱 권 분량의 두꺼운 책이 되었습니다.” 나탈리아는 자신의 낡은 가죽 가방에서 손때 묻은 자필 공책 일곱 권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가우타 앞에 내놓았다. 공책들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 귀한 기록들을 저에게 보여주시는 겁니까?” 가우타의 시선은 줄곧 낡은 공책들에 고정된 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네? 아버지의 유언이라고요? 그분께서… 저를 아셨다는 말씀이신가요?” 가우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닙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이름조차 모르셨습니다. 단지,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 손을 잡고 간절히 부탁하셨습니다. 꼭 자신이 본 것들을 기록한 이 공책들을, ‘물의 꽃’에서 태어난, 세상을 구원할 운명을 지닌 그에게 전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다시 한번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 아버님이 찾으시던 그 사람이 정말 제가 맞다고 확신하시나요?” 가우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탈리아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직도 완전한 확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분이라고 믿습니다.” 나탈리아의 목소리에는 이제 흔들림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확신하게 만들었죠?”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며칠 전, 마지막 힘을 내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는 다시 공책의 중간 부분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저 멀리, 검은 땅 끝자락에 자리한 하얀 마을에… 세상을 구원할, 옅은 날개를 지닌 이가 <물의 꽃>에서 탄생한단다. 공교롭게도 그 아이는 네가 태어난 바로 그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났다고 하는구나. 그 아이를 꼭 찾아서 내가 본 모든 것을 기록한 이 이야기들을 들려주기를 바란다. 그 아이만이 이 암흑과 같은 지옥에서 우리 모두를 구원할 수 있단다.’”

“‘아버지, 그 넓은 세상에서 제가 그 아이를 어떻게 찾을 수 있단 말인가요?’” 그녀는 당시 아버지에게 던졌던 질문을 되뇌었다.

“‘나도 모르겠구나, 나의 사랑하는 딸 나탈리아.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아이는 지독한 책벌레이며, 나비를 무척이나 사랑한단다.’”

“‘검은 땅 끝’이 어디일까요?” 그녀는 읽기를 멈추고, 간절한 눈빛으로 가우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아마도 이곳, 환락과 바다의 도시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가우타는 천천히 답했다. “화산 폭발로 생성된 이 땅은 온통 검고 거친 화산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하얀 마을’은요?”

“바로 이곳,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마을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쇠락했지만, 한때는 이곳에서 채취한 순백의 진주가 온 세상으로 팔려나가며 ‘하얀 진주 마을’로 불렸다고 합니다. 값싼 인공 진주가 개발되고 원양 어업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날개가 없습니다.” 가우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는 당신을 이곳 마을 유일한 공공 도서관에서 한 달 동안 매일 지켜봤습니다.” 나탈리아는 말을 이었다. “당신의 하루 일과는 거의 똑같더군요. 힘든 부두 노동이 끝나면 늘 이곳 도서관에 와서 해가 질 때까지 책을 읽었고, 떠날 때는 꼭 세 권의 두꺼운 책을 빌려 가셨습니다. 처음에는 무작위로 책을 집어 들고 맨 뒷장에 붙어 있는 도서 대출 카드를 조사했습니다. 놀랍게도, 거의 모든 책의 대출 카드에는 빠짐없이 당신의 이름과 사인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비를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더군요. 사인 옆에는 항상 작은 나비 그림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한 마리, 어떤 날은 두 마리, 혹은 세 마리씩… 마치 <옅은 날개>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아, 그건…” 가우타는 약간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제가 책을 너무 좋아해서… 한 권당 딱 세 번씩만 반복해서 읽기 위하여 표시해 둔 것뿐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습니다.” 나탈리아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당신은 언제 태어나셨나요?”

“1033년 12월 4일, 새벽입니다.” 가우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나탈리아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낡은 여권을 꺼내 가우타에게 보여주었다. 여권에 적힌 그녀의 생년월일은 가우타와 정확히 일치했다.

“당신이… 정말 당신이었군요.” 가우타는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가우타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제 이름은 로터스입니다. <가우타 로터스>. 아시다시피 로터스(Lotus)는 <물의 꽃>, 즉 연꽃을 의미합니다.”

“마침내… 아버지… 마침내 찾았습니다….” 나탈리아는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가우타를 와락 끌어안았다. 감격과 안도의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지난 3년 동안,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기 위해, ‘검은 땅 끝’이라고 알려진 세상의 모든 외진 곳을 찾아 헤매고 다녔다. 예언가 니콜라스는 눈을 감기 직전, 사랑하는 딸의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속삭였다.

“나의 사랑하는 딸아, 너는 이제 그의 그림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네가 미천한 아비의 말을 기록으로 남겼듯이, 이제부터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해야 한다. 너는 훗날 물의 꽃에서 깨달음을 얻어 세상을 구원할, 세상 모든 이들의 자애로운 어머니와 함께, 이 고통받는 땅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 사명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너에게 주어진 숙명이란다.”

가우타 로터스가 과학의 도시로 유학을 떠난 그해 가을, 나탈리아는 동쪽 신의 땅, <지식의 도시>로 떠났다. 가우타는 그녀가 낯선 도시의 삶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파더스 가문의 숨겨진 후손답게, 로터스 집안은 환락의 땅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서로의 생각과 예언에 대한 해석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로 아버지 니콜라스의 예언에 관한 의견 교환이 주를 이루었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병들어 가는 천년 왕국의 현실과 부패한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직관과 비판을 서술하기도 했다. 이 편지의 왕래는, 훗날 가우타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기 전까지 수십 년 동안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후일, 그들이 주고받은 방대한 양의 편지들은 <나탈리아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무려 30권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었다. 이 편지들은 릴리안 나리의 역작 <천년 왕국의 기록>과 함께, 파더스의 난으로 점철된 <대전쟁> 시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사서로 평가받게 되었다.

지식의 도시에 정착한 지 2년 뒤, 나탈리아는 그곳의 명문 대학인 <철학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녀의 전공은 기호학과 언어 철학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다. 예언가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예언을 기록으로 남긴 그녀가 짊어져야 할 숙명은 바로, 그 누구도 완벽하게 해독하지 못한 아버지의 예언서를 완전하게 해석하고, 그 안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아버지 니콜라스는 생전에 늘 딸에게 이렇게 중얼거리곤 하였다.

“나탈리아야, 도대체 내가 꿈속에서 뭘 본 것인지… 당최 나 자신도 알 수가 없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것들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온, 글자조차 모르는 가난한 농부의 눈에 비친 미래의 모습은 온통 혼란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상징과 이미지들로 가득했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표현은 지극히 모호하고 불분명했으며, 때로는 심하게 왜곡되기까지 하였다. 나탈리아와 가우타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아버지의 예언서를 분석하고 그 정보를 공유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이 해석한 예언의 내용과 실제로 세상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고 검증할 수 있는 경우가 점점 늘어난다는 사실이었다. 그 결과, 그들의 예언 해석 능력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정확하고 정교해졌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니콜라스의 예언서 중 한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바다 깊은 곳에 사는 거대한 고래가 어느 날 육지에 나타나 끔찍한 재앙을 예언했지. 온 세상이 크게 흔들리고 검은 파도가 산처럼 몰려와 집과 자동차, 배들을 종잇장처럼 땅 위로 밀고 갔지…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어… 진짜 재앙은 따로 있었지… 하나, 둘, 셋… 땅이 크게 울리고 세 번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평화롭던 도시가 아무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도시로 변해버렸지… 열한 번째 해가 되는 해에는 또 다른 죽음의 도시가 다시 생겨날 거야… 그리고 그 죽음의 그림자는 점점 더 커져갈 거야… 작은 도시에서 시작하여 온 나라로 퍼져나가겠지… 마침내 세상 모든 것을 삼켜버릴 큰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해서….’

그들은 1055년 3월 11일, 남쪽 환락의 땅 <배들의 도시>에서 발생한 대지진과 그로 인한 끔찍한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를 목격하면서, 이 예언이 정확히 현실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열한 번째 해’를 추론하기 시작했다. 1055년으로부터 11년 뒤, 즉 1066년. 그때 또 다른 죽음의 도시가 생겨날 것이고, 그 죽음은 나라 전체로 퍼져나가 마침내 ‘큰 전쟁’의 도화선이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 그들은 다가올 재앙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했다.

나는 이야기를 잠시 멈추었다. 아난다 원장의 깊은 눈동자에 맺힌 투명한 눈물 방울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엄숙하고 한 치의 빈틈도 내비치지 않는 숙연한 구도자의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뺨을 타고 조용히 흐르는 한 줄기 물에서 깊은 연민과 슬픔을 느꼈다.

“원장님께서는… 혹시 나탈리아를 이미 알고 계시는군요? 아니면… 가우타 로터스를 알고 계십니까? 알 수 없는 숙연한 인연.”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은 이제 그녀의 단아한 목선과 어깨, 그리고 살포시 무릎 위에 포갠 흰 손등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나의 질문이 혹시 무례하지는 않았는지 염려스러웠으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서 더 이상 답을 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우타 로터스 님입니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를… 저를 죽음의 심연 속에서 건져내어 새로운 삶을 허락해주신 분이십니다. 평생 가슴에 품고 늘 그리는 은인.”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마치 첼로의 현처럼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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