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안 나리와의 짧지만 의미 깊었던 만남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정처 없는 길, 오디세우스의 여정과도 같은 길 위에 섰다. 아쉬움과 새로운 정보에 대한 희미한 기대감이 뒤섞여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내 앞에 놓인 것은 여전히 구불구불 이어지는 한적한 오솔길이었다. 길 위로는 눈부시게 파란 하늘과 솜털처럼 흩어진 구름, 속삭이는 바람과 푸른 숲의 그림자가 고요하게 채워져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정처 없이 흘러가는 매 순간순간에, 가슴 시리도록 사무치는 나의 그리움을 가만히 아로새기는 일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또한 그것을 고통스럽지만 외면할 수 없는 내밀한 즐거움으로 변환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하곤 했다.
세상의 시간은 마치 서로 아귀다툼이라도 하듯, 끊임없이 서로를 재촉하고, 상처 내고 할퀴며, 그러다 문득 그 모든 소음과 광기에 대한 깊은 자괴심으로 변죽을 울리다가,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뚝 하고 멈춰버린 듯한 깊은 적막 속으로 가라앉는다. 바로 그 적막의 순간, 잊었던 기억의 향기가 예고 없이 진동하며 나를 에워싸는 공간. 그 고통스럽지만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운 피난의 순간이, 훅 하고 밀려드는 바람결 속에, 눈물처럼 오롯이 담겨 있는 듯하기도 하다. 내 머릿속, 지워지지 않는 끌림이 언제나 향하는 곳. 그곳은 남쪽 환락의 땅, 퇴폐와 욕망이 들끓는 도시의 한복판에 자리한 낡고 허름한 호텔, <아무르드간(Amurdgan)>. 그곳에서 나는 기적처럼 아내를 다시 만났었다. 아내가, 나를 찾아왔었다.
귓가에 앵앵거리는 모기 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 동이 트기 전, 희미한 여명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고 있었다. 옆자리에는 나탈리아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고른 숨소리가 방 안의 유일한 소리였다. 9월의 새벽 햇살은, 옅은 겨자색의 싸구려 천으로 만들어져 나풀거리는 반투명 커튼을 투과하며 방 안에 상쾌하면서도 어딘가 서글픈 빛을 뿌리고 있었다. 덩달아 열린 창문 틈으로 스며든, 수수한 성품의 바람은 창틀을 타고 넘어와 내 귓전에서 마치 비밀스러운 속삭임처럼 머물다 사라졌다. 밤새 피워댄 담배 연기로 나른하게 풀려 있던 감정의 틈새 속으로, 불현듯 파리 한 마리가 다시 앵- 하고 신경질적으로 날아올랐다. 방 한구석 탁자 위에는 어젯밤의 흔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올이 나간 채 버려진 스타킹과 먹다 남은 음식물 쓰레기 위에서, 파리 떼의 요란한 성찬식이 분주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잘 훈련된 군대처럼 스크럼을 짜듯 맹렬하게 뭉쳤다가 순식간에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어느새 방 안은 자욱한 담배 연기와 음식 썩는 냄새로 가득 찼다. 나탈리아가 잠결에 뒤척이며, 미간에 가느다란 주름을 새긴 채 돌아누웠다. 나는 모처럼 만에 찾아온, 이 불안하지만 달콤한 평온의 순간을 되도록 오랫동안 가슴속에 간직하기 위하여, 숨소리조차 죽이며 살포시 아내의 곁을 빠져나왔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진, 성긴 줄무늬의 낡은 셔츠를 주섬주섬 챙겨 입고, 삐걱거리는 문을 조용히 열었다. 그리고 빛바랜 붉은 카펫이 깔린, 좁고 어두운 복도로 나섰다.
어두침침한 복도 양쪽 끝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창문이 나 있었지만, 그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미미한 자연광을 제외하고, 익숙하면서도 늘 불안감을 자아내는 어둡고 모호한 통로는, 천장에 마치 병든 눈처럼 규칙적으로 알알이 박혀 있는 백열전구에서 힘겹게 삐져나오는 흐릿한 붉은빛으로 인해 음흉하고 퇴폐적인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그 붉은빛은 마치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 도저히 이성으로 주체할 수 없는 죄스러운 쾌락에 대한 은밀한 기대치를 교묘하게 감추어 두려는 듯하기도 했다. 음습한 이끼 향과 퀴퀴한 먼지 냄새가 뒤섞여 풍기는 복도 끝, 좁고 덜컹거리는 낡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는 다시 지상의 세계, 냉혹한 현실 속으로 돌아왔다.
호텔 밖, 느릅나무가 규칙적으로 심어진 거리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나는 언제나처럼, 마치 순례자처럼 편의점으로 향했다. 자동문이 열리자 딸랑거리는 작은 종소리와 함께, 선반을 바쁘게 정리하던 젊은 여직원이 나를 보더니,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희미한 미소와 함께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난 며칠간 매일 아침이면 이곳에 들러 담배 몇 갑과 간단한 통조림, 딱딱한 빵 따위를 사곤 했다. 나탈리아는 극도의 피로와 긴장 때문인지, 오전에는 거의 잠에서 깨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깨어날 때까지 하릴없이 이 도시의 거리를 배회하며 몇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나는 엉성하게 심어진 나무들 사이로 난, 구부정하고 울퉁불퉁한 돌길을 지나 넓지만 황량한 마름모꼴 광장으로 나왔다. 광장 중앙에는 한때는 화려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녹슬고 부서진 채 버려진 듯한 정체 모를 조형물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이곳은 도시의 중심부에서 약간 벗어난,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온갖 종류의 잡다한 소리들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바람에 실려 흩날리는 먼지와 쓰레기 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사람들의 희미한 대화 소리, 터벅거리는 발걸음 소리,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자그마한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저 멀리서 간헐적으로 울리는 자동차 경적 소리. 이 모든 소리들은 마치 비밀스러운 암호처럼 속삭이듯, 하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뚜렷하게 각자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소리들을 모두 합쳐보면, 이곳이 번화한 도시 속에서도 유독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변방 지역이라는 것을 누구나 쉽게 예상해 볼 수 있을 터였다.
나는 광장 한쪽 구석, 잎이 무성한 떡갈나무 그늘 아래 낡은 벤치에 주저앉아, 한동안 넋을 놓고 탁한 잿빛 바다를 쳐다보았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멀리서 천둥의 희미한 울림이 들려왔다. 눈앞에 펼쳐진, 투명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탁한 잿빛 물결이 방파제에 부딪히며 찰싹거리는 둔탁한 파도 소리가 귓전을 맴도는 듯했다.
아내는 곧 떠날 것이다. 언제나처럼, 우리의 만남은 찰나처럼 짧고, 이별은 영겁처럼 길었다. 그리고 이 잔인한 운명은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었다. 나는 또다시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이 소중한 존재를, 아무런 두려움 없이 온전히 감싸 안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겨운 일인가를 지금 이 순간 절절하게 느끼고 아파하고 있었다. 코끝으로 비릿하고 짠 바다 냄새가 끼쳐 들어왔다. 숭숭 소리를 내며 차가운 바람이 성긴 옷 속으로 파고들어와, 살포시 몸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바다 위에 깨알같이 흩어져 떠 있는 낡은 배들을 멍하니 훑어보며, 그 배들이 한데 뒤엉켜 묶여 있는 지저분한 항구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 항구 뒤편으로, 마치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하늘을 향해 제멋대로 솟아난 빌딩들의 숲.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흉측하게 엮어 만든 도시는, 태양이 비추는 대낮에도 그 속에 감춰진 혼란과 무질서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그 모든 추악함과 절망을 짙은 어둠이 잠시 감싸 안을 뿐이었다. 반목과 폭력, 혼란과 갈등, 죽음과 절망이 검은 장막 뒤에서 은밀하게 꿈틀거렸다. 그러면 밤의 어둠을 지배하는, 대단히 거칠고 위험한 녀석들이 하나둘씩 그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아내는 바로 그들을 만나러 이곳, 환락의 도시에 온 것이었다.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임무였지만, 파더스의 압제에 맞서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거대한 폭력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또 다른 폭력, 즉 싸움에 능하고 어둠의 세계에 정통한 집단들의 힘이 필요했다. 환락의 도시를 실질적으로 양분하고 있는 두 개의 거대 마피아 조직. 나탈리아는 그들을 설득하여 저항 전선에 합류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이미 파더스 가문의 군대와 그들이 조종하는 기계 병력들이 대부분의 주요 지역을 점령한 상태였지만, 그들 역시 인간 저항 세력의 끈질긴 게릴라 활동에 상당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돈과 이권에만 눈이 먼 마피아들을, 이 땅을 지키기 위한 순수한 대의명분만으로 설득하여 끌어들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대가, 즉 ‘당근’이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막대한 ‘돈’에 대한 정보였다. 가우타 로터스와 사피엔티아의 천재 해커들은 파더스 가문과 연계된 비밀 금융 기관들의 시스템을 해킹하여 빼돌린 자금의 일부를 마피아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협력을 얻어낼 수 있었다.
지하 저항 세력의 규합이 어느 정도 마무리될 무렵, 가우타는 그동안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하고 위험 속에서 임무를 수행해 온 나탈리아에게 특별히 7일간의 짧은 휴가를 부여했다. 그녀가 나를 만나러 온 것이다. 사방에 파더스의 염탐꾼들과 정보원들이 거미줄처럼 깔려 있는,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녀를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절박했다.
그날, 휴가가 끝나고 그녀가 다시 떠나야 했던 마지막 날. 나는 후들거리는 두 발을 힘겹게 땅에 디딘 채, 호텔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과 맞닿아 있는 희뿌연 산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산 정상에서부터 가파른 사면을 따라, 잿빛의 서늘한 구름 융단이 마치 거대한 뱀처럼 음울하게 휘어져 계곡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 수로에는 여전히 흙탕물이 넘실거렸고, 무거운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으며, 차가운 바람이 얇은 창문을 세차게 때리고 있었다.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생계를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는 장사꾼들의 더러운 배들 사이에, 어제 그녀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아슬하게 피어 있는 한 송이 연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연꽃 너머로, 이제는 떠나가야 할 나의 여인을 보았다. 아내는 떠날 채비를 마친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곳에 서 있었다.
창밖은 여전히 시끄럽고 혼란스러웠지만, 우리 둘만 있는 방 안은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나는 차마 아내의 젖은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환락의 도시는 잠들지 않는 이들의 천국이자 지옥처럼, 사방에 끊임없이 소음을 흩뿌려대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창문의 두꺼운 커튼을 닫았다. 방 안이 다시 어둑하고 그리운 조명 속으로 잠겼다. 그녀의 야윈 얼굴, 깊게 패인 눈 밑의 그늘.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세찬 파도처럼 나를 덮쳐와 흔들었다. 나는 아내의 차가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투박하고 거칠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나를 미치도록 사랑하게 만들었던 따스함이 남아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파고들어, 그녀의 마른 가슴에 나의 얼굴을 밀착하고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녀의 가냘픈 숨소리를 들었다.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이었던 창문이 커튼에 가려 붉게, 푸르게, 그리고 마침내 투명하게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그리움을 어루만지고 또 어루만졌다. 시간과 공간이 마치 멈춰버린 듯, 모든 것이 흐느적거리며 녹아내리는 듯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나를 감쌌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삶의 환희. 그러나 동시에 찾아오는 예리한 슬픔. 잠시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 느긋하면서도 치명적인 혼란과 같은 느낌이었다. 얄팍한 환상 속을 부유하던 덧없는 감정들이 두서없이 솟아나 가슴을 채웠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뇌까리던 절망스러운 그리움이, 마침내 눈물이 되어 바다처럼 넘실거렸다.
나는 이 여자가 미치도록 좋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내가 온전히 즐겁고, 그로 인해 나의 삶이 풍요로워지며, 그로 인해 내가 언젠가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는 너무나 솔직하고 때로는 무심하며, 늘 존재론적인 외로움의 징후를 안고 있는 듯한 형태로, 내 마음을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내 시선을 강력하게 고정시킬 만한 강렬함조차 없이, 그녀의 모든 행위는 어딘가 수동적이고 시선은 결코 나와 마주치지 않은 채 늘 멍하니 허공의 어딘가를 바라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녀의 품에 안겨 위안을 찾았다.
태양은 어김없이 떠올랐고, 이제 그녀는 떠나야 했다. 굳게 닫힌 커튼의 모든 틈새를 비집고, 나의 피곤한 몸뚱이를 갉아대는 듯한 강렬한 햇살이 무자비하게 파고들어 왔다. 눈꺼풀을 물들이는 붉고 뜨거운 빛. 현실과 상념은 모호하게 뒤섞이고, 남겨진 감각은 낯설고 시리기만 하였다. 나는 눈을 감은 듯 뜬 듯, 그녀를 보는 듯 보지 않는 듯하며, 어쩌면 그날, 비 오는 수로 위에서 처음 아내의 슬픈 모습을 보게 되었던 바로 그 시점의 그녀를,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그 순간의 그녀를 영원히 그리워하게 될 운명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