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고요했던 신의 땅의 새벽 공기를 찢으며 어디선가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단발성이 아니었다. 길고 불길하게, 마치 종말의 전주곡,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처럼 울렸다. 게다가 잠시 후, 또 다른 종류의, 더 낮고 육중한 경고음들이 사방에서 더해지며 귀청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그리고 곧이어 지축을 뒤흔드는 엄청난 굉음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흐리고 낮은 잿빛 하늘 위로, 삽시간에 밤하늘의 별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검은 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더스 군대의 침공용 드론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잘 훈련된 살인 벌떼처럼, 완벽한 마름모꼴 대형을 이루어 질서 정연하게 지상 가까이 하강하더니, 이내 여러 형태의 작은 무리들로 나뉘어 번개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곧, 수도원 아랫마을 곳곳에서 섬광과 함께 귀를 먹먹하게 하는 폭발음이 연이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붉은 화염 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고, 검은 연기가 버섯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신성 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신의 땅에 대한 파더스의 야만적인 침략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본능적으로 수도원 뒤편의 울창한 숲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발목까지 빠지는 축축한 낙엽과 뒤엉킨 나무뿌리를 헤치며 미친 듯이 달렸다. 폐 속으로 차갑고 축축한 새벽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숲 속은 아직 땅거미가 완전히 걷히지 않아 어둑했고, 비까지 오락가락 내리고 있었다. 입술 사이로 굴러 들어오는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빗물을 허겁지겁 삼키며, 흐릿한 시야에 들어오는 어둠 속으로 필사적으로 발을 내디뎠다. 얼마를 달렸을까, 마침내 키 작은 관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작은 공터에 이르렀다.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아, 그대로 지친 몸을 축축한 땅 위로 던졌다. 심장이 터질 듯 격렬하게 뛰었고, 온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누워 있었는지 모른다.
주변에서 들려오던 폭발음과 총성이 잦아들고, 다시 숲 속의 고요한 자연의 소리가 귓가에 돌아왔을 때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조심스럽게 숲을 빠져나왔다. 세상은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폭격으로 인해 모든 전력 공급이 끊긴 듯,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채 한참을 헤맨 끝에, 나는 간신히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보이는 길 위에 올라섰다. 길은 예상외로 넓었지만, 여전히 나 혼자뿐이었다.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의 도시. 길가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찌그러지고 불에 탄 차들이 을씨년스럽게 널브러져 화염의 잔재를 내뿜고 있었다. 반듯하게 포장되었던 세상의 표면 위에는, 이제 용도를 알 수 없는 흉물스러운 파괴의 흔적들과 잔해들이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었다. 불에 그을린 검은 자국들이 마치 문명 최후의 벽화처럼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깊은 외로움과 극심한 혼란스러움, 그리고 허기짐이 뒤섞여, 내딛는 걸음걸음을 천근만근 무겁게 짓눌렀다.
꼬박 하루를 도시 외곽의 폐허 속에서 숨어 지낸 나는, 다음 날 새벽, 지나치게 길고 어두운 지하 터널을 간신히 빠져나와, 이제는 거의 본능처럼 느껴지는 생존 감각이 이끄는 곳을 향해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매캐하고 검은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와 잿가루를 흩날렸다. 그리고 마침내 해 질 녘이 되어서야, 나는 릴리안 나리가 알려준 <철학의 도시> 경계에 간신히 닿을 수 있었다. 도시의 모습은 내가 이미 거쳐온 다른 파괴된 도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름다웠던 과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이, 흉물스럽게 변해 있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망가졌고, 부서졌으며,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곳에 남아 있던 얼마 안 되는 주민들은 이미 모두 뿔뿔이 흩어지거나 폐허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린 뒤였다. 이것은 단순한 이해의 차원을 넘어선, 경악스러운 현실이었다. 감히 파더스 가문이 신의 땅까지 공격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끔찍한 미래가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직도 매캐한 연기가 걷히지 않은 잿빛 장막에 덮인 세상. 날씨는 어제와 달리 후텁지근하게 더워지기 시작했다. 도시의 섬뜩한 적막은,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파더스 순찰 드론의 그르렁거리는 기계음과, 폐허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작은 새들의 애처로운 지저귐으로 인해 더욱 깊어졌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무거운 바람이 좁은 골목 사이를 망령처럼 누비고 다녔다. 도로는 간밤에 내린 비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잿빛 가랑비가 다시 얼굴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스멀거리며 주위를 맴돌았다. 코끝을 찌르는 역한 화학 약품 냄새를 감지한, 폐허 속의 작은 짐승들이 황급히 어둠 속으로 숨었다. 발밑으로는 미세하지만 끊임없는 진동이 땅속 깊은 곳으로부터 스며 올라왔다.
인간은 본래 걷기 위해 태어났다. 그리고 생존하기 위해 태어났다. 단 한 모금의 깨끗한 물과 한 줌의 단백질을 찾기 위해, 나의 지친 두뇌와 천근만근 무거운 두 다리는 필사적으로 상호작용을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내 앞에 끝없이 펼쳐진 폐허 속에서 살아있는 작은 움직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위를 살폈다. 이런 극한의 생존 환경 속에서는 아주 작은 방심조차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긴장은 내 존재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늘 그렇듯, 버려지고 파괴된 건물의 잔해가 나뒹구는 길모퉁이가 나타났다. 내가 거쳐온 수많은 도시에, 이제 성한 것이라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온전한 건물이 남아 있었다면, 우리는 감히 3년 전에 시작된 이 참극을 인류의 마지막 전쟁이 될지도 모르는 <대전쟁>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전쟁이 천년 왕조의 필연적인 마지막 몰락이라고 말했고, 또 어떤 이들은 단지 역사의 거대한 선순환 과정의 끝일 뿐이므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 명칭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이 땅의 인간들은 너무나 많이 사라졌고, 그나마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조차 매일 빠르게 죽어가고 있었다. 이제 이 도시의 남은 인간들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얕은 숨을 쉬며, 간신히 심장을 뛰게 할 만큼의 부족한 영양분만을 섭취하며 연명해야 할 것이다. 그 외의 시간은 그저 폐허 깊숙한 곳에 웅크린 채,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할 터였다.
땅속에서 간신히 고개를 내민 어린 새싹이나, 파괴된 건물 잔해 틈에서 어렵게 피어난 이름 모를 야생화에서조차 역겨운 화약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다시 연한 갈색의 산성비가 더욱 굵게 내리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뜨거웠던 어제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저 숨을 쉬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에만 매달려 있었다. 나는 늘 아내 나탈리아를 생각했다. 그녀의 미소,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온기. 하지만 이렇게 처참하게 파괴된 도시의 모습을 볼 때마다, 희망 대신 깊은 절망이 검은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나는 지나치게 큰 욕심을 부렸던 것일까? 처음부터 가지지 말았어야 할 것을 갈망했던 것일까? 이 파괴와 죽음의 시대에 사랑이라니! 대체 무슨 어리석은 생각으로 그런 감정에 빠져들었던 걸까?
무너져 내린 담벼락과,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채 검게 타버린 나무들이 뒤엉켜 있는 구석진 공간에 몸을 숨기고,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오염 물질로 포화 상태가 된 공기는 이제 따가운 빗물이 되어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다. 나는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을 다해 다시 시내 중심가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시내 중심가로 다가갈수록, 마치 태풍의 눈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더욱 거세고 사나운 강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여위고 마른 생물들은 물론이고, 웬만한 잔해들까지 날려버릴 정도의 격한 바람이었다. 바람은 사방에서 날카롭게 할퀴듯 대들다가, 지친 낙엽과 헤진 비닐 조각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기어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 매캐한 먼지 속으로 내던지듯 휘몰아치며 성난 소리를 내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이곳이 이제는 그 어떤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은 완전한 폐허의 도시라는 사실을 더욱 처절하게 각인시켜 줄 정도로 선명하고 황량했다. 나는 비쩍 마른 손으로 눈을 가리고 바람에 맞서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발밑에서는 뻥뻥 구멍이 뚫린 채 앙상하게 남은 잡초들이 마지막 숨을 껄떡거리는 듯 신음했다.
나는 거의 반나절을 굶주림과 갈증 속에서 헤맨 끝에, 무너진 상점 진열대 아래에서 간신히 딱딱하게 굳은 육포 조각 몇 개와 곰팡이가 슬기 시작한 빵 봉지 하나를 발견했다. 행운이었다. 빵 봉지를 열어 그나마 덜 상한 부분을 골라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이빨이 부러질 것처럼 딱딱하고 맛없는 빵이었지만, 나는 꾹꾹 씹으며 단물이 나올 때까지 침으로 녹여가며 최대한 오랫동안 삼키지 않고 입속에서 굴렸다. 절대로 몇 번 대충 씹고 꿀떡 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린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 보잘것없는 한 조각의 빵으로 또다시 며칠을 견뎌야만 할 수도 있었다. 앞으로 또 언제 우연히 이런 단백질 덩어리가 내게 떨어질지, 그 확률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최대한 적게 먹고, 최대한 오랫동안 입속에서 그 맛과 질감을 음미해야만 했다. 그것이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얼마나 큰 위안과 힘을 주는지… 그것을 처절하게 느끼고 감사해야만 했다. 부족함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하지만 부족하다고 해서 모든 만족감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작은 것에서도 감격을 동반한 격한 만족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극단적으로 부족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은 놀라울 정도로 끈질기게 적응해 나갔다. 덜 원하고 덜 요구하는 것. 만족의 기대치를 극한까지 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잔혹한 폐허가 내게 가르쳐 준 스토아학파적 생존의 교훈이었다.
거미줄처럼 가늘고 길게 얽힌 파괴된 도로의 끝에, 마침내 비교적 넓은 광장이 펼쳐졌다. 지친 발걸음이 마지막 힘을 내어 맞닿은 그곳은, 한때는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석조 빌딩들이 마치 병풍처럼 타원형으로 둘러쳐져 있어, 마치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가 이곳으로 옮겨진 듯한 장엄한 느낌을 주었던 곳이라고 했다. 나는 광장 한복판에 깨진 채 나뒹구는 분수대 잔해 위에 주저앉아 배낭에서 마른 육포 한 조각을 꺼내 작은 컵에 넣었다. 심하게 건조되어 공기처럼 가볍고 원래의 형태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는 고깃덩어리였지만, 나는 수통에 담아온 탁하고 미지근한 물을 조심스럽게 컵에 부었다. 그러자 부정형의 단백질 조직이 검붉은 빛을 띠며 마치 뒤엉킨 실타래를 풀어내듯 천천히, 거의 그로테스크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역겨운 피비린내가 솔솔 올라왔다. 나는 잠시 숨을 꾹 참고 손가락으로 물에 불어 흐물흐물해진 고기 조각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혀를 이용해 조심스럽게 이빨 사이로 고기를 밀어 넣은 뒤,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씹었다. 잠시였지만, 잊고 있었던 향긋한 행복감이, 그 원초적인 생명의 맛이 혀끝에서 느껴졌다. 나는 다시 힘을 내어 걷기 시작했다. 마우드가가 있다는 정신병원을 향해.
마침내 나는 무성하게 자란 잡초와 덩굴 사이에 반쯤 가려진, 흐릿하고 낡은 팻말 하나를 발견했다.
‘자비로운 자의 회당 (Chapel of the Merciful)’
정신병원의 이름으로는 다소 역설적, 아니 잔인하게까지 들렸다. 거의 반나절을 이 파괴된 도시, 이 지옥도를 헤맨 끝에, 나는 비로소 잠시나마 쉴 곳을 찾았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발을 질질 끌며, 검은색 옻칠이 비교적 최근에 다시 된 듯한 육중한 철제 대문 앞에 도달한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천천히 병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비록 폭격으로 인해 건물의 일부가 처참하게 부서지고 검게 그을렸지만, 그 규모와 양식으로 미루어 보아 한때는 무척이나 높고 아름다운 건축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천 년 동안, 이곳 신의 땅은 신성과 철학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영역이었다. 이곳에 세워진 수많은 교회와 수도원, 성과 궁전, 회관과 대학, 그리고 심지어 일반 주택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죄지은 인간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구원하는 신의 무한한 영광과 자비를 표현하는 고딕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물론 지금은 매캐한 연기와 잿빛 하늘 아래 그 찬란했던 과거의 모습을 상상조차 하기 어렵겠지만, 티 없이 맑고 푸르렀던 어느 날, 누군가 이 고딕 건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친 첨탑과 그 사이를 장식한 눈부신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건물 외벽을 가득 메운, 완벽한 대칭과 정교한 조각들을 직접 보았다면,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와 경건하게 성호를 긋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의 첨탑은 부러진 창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스테인드글라스는 텅 빈 눈구멍처럼 검게 뚫려 있었다.
‘신의 영광과 축복이 언제나 그대와 함께 하시기를…’
나는 문 옆, 폭격으로 생긴 커다란 구멍을 통해 병원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안뜰 역시 폐허가 되어 있었지만, 구석진 곳 그늘 아래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자리를 찾아 배낭을 내려놓았다. 거친 곳이지만 잠시라도 눈을 붙여 두어야 했다. 지친 몸뚱이가 간절히 잠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낡고 더러운 모포를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몸을 뉘었다. 주변의 깊은 정적은 칠흑 같은 어둠처럼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을 동반했다. 하지만 지친 몸으로 딱딱한 바닥에 누운 이 자리는, 비록 온갖 종류의 불편함과 불안함을 풍기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항상 극심한 고단함 속에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아주 잠시나마 찾아오는 미미한 편안함의 행복을 극대화시켜 주었다. 어쩌면 삶의 고단함은 오히려 그 삶을 놓지 않으려는 처절한 욕망을 극단적으로 높이는 원동력이 되는지도 몰랐다. 이제 모든 고통은 <피할 수 없음>이라는 냉엄한 현실로 다가왔다. 그러므로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심지어 즐겨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이 미친 세상을 견뎌낼 수가 없을 터였다. 결국 나에게 남은 것은, 그저 견디고 버티는 것뿐이었다.
나는 잠을 사랑한다. 아니, 어쩌면 현재 이 혹독한 시대를 살아가고 in media res(사건의 한가운데)에 던져진 모든 피조물들은 본능적으로 깊은 잠, 그 작은 죽음을 갈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직 잠 속에서만큼은 우리는 비로소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꿈속의 세상은 때로는 무수한 혼란과 상황의 단절, 혹은 비논리적인 영속성을 체험하게 하지만, 그런데도 그곳에는 단 하나의 확실한 장점이 있었다. 바로 아무리 끔찍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절대 죽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 꿈속에서, 나의 사랑 나탈리아를 마음껏 그려볼 수 있었다. 그녀의 살결의 감촉, 그녀의 숨결의 향기, 그녀의 목소리의 울림을 재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간절히 소원한다. 오늘 밤 꿈에서라도, 단 한 번이라도 그녀를 볼 수 있기를…. 나의 유일한 구원이자, 나의 영원한 심연인 그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