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갑자기 섬뜩한 기운에 눈을 떴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지만, 잠결에도 몸이 먼저 위험을, 그 원초적 공포를 감지했다. 폐허의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면 오감이 극도로 예민해져야만 했다. 나는 바닥을 통해 전해져 오는 미세한 진동을 먼저 느꼈다. 그리고 뒤이어 낮고 둔탁한 기계음이, 마치 지옥의 북소리처럼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를 들었다. 땅의 흔들림은 비록 미세했지만, 다가오는 위협의 종류와 거리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리고 소리보다 훨씬 신속했다. 이 파괴된 세상에서는, 살아있는 유기체는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었지만, 차가운 기계들은 오히려 섬뜩하리만큼 활발하게 움직이며 생존자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공포가 새벽안개처럼 내려앉았고, 살아남은 자들 사이에서는 불신과 반목이 독버섯처럼 뿌리를 내렸다. 약탈과 은둔, 뒤늦은 반성과 냉혈한 생존 본능이 기묘하게, 거의 변태적으로 공존하는 세상.
땅을 울리는 둔중한 쇳소리.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도시 외곽을 정기적으로 순찰하는 파더스의 중장갑 순찰차들이었다. 나는 황급히 몸을 더 깊숙한 폐허 속으로, 마치 겁먹은 짐승처럼 납작하게 숨긴 채, 벽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바깥 세상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이른 새벽 거리를 순찰하는 모든 군용 차량들은 예외 없이 두꺼운 반응 장갑을 두르고 있었고, 차량 앞뒤에는 강력한 에너지 무기나 기관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선 근처 건물들을 향해 위협적인 경고 사격을 가하며 강한 굉음으로 주위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존재들에게 자신들의 등장을 알렸다. 마치 겁먹은 쥐들처럼 폐허 깊숙한 곳에 숨어 지내던 생명체들이 그 소리에 놀라 황급히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아직 전날 밤 사냥에 성공하지 못해 굶주린 이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차가운 기계 사냥꾼들과 위험천만한 숨바꼭질을 시작해야만 했다. 신(神)은 인간들 사이의 끊임없는 반목과 증오와 함께 이미 오래전에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린 듯했다. 거친 폐허 속으로 내몰린 인간은 결국 문명의 허울을 벗고, 생존 본능만이 남은 원초적인 야수(野獸)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온 세상에 널려 있는 잿더미는, 한때 존재했던 모든 가치의 차이, 숭고함의 깊이, 고상함의 넓이를 무의미하게 만들며 모든 것을 평등하게 만들었다. 죽음 앞에서의 평등. 남은 자들의 눈빛 속에는 오직 처절한 생존 의식만이, 바람 속에 섞인 비릿한 피 냄새처럼 번져오고 있었다. 생존. 그것만이 이제 유일한 목적이자 가치가 되어버린 세상이었다.
나의 유년 시절 역시, 사실 지금 폐허 속에서 숨 막히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숨기와 달리기, 그리고 폭력으로 점철된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수없이 겪었던 질곡과 난관들이 내 안에 쌓여 만들어낸 개인사는, 그 어떤 언어로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슬픔과 분노를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폭력과 학대의 그늘 아래서 보낸 나에게 남은 과거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이자 동시에 나의 정체성이 되어버린, 등 전체에 새겨진 기괴하고도 어그러진 용(龍) 문신 그림이다.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거친 붓 그림의 용. 그것은 나의 몸뚱이를 휘감고, 나의 삶 전체를 관통하며, 내가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고통스러운 기억의 족쇄로 아로새겨져 있었다. 푸른색 공업용 염료와 황산바륨 가루에 정체 모를 산(酸) 용액을 녹여 만든, 피부를 태우는 듯한 고통을 동반하는 염료. 날카로운 바늘 끝이 살갗을 파고들 때마다 느껴졌던 그 지독한 고통 속에서, 그 시절의 나는 세상을 오로지 증오와 파괴, 그리고 폭력의 대상으로만 치환하고 말았다.
모든 것을 헝클어뜨리거나 파괴하는 것에 대한 집착.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길들여지거나 혹은 종속되어 버린 영혼. 나의 모든 욕망은 지극히 즉흥적이고 파괴적이었으며, 아주 짧고 피상적인 속죄의 감정은 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 방식으로 투영되었다. 적어도 내가 스무 살이 넘어, 우연한 기회에 난독증 치료를 받기 전까지는 그랬다. 정령의 땅에서 버려진 고아로 살아가던 나의 모든 행위에는 일말의 반성이나 죄책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오픈에어칩(OpenAirChip)>이라는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칩을 뇌 속에 이식하는 수술을 받았다. 대부분의 난독증 환자들은 치료가 끝난 후 안전상의 이유로 칩 제거 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평생 내 몸의 일부로 간직하기로 결정했다. 간직했다는 표현보다는, 어쩌면 그것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생각이 실시간으로 글자로 변환되어 스크린에 표현되는 이 장치를 이용하여, 끊임없이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분석하는 데 깊은 재미를 들였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글쓰기에 대한 애착이, 비로소 나를 오랫동안 옭아매고 있던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조금씩 단절시켜 주었다.
마침내 파더스 순찰 부대가 지나가고 다시 불안한 평온이 찾아왔을 때, 나는 릴리안 나리가 알려준 그 정신병원에 무사히 도착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병원의 육중한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아무리 녹슨 벨을 눌러도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병원을 빙 둘러싸고 있는, 폭격으로 곳곳이 무너져 내린 높은 담벼락을 따라 천천히 다른 입구를 찾아 돌기 시작했다. 혹시 사람이나 동물이 드나들며 만들어 놓은 작은 개구멍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들어갈 참이었다. 머리 위에서는 뜨거운 햇살이 가차 없이 내리쬐어, 내 발밑의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을 뜨겁게 달구었다. 유난히 더운 날씨였다. 바람은 진작에 멈추었고, 공기는 무겁고 탁했다. 나의, 헬리오트롭(heliotrope)처럼 빛에 따라 색이 바래고 변색한 낡은 윗도리에서는 땀에 찌든 쉰내가 역겹게 올라왔다.
그렇게 병원 건물을 반쯤 돌아 뒤편으로 갔을 때쯤, 나는 뜻밖의 광경과 마주쳤다. 병원 담벼락과 이어진, 지나치게 넓어 보이는 공원묘지 한가운데서, 바닥에 누운 시체 한 구를 둘러싸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장례식인 듯했다. 내 앞에는 그림자 하나 드리우지 않는 텅 빈 공간이 펼쳐져 있었고, 묘지의 모든 물체 하나하나, 비석의 날카로운 모서리 하나하나, 그리고 굴곡진 땅의 모든 곡선이 눈이 시릴 정도로 강렬한 햇빛 아래 뚜렷하게 두드러져 보였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강한 햇빛 속에서 오히려 광채 없는 흐릿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땅바닥에 누워있는 죽은 그녀는 이미 생기를 잃고 차가운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장례 절차를 돕던 인부들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의식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사람들을 헤집고 나와 그늘을 찾아 흩어졌다. 이윽고 염을 마친 시신이 담긴 관이 내 발아래 놓였다. 거울이 달려 있었으나 이미 누렇게 변색하고 깨진, 낡은 옷장 문짝으로 급하게 만든 듯한 조잡한 관이었다. 번쩍거리는 싸구려 금속 장식의 모양새가 마치 아이들의 필통을 연상케 했다.
관 뚜껑이 열리자, 죽은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이마 위로 검고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린 채, 평온하게 잠든 듯 누워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왼쪽 관자놀이에 검푸른 멍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입가에는 미처 닦아내지 못한 흰 거품 자국도 보였다. 그녀는 몸에 맞지 않게 화려하고 반짝이는 에나멜 구두를 신고 있었고, 목까지 단추가 채워진 야들야들한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낡은 밀짚모자가 가슴팍에 놓여, 검붉게 변색한 핏자국을 어설프게 가리고 있었다. 사고로 잘려나간 듯한 허리 부분은 장의사가 몹시 서툴고 거칠게 대충 이어 붙여 놓은 듯 보였다. 그리고 너덜너덜하게 찢겨나간 다리 부분은 빛바랜 체크무늬 숄로 아무렇게나 덮어놓았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어린 소녀 하나가 자신이 꺾어 온 들꽃으로 만든 작고 동그란 화관을 그녀의 머리에 씌워주려 다가오다가, 시신의 끔찍한 모습에 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전율과 함께 뜨거운 그리움이 솟구쳐 올랐다. 삶은 고통이다. 죽으면 그 고통도 함께 사라진다. 어쩌면 그것이 죽음이 주는 유일한 위안일지도 모른다. 나는 애써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른 채, 최대한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관을 빙 둘러싸고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역설적인 편안함을 느꼈다.
장례식은 놀라울 정도로 짧고 간소하게 끝났다. 흔한 연도나 추도사 한마디 없이, 각자 가져온 이름 모를 야생화를 관 속에 던져 넣는 것으로 모든 의식이 마무리되었다.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노인들이 가장 먼저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뜨거운 태양 아래 구름처럼 무겁게 드리운 무더운 대기 속으로, 죽음에 무감각해 보이는 젊은이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죽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 늘 우리 가까이에 머무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냉혹한 현실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모든 기대를 지극히 가볍고 덧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오직 살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망. 그것만이 유일하게 남은 진실이었다.
아주 오래전 그날, 나탈리아가 나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이끌었던 그녀의 방은, 내가 살던 정령의 땅 귀양촌에서 제법 떨어진, <죽은 자들의 도시> 외곽의 번잡한 주요 도로변에 닿아 있었다. 그녀의 작은 창문 너머로는 늘 혼탁하고 헛된 세상의 소음들이 끊임없이 떠다녔다. 거대한 영구차들과 시외버스들의 둔탁한 진동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불안하게 뛰던 거친 심장 소리만큼이나 내 온몸 구석구석으로 파고들곤 했다. 그녀가 살던 낡은 건물의 대문과 벽에는 온갖 종류의 조잡하고 퇴폐적인 색상의 래커 스프레이 낙서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잡초만 무성한 작은 뜰 한구석에는, 마치 난파된 배의 뱃머리 조각처럼, 비바람에 삭고 헤진 낡은 옷가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마치 그녀를 둘러싸고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이 모든 비극적인 사건들이 이미 예고된 듯, 그렇게 가라앉고 변색하는 운명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나는 종종, 삐걱거리는 칸살이 엉성하게 붙어 있는 그녀의 작은 침대 옆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곤 하였다. 햇볕에 그을린 듯 색이 바랜 창틀 너머의 풍경들. 나의 눈은 그때 그 시절의 일련의 순간들을 필사적으로 포착하고 기억하는 방식으로 채워져 갔다. 먼지 쌓인 비둘기색 커튼은 늘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창밖 작은 화분에 심겨 있던 금작화 나무는 이미 오래전에 앙상하게 말라 죽어 있었다. 그 마른 가지에는 누군가 버리고 간 찢어진 깃발 조각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나의 멍한 눈동자는 결국 아무것도 담지 못한 채 텅 비어 버리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언제나 그랬듯, 과거와 현재,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가 뒤죽박죽 혼재하는 고질적인 환상과 망상에 사로잡히곤 하였다. 특히, 그녀, 나탈리아에 대하여.
그녀는 때로는 세상 모든 것을 날카롭게 씹어 삼킬 듯이 저미며 처절한 진솔함으로 내게 다가서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투명한 벽을 쌓고 늘 일정한 거리에서 나를 밀어냈다. 나는 마치 칼날에 의해 흐릿하게 절단된 그림자처럼, 늘 그녀의 주변을 불안하게 서성거릴 뿐이었다. 이런 복잡하고 모순적인 느낌은,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내밀하게 여러 색조들이 서로 결탁하여 만들어내는 강렬한 끌림을 주었고, 나의 시선을 언제나 그녀에게 고정시켰다. 늘 그녀만을 향하게 했다.
우리는 마침내 첫 키스를 나누었다. 그전까지 내 안에서 한없이 맴돌며 나를 괴롭히던 사소한 갈등들과, 절대로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았던 간결하면서도 치명적인 끌림과 그에 대한 서투른 반항심을 애써 외면하고 무시해버리려고 발버둥 치던 나는, 그녀의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을 훔치는 바로 그 순간, 내 안에 존재했던 모든 부조리와 혼란이 거짓말처럼 말끔히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너무나 신기하고도 황홀한 경험이었다. 나는 이것을 주저 없이 ‘사랑’이라고 정의했다.
“세자,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그리고 바로 오늘, 이 순간을 절대로 잊지 말아요. 나의 귀엽고 서투른 사랑, 세자!” 그녀는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의 떨리는 손을 그녀의 두 손으로 꼭 잡았다. 그녀의 눈빛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