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텅 빈 묘지에는 다시 무겁고 쓸쓸한 바람만이 화약 냄새와 함께, 마치 망자의 한숨처럼 불어왔다. 나는 천천히 정신병원 건물 쪽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여전히 주위를 유심히 살피며, 하얗게 칠해져 있었으나 이제는 검게 그을리고 부서진 병원 담장을 따라, 아까 보았던 도로와 접한 작은 철문까지 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까는 굳게 닫혀 있던 그 작은 문이 지금은 활짝 열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니, 몇몇 사람들이 분주하게 음식이나 구호품으로 보이는 상자들을 병원 안으로 나르고 있었다. 문 근처에는 군용 트럭처럼 보이는 작은 트럭 한 대가 뒷문이 열린 채 주차되어 있었다. 그들은 병원 건물과 트럭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며 짐을 옮기고 있었다. 내가 조심스럽게 가까이 접근하자, 그들은 나를 한번 힐끗 쳐다보았지만, 별다른 경계심 없이 다시 묵묵히 자신들의 일에 열중했다. 그래서 나도 아무 말 없이 다가가 그들을 돕기 시작했다. 무거운 상자 몇 개를 함께 나르며,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마치 유령처럼 병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을 따라 들어간 곳은, 예상대로 병원 식당 옆에 붙어 있는 커다란 창고였다. 창고 내부 역시 폭탄의 흔적이 몇 군데 남아 있었고, 천장의 일부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창고 안쪽 주방에서는 책임자로 보이는 한 여자가 팔짱을 낀 채 우리가 짐을 내려놓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작은 키에 몸집이 통통한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세상에 대한 깊은 피로와 불만이, 마치 오래된 조각상에 낀 이끼처럼 가득해 보였다.
모든 짐을 옮기는 일이 마무리되자, 트럭에서 온 사람들은 내게 짧게 고맙다는 인사만 남기고는 서둘러 트럭을 타고 떠나버렸다. 나는 다시 병원 건물 안으로 돌아가 주방에 남아 있는 그 중년 여성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실례합니다. 저는 정령의 땅에서 온 나그네입니다. 죄송하지만, 혹시 이곳에 입원 중인 환자분 중에 <마우드가> 님을 알고 계시는지요?” 나는 최대한 공손하고 정중한 자세로 물었다.
“마우드가? 그 환자분과는 어떤 사이인데요?” 그녀는 여전히 하던 설거지에 열중하며, 귀찮다는 듯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저는… 그분의 아주 오래된 친구입니다.” 나는 또다시 거짓말을 했다. 왠지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면회가 쉽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쯧쯧… 친구라… 요즘 같은 세상에 정말 위험천만한 일을 하시는군요.” 그녀는 혀를 차며 비꼬는 듯 말했다. “당신도 오는 길에 직접 겪었겠지만, 언제 어디서 그 빌어먹을 파더스 놈들의 드론이 나타나 폭격을 퍼부을지 모르는 끔찍한 상황인데… 그깟 친구 하나 만나겠다고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다고요? 세상에….” 그녀는 마침내 하던 일을 멈추고 입을 삐죽거리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경멸과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지난 일 년 동안 이 파괴된 땅의 많은 도시들을 정처 없이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파괴되고 사라진 참혹한 세상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목숨을 걸고 위험한 여정을 계속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에 실종된 제 아내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혹시나 제 친구가 아내의 소식을 알지 않을까 싶어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절박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간절하게 쳐다보았다.
“음… 아내를 찾는다….”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표정이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러시군요…. 딱한 사정이 있으셨네…. 하지만 아시다시피 어제저녁에 또다시 큰 폭격이 있어서, 지금 모든 환자분들은 안전을 위해 지하 대피소에 계시고, 당분간 모든 면회는 전면 취소된 상태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병원 원장님을 한번 직접 찾아가 보시기를 바랍니다. 원장실은 원래 3층에 있지만, 아마 지금쯤이면 환자들과 함께 지하에 계시거나, 아니면 다른 안전한 벙커에 머무르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 행운을 빌지요….” 그녀는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자기 일로 돌아갔다. 나는 짧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주방을 지나 병원 본관 복도로 걸어갔다.
복도 내부는 폭격으로 인한 정전 때문에 조명이 모두 꺼져 있었고, 창문에는 두꺼운 쇠창살이 박혀 있어 그 사이로 희미한 자연광만이 간신히 스며들어와 복도를 음침하게 비추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공포 영화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복도 맨 끝에 지하 대피소로 통하는 듯한 육중한 철문이 있었다. 예상대로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벽에 붙어 있는 낡은 빨간색 비상 호출 버튼을 눌러 보았다. 잠시 후, 삐-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문에 달린 작은 감시창이 열리며, 지친 표정의 젊은 간호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혹시, 원장님을 잠시 뵐 수 있을까요?” 나는 또다시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물었다.
“원장님은 지금 자리에 안 계십니다. 원장실은 3층에 있고, 조금 전에 위층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 상황이라 환자분 면회는 절대로 불가능하십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셔야 합니다….” 그녀는 피곤하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미안하다는 듯 말하고는 감시창을 닫으려고 했다.
“아, 잠시만요! 혹시, 이곳 환자분 중에 <마우드가> 님을 아시나요?” 나는 혹시나 하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닫히려는 감시창을 다급하게 막으며 물었다.
“마우드가 님? 아! 그 괴팍한 천재 해커 분 말씀하시는군요?” 놀랍게도, 그녀는 마우드가의 이름을 듣자마자 삽시간에 표정이 밝아지며 반가운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네, 맞습니다! 바로 그 해킹하시는 분! 아시는군요?” 나는 희망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그럼요! 우리 병원에서 그분 모르시는 분이 없을걸요? 헤헤헤….”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워낙 성격이 괴팍하고 별나셔서 유명하시거든요…. 헤헤헤… 하지만 어떡하죠? 안타깝게도 그분은 지금 여기 안 계십니다. 벌써 일 년도 더 전에, 어느 날 갑자기 바람처럼 홀연히 사라지셨어요….”
“일 년 전에… 사라지셨다고요?” 나는 마치 높은 곳에서 딱딱한 바닥으로 추락한 것 같은 절망감과 허탈감을 느꼈다.
“네, 정말 흔적도 없이 감쪽같이 사라지셨어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죠.” 그녀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음… 그거 참 이상하군요…. 제가 아는 어떤 지인분께서는, 여전히 마우드가 님과 암호화된 메시지를 주고받는다고 하셨는데….” 나는 릴리안 나리의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 당연히 그러시겠죠…. 여기서 지내실 때도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서 컴퓨터 앞에만 앉아 계셨는데… 아마 어디를 가시든 똑같으실 거예요. 그분은 현실 세계보다는 가상 세계에서 사시는 분 같았으니까요….” 그녀는 이제 나와의 대화에 흥미를 잃은 듯,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감시창을 닫으려고 했다.
“저, 정말 죄송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나는 또다시 닫히려는 감시창을 다급하게 제지하며 물었다. “혹시… 마우드가 님을 찾아온 여자분은 없었는지 기억나시나요? 갈색 머리에… 눈빛이 깊고… 어딘가 슬퍼 보이는…” 나는 나탈리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나의 집요함에 짜증이 나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아니, 글쎄 제가 그걸 어떻게 다 알겠어요!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면회를 오는데, 제가 그 사람들 얼굴을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겠냐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간호사님. 저도 이러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절박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정말 오래전에 실종된 제 아내를 찾고 있습니다. 그녀가 제 전부입니다.” 내 목소리는 간절함으로 떨리고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감시창을 닫으려다 말고, 내 눈에 맺힌 눈물을 보았는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는 뜻밖에도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묻기 시작했다.
“혹시… 그 아내분도… 정신병원에 입원이라도 하셨었나요?”
“아뇨,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 아내가 마우드가 님과 아주 각별한 친구 사이였습니다.”
“혹시… 그 아내분의 이름이… <나탈리아>는 아니겠죠?”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마치 중요한 비밀을 확인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맞습니다! 나탈리아! 제 아내 이름이 나탈리아입니다!” 나는 순간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한 기쁨과 흥분을 느끼며 크게 소리쳤다. “그분을… 제 아내를 아십니까?”
“아니요, 그분을 직접 뵌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마우드가 님이 여기 계실 때, 그분의 책상 위에는 늘 <나탈리아의 일기>라는 낡은 책이 펼쳐져 있었어요.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으셨죠.”
“네! 맞습니다! 그건 바로 제 아내가 쓴 일기입니다!” 나는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뭔가 중요한 사실이 생각났다는 듯 환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한번 살피더니, 내게 조용히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우리는 다시 어둡고 적막한 1층 복도를 따라 반대편 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복도 끝에 있는, 다른 문들과 달리 유독 검게 칠해진 낡은 문 앞에 섰다. 그녀가 허리춤에 찬 열쇠 꾸러미에서 작은 열쇠 하나를 찾아 문을 따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예전에 약품이나 의료 기록을 보관하던 창고처럼 보였다. 먼지가 자욱했고, 천장까지 닿을 듯 높은 낡은 철제 선반 위에는 온갖 종류의 낡은 물품들과 서류 상자들이 뒤죽박죽 쌓여 있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비밀 공간이라도 되는 듯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가, 안쪽 선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낡은 가죽 가방 하나를 꺼내왔다. 그리고는 그 가방 안에서 편지 한 통을 찾아 품속에 조심스럽게 집어넣고는 내게로 다가왔다.
“저에게… 성함을 다시 한번 정확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마치 재미있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을 연출하는 배우처럼,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제 이름은 세르게이 세브르자입니다. 다들 편하게 세자라고 부릅니다.”
그녀는 내 이름을 듣고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품속에서 아까 그 편지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떨리는 손으로 받아든 편지 봉투 위에는, 너무나도 그리웠던, 나탈리아의 익숙한 필체로 내 이름이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세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