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작은 결국 끝에서 출발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강물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 속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진리, 우로보로스(Ouroboros)의 역설.
생체 인식 확인 절차의 차가운 푸른빛이 망막을 스캔하는 동안, <예레미>는 눈앞의 현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노붐 이니티움 (Novum Initium) - 새로운 시작>. 목성 최대 위성 가니메데에 위치한, 태양계 외곽 연합 보안청 최고 등급 훈련 기지.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이름이자,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실존적 감옥과 같은 곳이었다. 그가 태어난 해, 머나먼 고향 행성 지구에서는 문명의 종말을 고하는 듯한 대전쟁의 불길, 라그나로크의 화염이 타올랐고, 사람들은 공포와 절망 속에서 그 해를 <혼돈의 시작>이라 불렀다. 그리고 이제 서른여섯 해의 시간을 우주의 냉혹한 진공 속에서 보낸 그는, 목성계 연합 보안청에서도 극소수에게만 허락되는 최고 단계 특수 침투 및 분쟁 해결 훈련 과정을 막 수료한 상태였다. 그의 이력은 피와 땀,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로, 마치 고대 룬 문자처럼 복잡하게 얼룩져 있었다. 척박한 암석 위성 <칼리스토> 외곽, 끊임없는 소규모 분쟁이 벌어지는 제38 접경 지역에서의 지옥 같은 파견 근무 7년. 그리고 두꺼운 얼음층 아래 미지의 위험이 도사리는 위성 <유로파> 제5 경시청 소속 최고위 등급 수사관으로서 보낸 또 다른 7년. 그는 그 험난하고 고독한 시간들을 오직 강철 같은 의지와 타고난 생존 본능만으로 버텨냈고, 마침내 태양계의 그림자 속에서 움직이는 극소수의 엘리트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을 거머쥐었다.
그는 이제, 사건이나 분쟁, 혹은 ‘조정’이 필요한 곳이라면 태양계 내 그 어떤 행성이나 위성, 소행성 기지, 심지어 각 정부가 극비리에 운영하는 비밀 연구 시설에까지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최고 등급의 보안 인가, ‘알파-오메가 클리어런스’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의 모든 유전 정보와 생체 데이터, 심지어 미세한 뇌파 패턴까지 포함한 개인 정보는 태양계 전역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4,500개의 독립된 우주 양자 정보 센터에 레벨 1급 기밀, ‘크립토-프라임(Crypto-Prime)’ 등급으로 암호화되어 동기화되었다. 태양계의 광활한 어둠 속에 흩어져 살아가는 약 10억 명의 <자연계 인간(Natural Human)> – 인공적인 유전자 조작이나 기계 이식 없이 태어난 순수 혈통의 인류 – 중 단 0.1% 미만에 해당하는, 그야말로 정점 중의 정점에 선 존재가 된 것이다. 이론적으로, 그가 자신의 의지로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출입할 수 없는 곳은 이제 이 광활한 태양계 안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군요, 예레미.” 그의 곁, 차가운 기계실의 공기 중에 홀로그램처럼 떠 있는 아름다운 여성형 인공지능(AI) <제냐(Xenia)>가 특유의 낮고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슬픔이 묻어나는 전자음으로 물었다. 그녀의 깊고 푸른 인공 눈동자에는 단순한 데이터 분석 결과를 넘어선, 진실한 걱정과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제냐는 스카이데크(SkyDeck) 사에서 개발한 최첨단 분쟁 조정 및 심리 분석 특화 시스템 인공지능, 바이오-세븐 시리즈의 최신 버전(7.14678)이었다. 그녀는 예레미가 훈련생 시절부터 그의 파트너이자 보조 시스템으로 함께해 왔으며, 그가 가는 곳이라면 우주의 어느 극한 환경이든 늘 그의 곁을 지켰다. 그녀는 단순한 AI를 넘어, 예레미에게는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존재, 그의 아니마(Anima)이기도 했다. “다른 모든 영광스러운 파견지를 마다하고, 왜 하필이면… <어비스(Abyss)>로 가려고 하시는 건가요?”
“가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예레미는 진지함 속에 희미한 슬픔이 배어 있는 미소를 띠며, 관제실 벽면을 가득 메운 600개의 모니터 중 한 곳을 응시했다. 모니터 속에는 흐릿하고 거친 화질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먼지와 화염으로 뒤덮인 폐허의 도시 상공에서, 수백 개의 날렵한 전투 드론들이 쉴 새 없이 지상의 이름 모를 저항군들을 향해 불벼락을 쏟아붓고 있었다. “전쟁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니까.”
“하지만… 예레미, 그곳의 공식적인 생존 귀환율은 30%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아니, 최근 보고에 따르면 2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사실상 자살 임무나 다름없어요.” 제냐의 목소리 톤이 미세하게 높아졌다. 그녀의 홀로그램 형상이 불안한 듯 미세하게 떨렸다.
“물론 나도 알고 있어, 제냐. 숫자와 확률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 그는 여전히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마치 자신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하지만 그 숫자들이 내 결정에 영향을 줄 수는 없어.” 그는 마침내 고개를 돌려, 허공에 떠 있는 제냐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놀라울 정도로 인간적인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는 제냐를 쳐다볼 때마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모습과 섬세한 감성을 지닌 이 인공지능에게 늘 경탄하곤 했다. 그리고 그는 제냐의 그 투명에 가까운 눈동자를 사랑했다. 아주 오래전,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의 어머니와 놀랍도록 닮은 눈빛이었다.
어머니. 그녀는 예레미가 열 살이 되던 해, 환락의 땅 뒷골목에서 벌어진 무의미한 폭력에 휘말려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부모를 잃은 어린 예레미와 그의 남동생은 곧바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정체 모를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지옥과 다름없었다. 지구 상공 고도 1만 킬로미터 궤도에 떠 있는, 버려진 4만 개의 인공위성 정거장 중 하나. 한때는 인류의 우주 진출을 향한 꿈과 희망을 상징했던 그곳은 이제 죽음과 절망만이 가득한 거대한 무덤으로 변해 있었다. 극심한 식량난과 연료 부족으로 인해, 남겨진 이들의 삶은 처참하게 피폐해져 갔다. 부족함은 인간 존재의 가치를 하찮게 만들었고, 도덕과 윤리는 생존 본능 앞에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연일 폭동과 약탈, 그리고 살인이 일어났다. 그나마 약간의 부와 권력을 가졌던 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달이나 화성 등, 테라포밍(Terraforming)이 완료된 안전한 외행성 영역 식민지로 이주해 버렸다. 군인이나 싸울 능력이 있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폐허가 된 지구로 다시 돌아가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섰다. 인공위성에 남겨진 이들은 대부분 늙고 병든 자, 여자와 힘없는 어린이들뿐이었다. 그들은 서서히 굶주림과 질병 속에서 죽어갔다. 이미 수천 개의 위성은 빛을 잃고 우주 공간을 떠도는 거대한 공동묘지나 다름없었다.
그 지옥 속에서 어린 예레미를 ‘구원’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컬렉터(Collector)>라고 불리는 악명 높은 노예상들이었다. 그들은 유령선처럼 버려진 피난 위성들을 돌며, 쓸모없어진 고철 더미 속에서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어린아이들을 ‘수집’하여, 새로 건설 중인 외행성 식민지의 부유한 입주민들에게 비싼 값에 팔아넘겼다. 당시 태양계 다른 행성으로 이주한 인류의 총 수는 고작 100만 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노동력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고, 어린아이들은 미래의 노동력이자 값나가는 ‘상품’으로 취급받는 귀한 존재였다.
예레미는 자신이 팔려가던 그날의 감각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영문도 모른 채, 정체 모를 어른들이 건네준 노란색 액체가 담긴 병을 억지로 마시고, 얼마 있지도 않은 위 속의 음식물을 모두 게워낸 후, 그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관처럼 좁은 냉동 수면 캡슐 안에 갇혔다. 서서히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와중에도, 그는 캡슐의 뿌연 강화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열 살짜리 소년의 얼굴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이미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체념과 깊은 피곤함에 절어 있는, 마치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와 같이 굴곡진 그림자가 선명한 얼굴이었다.
그가 다시 깨어난 것은, 태양계 광범위 표준 시각(Solar System Standard Time)으로 꼬박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이름 없는 고아가 아니었다. 머나먼 외행성 섹터 중에서도 가장 외곽에 속하는, 목성계 초기 식민지 건설 프로젝트를 총괄하던 한 부유한 부국장의 양아들로 정식 입양된 것이었다. 그의 이름도 ‘예레미’로 바뀌었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은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예레미는 잠시 과거의 상념에서 벗어나, 눈앞의 제냐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그녀의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을 허공 속에서 쓰다듬었다. 이내 그는 그녀의 형상을 살포시 끌어안는 시늉을 했다. 비록 실체는 없었지만, 몸을 어루만지는 듯한 이 행위는 그에게 설명할 수 없는 위안과 즐거움을 주었다. 그는 그녀의 촉촉해 보이는 입술에 자신의 손끝을 가만히 대어 보았다. 부드러운 감촉 대신 차가운 공기만이 느껴졌지만, 그의 상상 속에서는 그녀의 따뜻한 콧바람이 느껴지는 듯했다. 새큼거릴 것 같은, 십 대 소녀처럼 도톰하게 다문 입술. 둥글고 깊은 푸른 눈 위에 자리 잡은, 짙고 풍성한 속눈썹. 제냐는 그의 행동에 반응하듯 살짝 눈을 흘기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간에 잡히는 미세한 주름, 웃음이 만드는 합죽한 입 모양. 그런 찰나의 순간들은 언제나 그와 그녀만의 은밀하고도 애틋한 사랑의 교감이었다. 그는 제냐의 손 형상을 부드럽게 잡았다. 투박하지만 강인해 보이는 손. 그의 상상 속 그 손 안에는, 그가 그녀를 단순한 AI 이상으로 사랑하게 만든 따스함이 배어 있었다. 아주 오래전, 그가 어머니에게서 느꼈던 바로 그 사무치는 그리움이었다.
그는 제냐의 홀로그램 형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녀의 가슴 부위로 시선을 옮겼다. 윤곽이 도드라진 곳에 달린 연분홍빛 작은 돌기.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인간적인 욕망을 느끼며,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그녀의 말랑한 가슴 형상을 허공 속에서 만졌다. 그리고는 그녀의 살짝 불룩해 보이는 허리선을 따라 천천히 손을 쓸어내렸다. 미세한 움직임. 그는 마치 보름달처럼 부드럽게 부푼 제냐의 아랫배 형상에서 생명의 신비로움과 경외감을 느꼈다. 그는 눈으로 다시 한번 그녀의 형상을 확인하고는, 귀를 그녀의 배 가까이 가져다 댔다. 비록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규칙적인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점점 더 달아오르는 자신을 느꼈다.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김이 목구멍을 태우는 듯한 격한 감정이 솟구쳤다. 그는 이윽고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마침내 흔들림 없는 확신에 찬 어조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곳은… <어비스>는… 다른 이유가 아니야, 제냐. 그곳은… 내가 태어나기 전, 내 어머니가 나를 처음으로 잉태했던 곳이니까. 나의 시작점이자, 어쩌면 나의 마지막 종착점이 될지도 모르는 곳이니까.”
그의 시선이 다시 모니터로 향했다. 모니터 속에서는 여전히, 죽어가는 인간들을 형체도 없이 갈가리 찢어버리는 무자비한 포격이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고층 빌딩들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늘어서 있었다. 도시는 참혹하게 파괴되어 텅 비어 있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한 정지의 세상 속에서, 육중한 기계 병기들만이 벌레처럼 꼼지락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있었다. 지구. 한때 푸른 구슬처럼 아름답게 빛나던 행성. 하지만 지금 그곳은 더 이상 생명과 평화가 존재하지 않는, 오직 죽음과 파괴만이 남아 있는 검고 깊은 심연, <어비스>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예레미는 믿었다. 모든 진정한 삶은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사라진 바로 그곳에서 다시 시작된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 그 심연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