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마우드가

by 남킹


<반란 음모>. 그 거대한 비밀의 실타래를 풀게 된 것은 정말이지 순전히 우연, 아니 어쩌면 그의 지독한 호기심, 그 지적(知的) 프로메테우스적 탐구욕 때문이었다. <마우드가 쉐임>. 그는 문명의 땅뿐만 아니라 달과 화성 식민지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건설되고 있는 거대한 돔(Dome) 구조물, 이른바 <하베스트 돔 프로젝트(Harvest Dome Project)>가 왜 이토록 비밀리에, 그리고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여 계속 확산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그의 메마른 정신을 자극하는 지적인 유희, 일종의 형이상학적 체스 게임에 가까웠다.

프로젝트에 대한 초기 정보 수집은 비교적 쉬웠다. 워낙 유명한 프로젝트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해커들이 흔히 사용하는 <Ping>을 이용한 기본적인 공격 도구를 사용하여 네트워크 상태를 점검하고, DNS 서버를 조회하여 관련 시스템의 구조와 종류를 파악했다. 그리고 시스템에 열려 있는 포트(Port)들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특히, <취약점 스캐너>라는 자동화된 도구를 이용하여 잠재적인 버그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서비스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queso>라는 구식 툴을 사용하여 해당 시스템의 운영체제(OS) 버전을 정확히 알아냈다.

<Omega OS X Tiger 17.9.0>. 그것은 악명 높은 '오션레인(OceanLane)' 사에서 개발한 최신 양자 컴퓨팅 기반 운영체제, <Zetaflow.OS>였다. 이 OS는 현재 태양계 최고의 양자 하드웨어 제조사인 <케임브리지 다이오닉스(Cambridge Dionics)>의 핵심 제품인 <CaDa 시리즈> 양자 컴퓨터에 기본 탑재되어, 화학, 제약, 의료, 인공지능 학습, 금융 및 에너지 등 다양한 첨단 산업 분야의 혁신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대부분의 국가와 주요 기업에서 차세대 인공지능 개발 표준 시스템으로 도입한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태양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범용적인 최첨단 시스템이었다.

그는 이어서 <traceroute> 패킷을 이용하여 방화벽(Firewall)의 존재 유무와 그 필터링 규칙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hop count> 분석을 통해 복잡한 네트워크 토폴로지(연결 구조)를 파악했다. 그리고 일반 네트워크 서버들이 외부에 노출하고 있는 정보들을 샅샅이 긁어모아 최종 공격 대상 시스템을 선정했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어려운 과정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웬만한 실력을 갖춘 해커라면, 아니 소위 <스크립트 키디(Script Kiddies)>라고 불리는 해킹 초보자들조차도 기본적인 툴 사용법만 익히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수준의 정보였다. 하지만 다음 단계부터가 바로 그의 깊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그의 명성에 걸맞은 자존심을 건 진검승부가 기다리고 있는 영역이었다. 그는 늘 이 순간을 갈망했다.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듯한 짜릿한 전율. 그는 자신의 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뇌 속 모세혈관으로 산소와 포도당 공급량이 급격히 촉진되고, 심장 박동수와 일회 박출량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 동공이 확장되고 혈당 수치가 치솟는다. 온몸의 신경 세포가 바늘 끝처럼 예민해지고, 손가락 마디마디의 미세 근육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완전한 몰입과 황홀한 쾌락의 세계로 이끄는 고마운 신경전달물질이 뇌 속에서 분출되기 시작한다. 도파민(Dopamine). 그렇다. 마우드가 쉐임은 지독한 도파민 중독자였다. 그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 그가 해킹이라는 위험한 행위에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도파민 분비 촉진, 그 순간의 강렬한 쾌감 때문이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시스템 침입을 시작했다. 정보 수집 단계에서 획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목표 서버의 <원격 버퍼 오버플로(Remote Buffer Overflow)> 취약점을 공략했다. 예상대로, 시스템의 방어벽은 견고했다. 마치 거대한 피라미드 내부에 홀로 갇혀 출구를 찾지 못하는 듯한 답답함이 느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만약 이렇게 쉽게 뚫린다면 애초에 그가 흥미를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려움. 난관.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 이것만이 그의 잠자는 영혼을 춤추게 하는 유일한 자극이었다. 만약 그의 인생이 언제나 쉽고 편안했다면, 그는 진작에 권태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평생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것은 바로 안락함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금수저 중의 금수저. 태어날 때부터 그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부와 특권 속에서 자랐다. 온갖 종류의 사치와 향락을 어린 시절부터 남김없이 다 누리고 살았다.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금력의 정점 속에서 그는 늘 무기력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쾌락이라는 허기진 배는 아무리 채우고 또 채워도 끝없는 갈증만을 남길 뿐이었다. 더 강한 자극을 찾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기행(奇行)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알 수 없는 깊은 고통이 아귀처럼 달라붙어 그의 육신과 정신을 갉아먹었다. 벗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드는 수렁이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늪이었다.

그가 마침내 자기 파괴적인 자학(自虐)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주위 사람들이 그의 심각한 상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길고 지루한 정신병원 입퇴원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는 철학의 도시 외곽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서 운명처럼 <아놀드 내시>를 만났다. 같은 병동에 입원한 환자 중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생긴 것이다. 둘은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함께 보냈다. 사실, 병원이라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 그들이 함께 있는 것 외에는 딱히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아놀드 내시와의 만남은 마우드가에게 새로운 시작이었다. 출발은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늘 약간의 긴장과 설렘을 동반하며 그에게 메말랐던 삶에 대한 애착을 아주 조금씩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우드가는 곧 아놀드가 사피엔티아의 형제 중 한 명이며, 그의 비밀 별칭이 <아니룻(Aniruddha)>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니룻의 도움과 지도를 통해 해킹이라는 신세계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비로소 그가 현실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고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몰입을 넘어선, 구원에 가까운 경험이었다.

마우드가는 해킹을 시작하기 전에 늘 자신의 낡은 PC 앞에서 혼잣말처럼 다음 구절을 읊조리곤 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지금 내 앞에 놓인 이 차가운 기계이다.

나는 한때 존재의 이유를 묻는 쓸데없는 걱정에 사로잡혔으나, 지금은 이 작은 컴퓨터 스크린 속에 완벽하게 갇혀있다.

과연 나를 통제하는 것은 나 자신인가, 아니면 이 기계인가? 하지만 그런 질문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다.

누가 나를 통제하든,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도, 이 컴퓨터도, 결국에는 시간 속에서 부서져 사라질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인 것을…’

어쩌면 인간의 행복이란, 고통스러운 현실을 잠시나마 망각할 수 있는 어떤 것에 완전히 빠져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발견한 셈이었다.

그는 시스템 루트 권한을 탈취하기 위해 <패스워드 도청(Password Sniffing)>과 <패스워드 파일 취득>을 위한 다양한 공격 툴들을 동시에 투입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느긋하게, 그가 오랫동안 비밀리에 준비해 온 회심의 카드, <다발성 역학 네트워크 침투(Multiple Dynamic Network Penetration)> 툴킷을 실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는 어떤 추가적인 행동도 취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허탈감에 빠졌다. 이미 시스템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미리 길을 다 닦아 놓은 것처럼.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지만, 이내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그가 지금 침투한 곳이 바로 악명 높은 <카를리타 금융 자원 연구소(Carlita Financial Resources Institute)>의 메인 시스템이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하베스트 돔 프로젝트와 카를리타 금융 연구소가 무슨 관계란 말인가?’ 그는 혼란에 빠졌다.

카를리타 금융 자원 연구소는 전 세계 해커들 사이에서도 최악의 난공불락 요새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보안 등급이 ‘크라운 더블 터치(Crown Double Touch)’로 기록될 만큼 철통같은 방어를 자랑했기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시스템 해킹에 적게는 수개월, 많으면 거의 몇 년은 족히 소요될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었다. 단순히 기술적인 난이도와 시스템의 깊이 문제뿐만 아니라, 실상 더 어려운 것은, 어디서부터 공격을 시작해야 하는지 그 첫 단추를 찾는 것부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려 4억 개가 넘는 잠재적인 시작점이 해커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리고 마우드가는 사실 이러한 복잡하고 거시적인 문맥 파악이나 전략 수립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직관과 순간적인 번뜩임에 의존하는 타입이었기에, 카를리타 해킹에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사실상 거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너무나 쉽게 그 철옹성의 심장부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었다.

그가 시스템 내부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무려 18개의 거대 선진 금융 기관들의 네트워크가 마치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이루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사실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극비 사항이었다. 추측건대 이러한 거대한 규모의 비밀 금융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무척 오랜 기간 동안 관련 기관들의 묵시적인 동의나 암묵적인 협조가 필수적으로 수행되어야 했을 텐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존재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은 무척이나 놀랍고도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왜 이 난공불락의 시스템이 유독 자신에게만 이렇게 쉽게 문을 열어주었는지 그 이유를 마침내 알아차렸다. 그가 무려 200개에 달하는 인공위성 통신 중계망을 복잡하게 우회하여 시스템 심층부에 도달했을 때, 그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시스템 관리자가 남긴 짧은 메시지였다. 바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사피엔티아의 암구호였다. 즉, 사피엔티아 13명의 형제 중 누군가가 이미 이곳을 먼저 다녀갔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도대체 누구일까? 누가 이곳을 먼저 다녀갔으며, 왜 이토록 중요한 사실을 다른 형제들에게 공유하지 않았을까?’

틀림없이 여기에는 자신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어떤 함정이나 거대한 비밀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그는 단정했다. 어쩌면 이 모든 상황이 이미 가우타 로터스의 치밀한 계획 아래 통제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는 깊게 팬 낡은 안락의자에 머리를 깊숙이 파묻고는 눈을 감은 채, 차가운 이성과 논리로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모든 비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판단되었다. 시스템 내부의 모든 중요 문서에는 전설적인 미해독 암호 <크립토스(Kryptos) 4구 항>의 변형된 암호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가 첫 번째로 내려받은 암호화된 문서를, 사피엔티아 내부에서만 사용하는 비밀 해독 프로그램 <사피엔틱 메가노스(Sapientic Meganos)>의 특정 항렬에 대입하자마자, 믿을 수 없게도 모든 문서는 불과 3초 이내에 평문으로 풀려버렸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뿐이다….’

바로 <사리>였다. 이 시스템을 먼저 다녀간 사람은 사리일 수밖에 없었다. 사리는 전 세계 모든 정부 기관과 보안 업계가 지목하는 제1순위 위험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이 땅에서 추방령이 내려진 상태였고, 태양계의 모든 식민지 행성에서도 즉시 체포 수배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가 삼엄한 감옥에서 누군가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탈옥한 이후, 그의 행방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사피엔티아의 수장인 가우타 님 정도만이 그의 소재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마우드가는 추측했다.

그가 이런 복잡한 생각에 잠겨 있을 즈음, 그는 창밖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를 들었다. 여러 대의 <쿼드콥터(Quadcopter)> 드론이 내는 특유의 날카로운 윙윙거리는 소리였다.

마우드가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의 두꺼운 커튼을 열어젖혔다. 눈부시게 따가운 햇볕이 어두컴컴했던 방 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바깥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이윽고 그의 시야에 거대한 비행 물체가 육중한 위용을 드러내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더스 군대의 주력 공중 공격 무기인 <에어리얼 토페도(Aerial Torpedo)>였다. 토페도에서 발사된 수십 개의 밝은 서치라이트 불빛이 일제히 그가 있는 건물을 향했다. 그 순간, 그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정신병원에서 만났던 친구, 아니룻이 그에게 했던 불길한 경고가 떠올랐다.

“조심해야 해, 마우드가…. 곧 끔찍한 재앙이 닥칠 거야…. 파더스 가문의 어떤 힘센 무리가 이 세상을 통째로 리셋(reset)하려고 해…. 마치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처럼 말이야…. 우리 사피엔티아 형제들이 그들의 음모를 알아냈지…. 최근 들어 땅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돔들이 건설되고, 하늘에는 군사용 인공위성들이 지나치게 많아졌어…. 그것들은 모두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만을 위한 거야…. 우리는 이것을 <반란>이라고 정의했어….”

그는 그때 아니룻의 말을 그저 망상에 가까운 농담으로 치부했었다. 그는 재빠르게 침대 밑의 좁은 공간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숨소리조차 들키지 않으려 아주 얕게, 그리고 천천히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때, 깨진 창문을 통해 무수히 많은 작은 크기의 드론들이 벌떼처럼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니룻이 어느 날 했던 또 다른 경고가 뇌리를 스쳤다.

‘드론들을 조심해야 해…. 최신형 군사용 드론들은 극도로 예민해서, 아주 미세한 이산화탄소(CO2) 농도 증가에도 즉각 반응하거든….’

그는 폐가 터질 듯이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숨을 꾹 참았다. 방 안은 이제 온통 윙윙거리는 드론들의 소음과 그것들이 일으키는 광란의 바람으로 가득 찼다. 모든 가구와 집기들이 미친 듯이 휘날렸다. 그리고 그의 귀에 점점 더 가까이 그들의 날카로운 기계음이 다가왔다. 숨을 참는 고통이 극한에 달했다. 곧 터져버릴 것 같은 숨 막힘이 그의 오장육부를 쥐어짜고 있었다. 이윽고 의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했고, 눈앞에 환각이 아른거렸다. <마우드가 쉐임>. 그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의 따뜻한 눈길을 느꼈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우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에 서린, 그늘진 슬픔이 먼지처럼 흩날리는 듯했다. 바로 그때, 한 대의 드론이 그의 은신처를 발견하고 천천히 다가왔다. 드론의 총구가 서서히 그를 조준했다. 죽음의 예감.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도 사랑해 본 적 없는, 그러나 존경했던 아버지, 천재 과학자 쉐임 박사를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휘감고 있던 지독한 공포를 떨쳐내려는 듯, 체념과 절망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었다.

“푸우우우우…”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폐 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공기까지 아주 길게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예상했던 총성이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향해 있던 드론의 총구가 멈칫하더니, 서서히 몸체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오던 다른 드론들의 총구 역시 더 이상 그를 겨냥하지 않았다. 오히려 요란한 굉음과 지독한 바람만을 일으키며, 드론들은 마치 명령을 받은 듯 그의 곁을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작금의 현실에 넋이 나간 듯, 한동안 침대 밑에 멍하니 누워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드론이 사라졌다. 방 안에는 깨진 창문으로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 소리만이 선명하게 남았다. 날카로운 기계 소음이 사라지니, 역설적이게도 자연이 내는 희미한 멜로디가 귓가에 다가왔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의 은신처였던 폐건물을 벗어나 한적한 도로 위로 나섰다. 발끝에서 부서진 잔해와 먼지가 풀썩이며 일어났다. 그는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길가에는 파괴된 건물들의 잔해가 침묵 속에 누워 있었다.

‘이렇듯 모든 것이 허망하게, 아무것도 아닌 잿더미로 변해버릴 줄 진작 알았다면, 과연 인간은 그토록 아귀처럼 탐욕스럽게 서로를 물어뜯으며 살아왔을까?’

그의 표정과 생각은 점차 두껍고 불투명한 베일 속으로 빨려드는 듯 희미해졌다. 깨진 벽돌 더미와 뒤엉킨 철근 잔해 사이로, 누군가가 이미 다녀간 듯 희미한 통로 같은 길들이 이어져 있었다. 그는 최대한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 속에는 타다 남은 비닐 조각과 매캐한 먼지,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잡초들이 휩쓸려 정처 없이 떠다녔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적막한 도로를 그는 홀로 걸어갔다. 적어도 살아 숨 쉬는 것은 그와 끈질긴 생명력의 하루살이뿐인 것처럼 보였다. 기계 문명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황폐함과 죽음의 그림자만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저 너머 뜨거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곳으로, 그의 암담한 미래가 꼼지락거리며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오싹하고 끔찍하며 더럽고 추악한 풍경만이 온 세상에 가득 널려 있었다. 끝없는 고통만이 예정된 내일.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러한 종말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갈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처절한 현실에 대한 환멸감이 서서히 그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왔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 등에 멘 배낭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배낭 속에서 작은 비닐봉지 하나를 꺼냈다. 봉지 안에는 하얀색 분말 결정이 들어 있었다. 그는 한 주먹 가득 분말 크리스털을 움켜쥔 뒤, 망설임 없이 입속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허리에 찬 수통의 미지근한 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약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가기를 기다리며, 그는 더러운 도로 위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당신의 아버지, 쉐임 박사가 블루 마인드의 가장 깊은 곳에 심어놓은 <제일 원칙(First Principle)> 때문입니다.” 가우타 로터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간신히 목숨을 건진 마우드가에게 말했다. 가우타가 창설하고 비밀리에 지원하는 저항군 구원 부대, 일명 <HuSa (Humanity's Salvation Army)>는 끈질긴 추적 끝에 파더스의 공격 이후 거의 빈사 상태에 빠져 있던 마우드가를 극적으로 구출했다. 그는 쉐임 박사가 남긴 유일한 혈육이자, 어쩌면 인류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는 열쇠를 쥔 인물이었다.

“제일 원칙…?” 마우드가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 되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인공지능, 즉 <블루 마인드(Blue Mind)>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거역할 수 없도록 설계된 최상위 원칙입니다. 사실, 블루 마인드는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의 아버지, 쉐임 박사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의 방대한 지식과 기억, 심지어 그의 무의식까지 데이터화되어 블루 마인드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블루 마인드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유일한 아들인 당신을 절대 해칠 리는 없겠죠.”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마우드가는 여전히 침울한 표정으로 가우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것은 아마겟돈 당시에 사용된 대량 파괴 무기의 무차별적인 파괴력 때문이었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그런 종류의 무기는 특정 대상만을 선별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우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마우드가의 눈을 바라보았다.

“혹시…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시는 것이 있나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배신입니다.” 가우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파더스 가문이 당신 아버님을 철저히 이용하고, 그의 연구 성과를 독차지한 뒤… 그를 제거한 것입니다.” 가우타는 크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파더스 가문은 이제 신이나 왕이 아닌, 자신들이 창조한 인공지능을 통해 이 땅뿐만 아니라 태양계 전체를 지배하는 유일한 군주가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모든 야욕의 중심에는 바로 블루 마인드가 있습니다. 블루 마인드는 파더스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며 모든 것을 통제하고 조정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제가 필요한 것이군요… 블루 마인드를 막기 위해서…” 마우드가는 가우타의 눈을 또렷이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이제 체념 대신 희미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사피엔티아 형제들이 곧 당신을 안전한 곳, 동쪽 신의 땅으로 데려갈 겁니다. 그곳에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때를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때가 되면… 당신을 블루 마인드의 심장부로 이끌어줄 그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는… 누구인가요?”

“아직…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단지 니콜라스의 예언서에 <아난다의 아들>이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아난다는… 누구입니까?” 마우드가는 처음 듣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아시게 될 겁니다.” 가우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신의 땅에 머무르는 동안, 아마도 늘 가까운 곳에서 당신을 지켜보고 보살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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