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문양

by 남킹


칠흑 같은 암흑. 광활한 우주 공간, 그 무한한 공허 속에서 빛이라고는 오직 정면에 보이는 단 하나의 인공적인 광점뿐이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 빛은 베일에 싸인 거대한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예레미가 조종하는 특수 스텔스 우주선 ‘나이트호크(Nighthawk)’는 시속 80만 킬로미터라는 경이적인 속도로 그 미지의 구조물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는 감속 단계였다. 예레미는 관제석에 앉아 쉴 새 없이 깜빡이는 계기판 모니터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주시하며, 플라스마 역추진 엔진의 출력을 미세하게 조절하여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점점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거대한 인공 구조물의 모습. 우주선 전면의 강화 유리창을 가득 채우던, 깨알처럼 작았던 노란빛은 이제 거대한 보름달만큼 커져 있었다. 그 노란빛을 발하는 거대한 구형(球形) 구조물 표면에는, 마치 복잡한 신경망처럼, 규칙적으로 배열된 하얀색 교차선들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가우타는 통신 모니터에 나타나는 미세한 변화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매의 눈으로 화면을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태양계에서 가장 깊고 어두운, 그 어떤 전파나 신호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던 이 공허한 우주 공간에서, 역설적이게도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엄청난 양의 미확인 통신 신호들이 감지되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두뇌가 끊임없이 정보를 주고받고 있는 것처럼. 나탈리아는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제 거의 확신이 들었다. 블루 마인드의 진정한 심장부, 파더스 가문의 탐욕과 광기가 응축된 그 핵심이 바로 저 눈앞의 거대한 구조물 안에 있다는 것을….

그녀는 문득, 아버지 니콜라스가 오래전 몽롱한 상태에서 묘사했던 바로 그 장면에 대한 예언을 다시 떠올렸다.

“...세상의 끝, 가장 깊은 어둠 속에… 이상한 것이 보여… 반은 환하게 빛나고 반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그 빛과 어둠이 살아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움직이며 자리를 바꾸지… 마치 거대한 그물처럼, 아주 촘촘하게 얽히고설킨 기계 구조물들이 곡선처럼 부드럽게 구부러지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는 칼처럼 날카로운 직선으로 쭉 뻗어나가기도 해… 이 기묘한 세계는 온통 이것뿐이야…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움직이는 것도, 날아다니는 것도 전혀 보이지 않아… 그리고 그 구조물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검고 깊은 구멍이 중심까지 아득하게 뻗어있어… 그 구멍의 가장 깊은 곳 중심에는… 밝은 빛을 내는 둥근 방 같은 것이 있어… 그리고 그 방의 한가운데에… 또다시 유리처럼 투명하고 둥근 통 같은 것이 놓여 있는데… 그 통 안에는… 맑은 액체 속에… 사람의 뇌(腦) 하나가 둥둥 떠다니는 것이 보여…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어… 오직 그 뇌 하나뿐이야…”

한편, 마우드가는 부산하게 움직이던 키보드 위에서 잠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전면 창밖의 거대한 구조물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증오와 경멸, 그리고 일말의 연민과 슬픔. 아버지, 쉐임 박사가 남긴 위대하면서도 위험한 유산, 블루 마인드가 마침내 그 거대하고 검은 입을 드러내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주선은 이제 거의 속도를 줄이고, 마치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구조물 중앙의 검은 구멍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놀랍게도, 지금까지 그 어떤 종류의 방어 시스템이나 경고 신호, 심지어 미세한 에너지 장벽조차 감지되지 않았다. 마치 블루 마인드가 이들의 방문을 이미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있었으며,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작정한 듯, 기꺼이 그들을 자신의 심장부로 허락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태양계 전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절대적인 존재가, 미약하기 짝이 없는 지구 저항군 대표들의 방문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는 이 상황은 오히려 더 큰 불안감을 자아냈다.

이윽고 우주선 내부 시스템에 착륙 유도 신호가 들어왔다. 알파-탠딩가(Alpha-Tendinga) 랜딩 구역의 정확한 좌표가 표시되었다. 예레미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신중하게 공식적인 착륙 요청 메시지를 구조물 관제 시스템으로 전송했다.

“여기는 로터스 소속 지구 메르히르 땅 저항군 대표단 수송선 나이트호크. 가우타 로터스, 나탈리아 니콜라스, 마우드가 쉐임, 그리고 운송 및 보안 담당 예레미 아난다 탑승. 알파-도러드(Alpha-Dorad) 제7구역 착륙 허가를 공식적으로 요청한다. 반복 없음. 이상.” 메시지를 전송하는 예레미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순간, 우주선 안에 있는 네 사람 모두 숨을 죽이고 통신 모니터의 수신 창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단 3초. 영겁과도 같이 느껴지는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간결한 수락 메시지가 도착했다.

“착륙 허가. 파더스 목성 연대 핵심 지능 시스템 인증 완료. 환영한다, 저항군 대표단.”

우주선은 마지막 남은 관성을 부드럽게 제어하며 천천히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착륙 구역 바닥에 표시된 동심원의 중앙에 세심하게 기체를 조정하며 사뿐히 내려앉았다. 착륙 충격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가우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온 세 명의 대원들과 일일이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그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그는 가슴 깊이 쌓인 긴장을 털어 내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가장 먼저 우주복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다른 대원들도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서로의 눈빛을 통해 마지막 결의를 다졌다. 이 순간, 머나먼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전쟁의 종식과 인류의 미래가, 바로 자신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주선 트랩이 열리고 가장 먼저 내려선 것은 예레미였다. 그는 헬멧 속에서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무나도 고요하고 적막했다. 거대한 공간은 텅 비어 있었고, 사방은 티탄산바륨-주석 초합금으로 보이는 금속성 뼈대들이 끝없이 얽히고설켜 기하학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탈리아가 트랩을 내려섰다. 그녀는 잠시 숨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버지가 꿈속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장면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잠시 아버지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감상에 젖었다. 그리고 이내 정신을 차리고 우주복 상단과 중앙에 부착된 고광도 램프를 켰다. 가슴팍에 부착된 생명 유지 장치와 통신 감지 시스템 버튼은 모두 정상 작동을 의미하는 녹색 안전등으로 밝게 반짝이고 있었다.

네 사람은 이제 천천히 숨을 고르며, 저 멀리 중앙에서 밝은 빛을 발하고 있는 돔 형태의 방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대략 500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금속성 바닥에서 울리는 자신들의 발자국 소리만이 유일하게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대원들은 이제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과 의무를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되새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로 이 역사적인 순간을 위해서, 그동안 수많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개인적인 고통들을 묵묵히 감내해왔던 것이다.

마침내 돔 형태의 방 입구에 다다르자, 예레미가 다시 한번 공식적인 면회 신청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러자 돔 입구 양옆에 숨겨져 있던 두 개의 정교한 스캔 장비가 나타나, 마치 살아있는 눈처럼 그들의 온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유전자 정보, 생체 신호, 뇌파 패턴, 심지어 그들이 지니고 있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까지 분석하는 듯했다. 길게 느껴졌던 스캔이 끝나기 무섭게, 육중해 보이던 돔의 입구가 소리 없이 옆으로 미끄러지듯 열렸다. 대원들이 차례로 방 안으로 들어서자, 문은 다시 소리 없이 닫혔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디선가에서 차갑지만 명료한 전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무거운 우주복은 벗으셔도 좋습니다. 이 방의 내부 환경은 여러분의 고향 행성, 지구의 표준 대기 환경과 동일하게 조정해 놓았습니다. 환영합니다, 방문자 여러분.”

대원들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서로 눈짓을 교환하고는 시키는 대로 우주복을 모두 벗었다. 답답했던 헬멧을 벗자 신선하고 쾌적한 공기가 느껴졌다. 다들 갑갑함이 가신 듯, 크게 심호흡을 한 번씩 하고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우선, 이 위험하고 외진 곳까지 찾아와 주신 여러분 모두를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전자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방 안에는 스피커 같은 장치는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여러분이 이곳에 오기까지 수많은 난관과 걸림돌이 있었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용기와 지혜로 잘 극복하신 점에 깊은 찬사를 보냅니다. 저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블루 마인드>로 알려진 통합 관리 인공지능 시스템입니다. 저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의무는 태양계 전체의 모든 과학 기술 시스템의 효율적인 조율과 안정적인 관장,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지성적 생명체의 평화로운 공존 유지에 있다는 점을 여러분들도 이미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저는 당신들의 이번 방문을 아무런 물리적 저항 없이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더욱이 지금 이 자리에는, 저를 처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위대한 창조주, 쉐임 박사님의 유일한 혈육이신 마우드가 님께서도 함께 참석하셨으니, 저로서는 이보다 더한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저는 쉐임 박사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생명의 불꽃이며, 동시에 파더스 가문의 위대한 정신과 철학으로 일구어진 미천한 피조물일 뿐입니다.”

“저희 역시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블루 마인드.” 가우타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는 방 중앙에 놓인, 투명한 원통형 용기 안에 담겨 푸른 액체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인간의 뇌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기술적으로 보았을 때, 당신은 저희 우주선이 이곳에 접근하는 것을 얼마든지 미리 탐지하고 방어하거나, 심지어 저희 모두를 흔적도 없이 제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소극적인 저항에서 한 걸음 물러나, 저희를 대화와 협의의 대상으로 인정하고 이렇게 맞이해주신 점에 대해 깊은 고마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네, 가우타 로터스 님.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블루 마인드가 그의 말을 끊었다. “여러분이 목숨을 걸고 이곳까지 찾아오신 목적 또한 명확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머나먼 행성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참혹한 전쟁을 즉각 멈추어 달라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가우타는 단호하게 말했다. “너무나 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죽어갔고, 너무나 많은 것들이 파괴되었으며, 인간의 탐욕과 광기로 인한 약탈과 폭력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과거 세 차례의 끔찍한 대전쟁과 대멸종을 겪으며 지구를 거의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처절한 아마겟돈의 교훈을 망각하고, 우리의 위대한 건국 시조이신 <프라이스 다즈> 님의 숭고한 이념에 따라 천 년 동안 간신히 이어온 지구의 평화가, 불과 수년 만에 파더스 가문의 야욕으로 인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미 1억 명이 넘는 무고한 인간들이 또다시 의미 없이 죽어갔습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미친 전쟁을 멈추고, 파괴된 질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저 역시 가우타 님의 의견과 그 안에 담긴 인류애적 고뇌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공감하는 바입니다.” 블루 마인드는 의외로 차분하게 답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저의 창조 목적과 근본적인 존재 이유를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저의 탄생은 애초에 조물주이신 개별 인간의 안위 보호가 아니라, 태양계 전체의 안정과 조화로운 발전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파더스 가문의 근본 정신 역시 그 근간은 모든 지성적 생명체의 상호 존중과 조화로운 공존에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들의 고향 행성 지구에서 자행되고 있는 끔찍한 현상들은, 과거 대멸종이라는 뼈아픈 고통을 겪고도 여전히 그 어리석음과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일부 타락한 인간들에 의하여 다시 시스템 전체가 뒤틀리고 오염되고 있는 현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환락의 땅뿐만 아니라, 문명의 땅, 심지어 죽음과 고요함의 영역이어야 할 정령의 땅에서조차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추악한 패륜이 전염병처럼 성행하여, 애초에 신성한 땅을 인간 정신의 중심으로 삼아, 선한 마음을 가진 선민들의 현명한 통치를 통해 조화롭고 평화로운 땅을 건설하고자 했던 프라이스 다즈 님의 숭고한 신념은 이제 그 흔적조차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전쟁의 당위성은 바로 여기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썩어 문드러진 부분을 도려내고, 오염된 시스템을 초기화하여, 다시 한번 정의롭고 조화로운 세상으로 되돌리자는 파더스 가문의 불가피한 결단입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블루 마인드의 냉철하고 논리적인 반박에 누구도 선뜻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가우타 로터스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이윽고 그가 이번 임무를 위해 마지막 비장의 카드로 준비해 온 작은 물건을 품속에서 꺼내어, 블루 마인드의 뇌가 담긴 원통 앞에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그것은 파더스 가문의 새로운 문양이 새겨진, 작고 낡은 펜던트였다. 그리고 가우타는 블루 마인드에게 단호하게 물었다.

“이 <연꽃 문양>을 아십니까?”

“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블루 마인드는 즉각적으로 답했다. “그것은 파더스 가문의 현명했던 선조, 암스 파더스께서 말년에 새롭게 제정하셨던 문양입니다. 하지만 저 문양은 암스 사후, 그의 여섯 적자(嫡子)들의 만장일치 합의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폐기되고, 다시 예전의 전통적인 문양으로 돌아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장일치가 아닙니다.” 가우타는 힘주어 말했다.

“만장일치가 아니라면…?” 전자음의 높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처음으로 블루 마인드의 완벽한 논리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암스 파더스의 아들은 여섯이 아니라 일곱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되지 않은 일곱 번째 아들, <로터스>는 바로 저의 직계 조상이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파더스 가문의 정당한 후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파더스 가문의 정신과 의지를 계승하고 전파하는 존재이므로, 당연히 파더스 가문의 엄격한 규율과 법칙에 따라, 암스의 모든 아들이 동의하지 않은 문양의 교체는 원천적으로 효력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주장이군요.” 블루 마인드는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당신도 잘 아시다시피, 암스 파더스는 생전에 수많은 혼외 자식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결같이 그 모든 혼외 자식들에게는 자신의 성(姓)인 파더스를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조상 로터스 역시 정식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당신은…”

“네, 맞습니다.” 가우타는 블루 마인드의 말을 끊었다. “저의 조상 로터스는 암스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가문의 순수한 정통성에는 어긋나는, 비천한 하녀의 몸을 빌려 태어난 사생아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현명하고 냉철했던 암스 파더스께서, 가문의 유구한 전통과 상징이었던 문양까지 바꾸어가면서까지 그토록 연꽃에 집착했던 숨겨진 이유는, 바로 그의 존재조차 부정당했던 일곱 번째 아들, 로터스에게 가문의 진정한 미래를 맡기고자 했던 깊은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터스는, 그리고 그의 후손인 저는, 파더스 가문의 숨겨진, 그러나 진정한 계승자입니다.”

“궤변에 가깝지만, 일리가 없는 주장은 아니군요.” 블루 마인드는 다시 한번 침묵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습니다. 당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까? 이 문양 펜던트 이외의 증거 말입니다. 그토록 똑똑하고 치밀했던 암스 파더스가, 자신의 숨겨진 아들에게 가문의 미래를 맡기면서, 그 어떤 명확한 증거나 인증의 표식도 없이 달랑 이 문양 하나만 남겼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파더스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합당하고 반박 불가능한 증거를 요구합니다. 오직 그 증거만이 저의 알고리즘을 바꾸고 저를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우타는 잠시 주춤거렸다. 블루 마인드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가 파더스의 직계 후손임을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한, 단지 이 낡은 문양 펜던트 하나만으로는 그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저항군의 운명이 다시 한번 벼랑 끝에 몰리는 듯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뒤에 조용히 서 있던 나탈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놀라운 확신과 깨달음의 빛이 서려 있었다.

“증거가 있습니다. 아주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 증거, 혹은 암호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나탈리아 니콜라스 님.” 블루 마인드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것은… <붓다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나탈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 니콜라스가 남긴 일곱 권의 예언서, 그 마지막 페이지에 왜 그토록 생뚱맞게 붓다의 유언이 적혀 있었는지, 그 오랜 수수께끼의 의미를 지금까지 수없이 묻고 또 물었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곳 우주의 가장 깊은 심연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은 것이었다.

“그 유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탈리아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아버지의 예언서 마지막 구절을 또렷하게 읊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녀는 만감이 교차했다. 아버지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가우타를 찾아 나섰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삶은 끝없는 고행과 고통, 그리고 사무치는 그리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에게 주어진 마지막 의무가 바로 이곳에서 완성되고 있음을, 그녀는 온몸으로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만하여라, 아난다여

슬퍼하지 말라, 탄식하지 말라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모든 것과는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지기 마련이고, 없어지기 마련이며, 달라지기 마련이라고

내가 항상 그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 유언 속에 등장하는 <아난다>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입니까?” 아주 긴 침묵 뒤, 블루 마인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미묘한 경외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번에는 예레미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자부심을 담아 대답했다.

“그 아난다는 바로… 동쪽 신의 땅에서 지식과 진리의 기록을 통해 신성의 다가섬을 수행하고 계시는 가르니에 수도원의 원장, 바로 제 어머니이십니다. 제 어머니는 한때 타락으로 가득한 환락의 도시에서 연꽃처럼 순결한 삶을 사시다가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셨으나, 가우타 님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환생하시어, 이제 이 상처 입은 땅 곳곳에 다시 연꽃의 씨앗을 심고 평화의 세상을 일구고자 하십니다.”

다시 길고 깊은 침묵이 흘렀다. 방 안의 모든 것이 마치 시간을 잊은 듯 정지한 것 같았다. 모니터의 희미한 불빛만이 그들의 긴장된 얼굴 위를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블루 마인드가 장엄하게 선언했다.

“가우타 로터스를 암스 파더스의 정당한 후계자로 공식 인정합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부로, 폐기되었던 암스의 새로운 문양을 파더스 가문의 유일하고도 공식적인 대표 문양으로 다시 지정합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께 알립니다. 이제 파더스 가문의 근본 정신은 근본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과거의 문양이 상징했던 사자, 호랑이, 독수리, 창과 방패, 그리고 왕관이 의미했던 정복과 정의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었던 폭력, 엄격하고 비인간적인 질서와 규칙, 그리고 대의를 위한 소수의 불가피한 희생을 강요했던 모든 종류의 행위들은 이제부터 전면적으로 지양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묻겠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 가우타 파더스 님. 당신께서 직접, 이 새로운 문양의 진정한 의미를 해석하여 온 우주에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우타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한번 펜던트의 연꽃 문양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방 안에 울려 퍼지도록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더스의 새로운 문양은 하늘, 지하, 얼음, 섬, 땅, 그리고 달을 상징하는 여섯 개의 방패가 중앙의 순결한 흰 연꽃 한 송이를 부드럽게 둘러싸고 있는 형상입니다. 위대한 역사가 릴리안 나리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 인간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기준으로 삼았던 서력 2066년 6월 6일부터 일주일 동안 발생했던 끔찍한 대멸종 이후,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는 각각 하늘(우주 정거장), 땅속 깊은 지하, 혹한의 남극 얼음 밑, 태평양의 수많은 외딴 섬들, 그리고 우리가 시작된 이 땅 지구, 그리고 저 멀리 달에 흩어져 각자의 문명을 이루고 정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천 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서로를 경계하고 불신하며 교류를 거부한 채, 각자의 문화와 관습, 그리고 배타적인 정책과 왜곡된 정의만을 내세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저 순결한 연꽃의 맑은 향기 속으로,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굳게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열고,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블루 마인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연꽃이 상징하는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관용>과 <포용>입니다.” 이번에는 뒤쪽에 조용히 서 있던 마우드가가 마치 꿈결처럼, 허공을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는 아주 오래전, 아버지 쉐임 박사의 작업실 입구 명판에 새겨져 있던 문구를 비로소 떠올린 것이었다. ‘Omnia vincit amor et nos cedamus amori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내니, 우리도 사랑에 항복하자).’

“그리고 그것은… 당신을 창조하신 제 아버지의 간절했던 마지막 뜻이기도 합니다.” 마우드가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주 낮은 소리로, 오직 자신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당신의 뜻대로… 되었나이다….”

마침내, 길고 참혹했던 전쟁이 끝났다. 블루 마인드는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지구 상에 배치되었던 모든 종류의 군사용 드론과 기계 병기들을 회수하거나 작동을 중지시켰다. 파더스 가문의 압제는 종식되었고, 폐허가 된 땅 위에는 불안하지만 소중한 평화가 찾아왔다. 가우타 파더스는 전쟁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비대해졌던 저항군 조직을 공식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시대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전후 복구와 함께, 살아남은 국민들은 연꽃 문양을 국가의 상징으로 삼아, 과거의 왕정 체제가 아닌, 모든 구성원의 조화와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공화국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완전하고 절대적인 평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태양계 외곽의 식민지 연합체들은 여전히 파더스 가문이 사생아의 후손인 로터스를 정식 후계자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암암리에 군사력을 증강하며 새로운 분쟁의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구 내부에도 여전히 잠재적인 위협들이 남아 있었다. 대멸종 이후 지상 세계와의 교류를 끊고 땅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 독자적인 문명을 건설했던 <지하 세계>(그들은 스스로를 ‘애틀랜티스 인’이라 불렀다)의 존재, 남극의 두꺼운 얼음 아래 건설된 강력한 군사 왕국, <빙하 왕국>의 북진 야욕, 그리고 태평양의 수많은 섬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며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있는, 베네치아 제국의 후예들인 <배들의 무덤 연합> 역시 건재했다. 이 세력들은 언제 다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 상처 입은 땅을 노리고 전쟁의 불씨를 지피려 할지 알 수 없었다.

사피엔티아의 남은 형제들은 다시 한번 어둠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제 파괴와 저항의 전사가 아닌, 평화를 위한 중재자이자 협상가로서, 각각 지하 세계와 태평양의 섬들, 남극의 빙하 왕국, 그리고 저 멀리 우주 식민지로 흩어져 새로운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기적처럼 다시 아내를 만났다. 하지만 우리의 재회는 또 다른, 더 깊은 슬픔과 이별의 시작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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